6.10민주항쟁
상태바
6.10민주항쟁
  • 글_김영란 차장
  • 승인 2007.06.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분노와 저항의 민주주의 수호 역사현장으로 가다

박정희에 이어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정권은 1980년 광주의 봄을 짓밟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하고 폭압을 강화하여 정권 유지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정의사회 구현’ ‘의식 개혁’ ‘선진조국 창조’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전두환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뿌리를 흔들만큼 폭력과 탄압을 일삼았다. 특히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관계법, 국가보안법 등을 개악하여 국민들의 기본권마저 제한하고, 정치적으로 반대입장에 있는 인사들을 더욱 옥죄면서 탄압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80년 말에는 언론사 통폐합을 강행하고 언론기본법을 만들어 언론을 철저히 권력의 시녀로 이용했다.


신한민주당 ‘신당 돌풍’, 제1거대야당으로 자리매김하다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던 대통령 당선에 대해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헌법을 바꾸자는 강력한 열망을 표출해 왔다. 이러한 바람과 분노는 1985년 2월 12일 실시되었던 총선에서 놀랍게 나타났다. 당시 해금으로 풀려난 구신민당 출신 전직 의원들은 1985년 1월 18일 김대중, 김영삼의 지원을 받아서 신한민주당의 창당대회를 열었다. 대의원 523명이 참가한 창당대회는 이민우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로 선출하고 김녹영, 이기택, 조영하, 김수한, 노승환 등 5명을 부총재로 뽑았다. 이 창당대회는 후에 있을 2월 12일로 예정되어 있던 제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으며, 많은 민주인사 세력이 결집되어 힘을 더했다. 특히 5공화국 정권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대중이 선거 4일 전에 귀국하면서 더욱 열기가 더해갔다. 그러한 가운데 민주인사 중 한 명인 김영삼이 목숨을 건 23일 간의 단식을 단행하여 흩어진 민주화 세력들을 결집시키면서, 전두환 정권과의 격돌을 더욱 부채질 했다. 선거 결과는 참으로 놀랍게 나타났다.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을 현저한 차이로 따돌리며 전국구 17석을 합쳐 67석으로 제1야당으로 도약했던 것이다. 이는 신한민주당이 창당한 지 불과 25일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결과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정치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으며, 제도권 안에서 안주해 온 기존 정당에 대한 불만어린 반발이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 김영삼의 권유에 따라 민한당의 인사들이 대거 신한민주당에 입당함에 따라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하며 거대 야당으로 자리매김했다. 거대 야당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와 함께 민주세력들의 독재정권 타도와 직선제 개헌 주장은 여러 민주화운동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전두환 정권은 이를 국정을 혼란시키는 행위로 매도하면서 더욱 탄압의 강도를 더해 나갔다.

