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쟁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시대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등을 통하여 철저히 민중항쟁을 억압해 왔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위한 국민들의 열망은 끝없이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운명을 마감하며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 세력을 규합해 왔던 전두환 일당은 민주화운동의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새로운 군부독재 정권의 창출을 꾀하고 있었다. 12.12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에게 민주인사들과 야당인사들은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 본보기적인 희생양이 바로 빛고을 ‘광주’였다.
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역사
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역사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을 곤고히 하고 반대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일환으로 계엄령을 선포?확대하기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광주소요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구속하였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군부 집권 만행에 시민들은 분노하였으며, 5월 18일 우리나라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피 토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계엄사의 진압부대 투입명령에 따라 7공수여단은 18일 새벽 1시 경 33대대를 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각 배치했다. 각 대학에 배치된 계엄군들은 학내에서 횃불시위를 한 후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잔류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18일 오전 10시 전남대와 조선대 정문 앞에는 휴교령을 예상했던 학생회의 결정에 응하여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김대중 씨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금남로와 도청 앞 분수대는 서울의 중앙청 앞과 같이 상징적인 장소였다. 지리적으로 광주의 중심지이며, 무엇보다 지방행정의 심장부인 은행, 관공서, 사무실, YWCA, YMCA, 카톨릭센터, 전일방송 등 주요 기관과 시설이 집약되어 있었고, 모든 시내버스와 차량이 이곳을 지나야 함으로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삽시간에 광주시에 파급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까지 행진한 시위대열에 대해 경찰은 16일까지의 시위진압 때와는 달리 흩어지는 학생들을 골목까지 쫓아가 곤봉으로 구타하는 등 극단의 폭력을 행사하며 분위기는 살벌한 분위기로 반전되어갔다. 대학생들은 충장로, 한일은행 앞, 광주공원 곳곳에서 계엄군의 만행과 폭력을 알리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학생시위 과잉진압이 도화선이 되어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함으로써 5.18광주민주항쟁은 피로 얼룩진 역사의 시작이었다.
살육과 폭력이 난무한 잔혹한 5월
계엄사령부는 광주 통행금지 시간이 9시로 당겨졌다고 발표하고 11여 단의 병력을 증파하였다. 시민들은 투입된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항의하여 임동, 누문동 경찰서에 방화를 하며 저항운동을 펼쳐 나갔다. 5월 19일 시위대가 5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시민?학생들의 시위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거세지자 그 진압형태가 더욱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변해갔다. 카톨릭센타 앞에서 30여 명의 남녀들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은 이어져 갔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 여 명이 사망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고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계엄군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시민들이 쓰러져갔고 시민군은 각 지에서 획득한 무기들로 시가전을 지속해 갔다. 5월 22일 도청과 금남로에 시민들은 집결하였고,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은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7개 항의 수습안을 전달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는 “광주지역은 치안 부재상태”라며 광주 시민들의 항거를 폭도들이 국가안전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매도 방송했다.
분노한 시민들과 광기어린 계엄군들의 총격전과 희생은 27일 마지막 항거가 있기까지 계속되었으며, 탱크까지 동원한 계엄군은 시민군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계엄군이 광주 전 지역을 폐쇄하고 총, 칼을 앞세워 도청과 시내전역을 장악한 후에야 마침내 피로 물든 역사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었다. 살육과 폭력이 난무했던 참으로 참혹한 5월이었다.
‘폭동’에서 ‘민주항쟁’으로
사망자 191(무연고자 12기 포함)명, 행불자 64명, 상이?연행, 구금자가 3,642명 등 총 4,362명(피해자별 총괄집계 기준)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통계일 뿐 수사기간 중의 불법연행자 및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까지 생각한다면 그 희생은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5.18은 민중항쟁으로 규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5.18민중항쟁은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었지만,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80년 5월’의 실체가 전 국민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1988년 6공화국 출범하면서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하였다. 그리고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치상황이 만들어 낸 광주청문회를 통해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가 TV로 전국에 방영됨으로서 광주시민들의 처절했던 10일 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담화에서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되살아오는 5월
광주민중항쟁은 당시엔 패배한 항쟁이었으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다.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 속에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민주주의 부활의 영웅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5.18민중항쟁은 조선말기의 갑오농민혁명, 일제 강점기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해방투쟁,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학생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항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5.18민중항쟁은 우리민족의 역사가 더 어긋나고 왜곡될 수 없다는 민족사 왜곡의 한계를 보여주는 자발적?개혁적 민중운동이었다. 아울러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 통일,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증거가 되었고, 나아가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정치 세력들을 심판하였으며 마침내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쟁이 국민저항의 적극적인 행사로 인정받았다. 5·18민중항쟁 시기의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많은 희생의 피를 흘려야 했던 80년 5월 광주.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앞당기고 민주화의 발전에 금자탑을 세운 많은 이들의 숭고한 죽음이 있었던 빛고을 광주의 그 날을 아로새겨 인류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시대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등을 통하여 철저히 민중항쟁을 억압해 왔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위한 국민들의 열망은 끝없이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운명을 마감하며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 세력을 규합해 왔던 전두환 일당은 민주화운동의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새로운 군부독재 정권의 창출을 꾀하고 있었다. 12.12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에게 민주인사들과 야당인사들은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 본보기적인 희생양이 바로 빛고을 ‘광주’였다.
