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매거진252호=유광남 작가) 이제 이순신이란 이름만 대어도 선조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기쁨의 눈물이 콧잔등을 적셨다. 서애 유성룡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상감마마의 하해 같은 성은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쁨이 있나이다. 이제 머지않아 육지에서도 큰 전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야지요. 우리 조선의 수군이 맹활약을 하고 있으니 당연 육지의 장수들도 분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 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도 의병과 승병들이 궐기하고 있사옵니다.”
선조는 크게 고무되어 반겼다.
“조선을 구하고자 백성들이 저마다 앞장서니 실로 나라의 복이로다.”
신하들이 합창하듯 목청을 드높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왜적의 정예 병력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숫자가 아니요. 더구나 그들은 하나같이 신병기로 무장 하고 있으니 이 싸움은 실로 어렵지 않소. 명나라의 원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신하들이 아뢰었다.
“명나라 요동부총병 조승훈 장군이 명군 삼천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진군중인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선조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졌다.
“오오! 드디어 명나라가! 그래야지. 암...참으로 반갑구나.”
그러나 신하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고작 3천의 군사로 어찌 왜적들을 물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명나라는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 아닙니까.”
“어림도 없는 병력입니다.”
유성룡이 왕 선조의 기색을 살피며 고개를 조아렸다.
“명나라가 일단 참전 하였으니 이후 추가 병력이 파견될 것이옵니다. 심려 마옵소서. 신이 다만 우려 하는 것은 원군에 대한 우리의 준비가 마땅치 않음이오이다.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식량과 군비가 만만치 않사옵니다. 더욱이 명나라 군사들은 천병(天兵)을 자처하며 조선을 얕잡아 보고 있기에 더욱 근심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명나라는 일찍이 조선과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일삼아 왔습니다. 사실 이번 전란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일본이 조선에 요구한 것이옵니다. 물론 왜적들의 술수이기는 했으나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관백 히데요시의 도발 목적이 명나라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옵니다. 따라서 명나라는 조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성 이항복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더구나 서애와 더불어 이들이 명나라에 대한 반감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이들의 불만은 조선의 원군 요청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에 있었다. 일본은 조선 침략에 약 16만 여 명의 병력을 동원 했으나 명나라의 원군은 고작 3천 여 명에 불과 했다. 게다가 시일 또한 적지 않게 지체되어 조선 조정을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이것이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고초를 감내했던 충성스런 두 대신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돕기 위해 참전하는 군대이니 만큼 우리도 만반의 채비를 해야 하오. 경들은 명심해 주시오!”
조선의 국왕 선조는 명나라의 파병에 대하여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또 신뢰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곧바로 대규모 천병을 파견하리라 생각되니 실로 안심이오. 이제 수군에서는 이순신장군이 활동하고 육지에서는 천병의 승리 함성이 진동하게 되지 않겠소. 실로 오랜만에 마음이 안정되는구려.”
서애 유성룡은 가슴이 아팠다.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여 오늘과 같은 환란을 겪고 있는 것이 자신의 탓만 같았다. 본래 왕 선조는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자심감이 충만하지 못했다. 어딘가 부족하고 늘 주변에 의존하여 국정을 수행했다. 어쩌면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활발하게 충돌한 연유도 거기에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왕은 학식과 덕망을 고루 겸비한 유성룡을 총애했다.
“상감마마, 조선의 반격이 수군으로부터 시작 되었으니 부디 옥체 보존하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소서. 반드시 왜적들을 물리치고 태평성대를 누리시게 될 것이옵니다.”
오성 이항복도 고하였다.
“수군에 이어 의병들의 승전보가 보고되고 있사옵니다. 이제 육군의 지상 병력이 왕성한 활동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야지. 혹여...한산대첩의 승전보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는 자가 있는가? 대충만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군.”
임시로 마련된 어전에서 대신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서애 유성룡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순신과 가장 막역한 처지이니 의당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을까 여겨졌다. 이순신의 장계를 기다리지 못하는 왕의 조급함을 이해하며 유성룡이 말문을 열었다.
“포구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형과 중, 소형의 전선 60 여 척을 침몰 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약 9천 여 명의 일본군을 몰살 시킨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린 것입니다.”
“구...구 천 명이라면...?”
오성 이항복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명나라 장수 조승훈의 군대 3천 명의 꼭 세 배입니다. 놀랍습니다.”
조선의 왕 선조의 용안에 어린아이 같은 환한 웃음이 솟아올랐다.
“과연 이순신이로다!”
제 10장 오랑캐 공주
담판을 지어야 한다.
장군의 국문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두 번 다시 정의로운 영웅(英雄)들을 잃고 싶지 않다.
이제 조일인(朝日人)이 되어 버린 나는 두려움이 없다.
전쟁(戰爭)은 조선과 일본만 벌리는 것이 아니다.
장군의 심사(心思)에 분노(憤怒)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오랑캐 여진(女眞)의 출현도 변수(變數)이다.
나의 전쟁도 점차 속도를 내고 있다.
밤은 은밀한 자들의 고뇌(苦惱)로 깊어간다.
(사야가 김충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1597년 3월 6일 병신 )
유성룡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의연하였고, 명나라의 굴욕적인 태도에도 절대 기죽지 않았으며 당쟁의 와중에서도 오늘과 같은 고뇌는 없었다.
“조선의 운명이로세!”
자신도 모르게 또 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야가 김충선과의 밀담에 이어서 조선의 왕 선조와의 독대는 극단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왕은 신하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꾀하고, 그 신하를 받드는 사내는 새로운 신하의 나라를 꿈꾸고자 한다.
“이순신은 기로에 놓여 있다.”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갈 수 밖에 없는 길이 기다리고 있다. 비정한 왕의 올가미냐, 아니면 사야가 김충선이 주장하는 새로운 조선이냐.
“어쩌면 그 이순신은 죽음을 선택 할 지도 모르겠군.”
유성룡은 자리를 박차고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살랑대는 봄바람에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뜰에는 봄꽃의 향기가 만발 했으나 그의 소박한 꿈은 두 명의 방문객에 의해서 깨어졌다.
“서애대감을 뵈옵니다.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 종사관으로 활동하던 정경달 이옵니다.”
예를 취하는 자세로 미루어 빈틈없는 성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아담한 체구에 한 일자로 자리 잡은 입모양이 굳은 의지를 엿보이게 했다. 나이는 쉰 중반 정도.
“강녕하시었습니까!”
젊은이는 이미 안면이 있는 통제사 이순신의 둘째 아들 울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으나 불청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평소 유성룡은 울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고생 많다.”
유성룡이 위로의 말을 던지자 정경달이 고개를 조아렸다.
“통제사를 구해 주십시오. 오로지 대감만이 살리실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방문 목적을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막상 대면하여 이순신의 구명 요청을 받으니 말문이 가로 막혔다. 지금으로서는 손을 쓸 방도가 전혀 없지 않은가. 왕은 이미 유성룡에게 경고 했었다. 이건 함정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통제사는 어떠신가?”
울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절도 있는 몸짓 이었으나 목소리는 가늘게 울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