끝없는 민주화운동의 탄압과 4.13 호헌 조치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열망과 민주화 세력들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대학출신으로 노동운동 현장에 뛰어들어 활약해 오던 권인숙을 부천 경찰서에서 성고문한 사건은 온 나라 국민들을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을 뒤로하고 당시 정권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만인에게 폭로한 권인숙의 용기있는 법정 진술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가열시켰다. 그러던 와중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에 의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 ‘박종철 사건’이 불거지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특히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검찰의 발표는 국민들의 억눌렸던 분노를 한꺼번에 터져 나오게 했다. 이로 인해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명확한 정황을 밝히라는 요구와 함께 대통령 직선제 선출에 대한 개헌요구 시위가 급격히 늘어나갔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과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의 처사는 스스로 위기를 자처한 것이었다.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명분을 앞세워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4.13호헌(護憲)조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철저하게 국민들을 도외시한 것이었으며, 당시 정부가 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적인 부분이었다. 각계각층에서는 ‘4.13호헌조치 철폐’를 주장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으며, 지역과 계층을 아우른 인사 2,2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창단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하여 규탄집회를 대규모로 열기로 하고 아울러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6월 10일 집회를 계획했다. 이 날은 집권 정당인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로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규탄집회 5일 전에 국민운동본부는 국민들에게 애국가 제창, 자동차 경적 동시에 울리기, 전국 사찰, 교회, 성당 타종, 만세삼창, 묵념 등의 행동강령을 발표하여 전 국민들의 민주주의 쟁취 결의를 도모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국민운동본부의 이러한 계획을 파악한 전두환 정권은 10일 집회 며칠 전부터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인력을 총동원하여 원천봉쇄할 방침을 세웠다. 7일부터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는 검문과 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유인물과 관련하여 각 인쇄소 등에서 경찰의 단속과 경계가 삼엄해 졌다. 6시면 시행하던 애국가도 옥외 방송을 금지했으며, 버스와 택시에서 경음기를 떼어내고 교대시간을 바꾸는 등 봉쇄를 위한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9일부터는 민주인사들을 가택 연금시키고, 전국 110개 대학을 수색하여 시위와 관련된 각종 물품들을 사전에 압수했다.
규탄집회의 당일인 10일에는 민정당의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송파구 잠실체육관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이날 투표 결과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출마 후보로 선출되면서 신군부 정권의 승계를 확인하는 자리기도 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12시가 됨과 동시에 국민운동본부 의 행동강령대로 거대한 함성이 울리고, 시민들이 하나둘 씩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를 대표하여 성공회 대성당 종탑 꼭대기에서 지선스님과 소설과 유시춘이 ‘민정당이 선출한 대통령 후보는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성명서를 낭독하면서 시위의 강도는 거세졌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학생들이 외치고 뒤이어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와 경찰의 생존을 건 사투가 이어졌다. 이러한 시위 가운데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날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숨졌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마치 기름에 불을 부은 것처럼 시위는 확산되어 갔다. 6.10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대구, 공주, 인천,대전 등의 대도시와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로 발전했으며, 이를 저지하는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하여 더욱 험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6월 10일을 기점으로 15일가지 명동성당에서 진행된 농성투쟁은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한 것에 이어 정부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이라는 시위를 조직적으로 주도하여 1백 만 명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좀처럼 잦아들 줄 모르는 국민들의 시위와 분노는 마침내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직선제 개헌 및 광범위한 민주화 조치’ 등을 보장하는 일명 ‘6.29선언(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을 내 놓게 함으로써 승리를 이뤘다.


민주화운동, 6월의 그 함성 속으로
국민들의 뜨거운 항쟁 속에서 민정당 대표로 선출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에 동의하면서 김대중의 사면복권, 언론자유, 대학자율권 지지 등 파격적인 8개 조항을 내 놓았다. 이러한 조항들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노태우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을 국민 앞에 각오했고, 뒤이어 전두환 대통령 또한 노태우의 행동에 동의를 표했다. 국민들은 노태우의 이러한 용단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전두환 작품, 노태우 연출이었다’는 어이없는 후일담은 ‘6.29선언’을 ‘만우절’로 비유하는 허무한 사례가 됐다.
하지만 시민들이 주도하여 권위적인 군부독재세력을 물리치고 민주적인 규칙을 수립하는데 성공했으며, 노동운동의 질적인 향상과 영역의 확대는 시민세력으로부터의 분화과정을 거쳐 다양한 운동을 하는데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1만여 개의 시민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부분의 이해는 좀 더 쉬워진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의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세력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90년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냉전논리에서 지역주의라는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형되어 고착화된 부분들에 대한 학계의 지적들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들이자, 아쉬움이 남는 부분들이다.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한 절차적 수준이 확장되고 선거, 의회, 정당 등의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고 군부독재가 퇴장했다는 전반적인 부분에 이견은 없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각종의 노동, 경제적 배분, 지역대결 구도, 남북관계의 진전 부진 등은 6.10민주항쟁의 한계와 함께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국민들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많은 민주화운동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들은 아직 산재해 있다. 6월의 그 뜨거운 함성 속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생사를 같이 했던 시민정신을 되살려 더욱 진보되고 만인에게 합리적인 민주주의 이념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