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역사
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역사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을 곤고히 하고 반대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일환으로 계엄령을 선포?확대하기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광주소요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구속하였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군부 집권 만행에 시민들은 분노하였으며, 5월 18일 우리나라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피 토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계엄사의 진압부대 투입명령에 따라 7공수여단은 18일 새벽 1시 경 33대대를 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각 배치했다. 각 대학에 배치된 계엄군들은 학내에서 횃불시위를 한 후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잔류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18일 오전 10시 전남대와 조선대 정문 앞에는 휴교령을 예상했던 학생회의 결정에 응하여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김대중 씨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금남로와 도청 앞 분수대는 서울의 중앙청 앞과 같이 상징적인 장소였다. 지리적으로 광주의 중심지이며, 무엇보다 지방행정의 심장부인 은행, 관공서, 사무실, YWCA, YMCA, 카톨릭센터, 전일방송 등 주요 기관과 시설이 집약되어 있었고, 모든 시내버스와 차량이 이곳을 지나야 함으로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삽시간에 광주시에 파급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까지 행진한 시위대열에 대해 경찰은 16일까지의 시위진압 때와는 달리 흩어지는 학생들을 골목까지 쫓아가 곤봉으로 구타하는 등 극단의 폭력을 행사하며 분위기는 살벌한 분위기로 반전되어갔다. 대학생들은 충장로, 한일은행 앞, 광주공원 곳곳에서 계엄군의 만행과 폭력을 알리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학생시위 과잉진압이 도화선이 되어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함으로써 5.18광주민주항쟁은 피로 얼룩진 역사의 시작이었다.
살육과 폭력이 난무한 잔혹한 5월
계엄사령부는 광주 통행금지 시간이 9시로 당겨졌다고 발표하고 11여 단의 병력을 증파하였다. 시민들은 투입된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항의하여 임동, 누문동 경찰서에 방화를 하며 저항운동을 펼쳐 나갔다. 5월 19일 시위대가 5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시민?학생들의 시위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거세지자 그 진압형태가 더욱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변해갔다. 카톨릭센타 앞에서 30여 명의 남녀들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은 이어져 갔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 여 명이 사망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고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계엄군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시민들이 쓰러져갔고 시민군은 각 지에서 획득한 무기들로 시가전을 지속해 갔다. 5월 22일 도청과 금남로에 시민들은 집결하였고,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은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7개 항의 수습안을 전달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는 “광주지역은 치안 부재상태”라며 광주 시민들의 항거를 폭도들이 국가안전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매도 방송했다.
분노한 시민들과 광기어린 계엄군들의 총격전과 희생은 27일 마지막 항거가 있기까지 계속되었으며, 탱크까지 동원한 계엄군은 시민군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계엄군이 광주 전 지역을 폐쇄하고 총, 칼을 앞세워 도청과 시내전역을 장악한 후에야 마침내 피로 물든 역사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었다. 살육과 폭력이 난무했던 참으로 참혹한 5월이었다.
‘폭동’에서 ‘민주항쟁’으로
사망자 191(무연고자 12기 포함)명, 행불자 64명, 상이?연행, 구금자가 3,642명 등 총 4,362명(피해자별 총괄집계 기준)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통계일 뿐 수사기간 중의 불법연행자 및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까지 생각한다면 그 희생은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5.18은 민중항쟁으로 규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5.18민중항쟁은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었지만,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80년 5월’의 실체가 전 국민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1988년 6공화국 출범하면서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하였다. 그리고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정치상황이 만들어 낸 광주청문회를 통해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가 TV로 전국에 방영됨으로서 광주시민들의 처절했던 10일 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담화에서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되살아오는 5월
광주민중항쟁은 당시엔 패배한 항쟁이었으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다.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 속에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민주주의 부활의 영웅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5.18민중항쟁은 조선말기의 갑오농민혁명, 일제 강점기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해방투쟁,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학생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항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5.18민중항쟁은 우리민족의 역사가 더 어긋나고 왜곡될 수 없다는 민족사 왜곡의 한계를 보여주는 자발적?개혁적 민중운동이었다. 아울러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 통일,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증거가 되었고, 나아가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정치 세력들을 심판하였으며 마침내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쟁이 국민저항의 적극적인 행사로 인정받았다. 5·18민중항쟁 시기의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많은 희생의 피를 흘려야 했던 80년 5월 광주.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앞당기고 민주화의 발전에 금자탑을 세운 많은 이들의 숭고한 죽음이 있었던 빛고을 광주의 그 날을 아로새겨 인류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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