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게맹갱 외에밋들’에 위치한 백제시대 벽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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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게맹갱 외에밋들’에 위치한 백제시대 벽골제
  • 취재_오경근 칼럼니스트 / 사진_이관우 기자
  • 승인 2019.03.0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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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골 기질의 ‘김제 아리랑춤 & 원평장터 3·1운동’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원평장터가 위치한 원평 전경.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 원평은 백제시대 최대 최고 저수지인 ‘벽골제(碧骨堤)’가 남아 있어 삼한사회의 농경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하며,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했던 원평독립만세비가 세워져 있어 역사적 의의를 더한다.(사진 송기수)

[시사매거진251호=오경근 기자, 이관우 기자]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김제교차로에서 714번 지방도로로 들어서면 옛 영화가 서려 있는 ‘김제역(金堤驛)’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과거 전라북도 전주와 익산, 부안 등지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기도 하고, 전국 여러 지역과 연결돼 있어 호남의 심장부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호남선의 모든 열차가 김제역을 거쳐 가기에 교통의 요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김제에는 ‘징게맹갱 외에밋들(김제만경 너른 들판)’이라 불리는 김만평야가 위치해 있다. 서해와 연결된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드넓게 발달한 평야로써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백제시대 최대 최고 저수지인 ‘벽골제(碧骨堤)’가 남아 있어 삼한사회의 농경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하며,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했던 원평독립만세비가 세워져 있어 역사적 의의를 더한다. 더욱 조정래의 장편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된 곳으로 내촌 외리마을에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사’와 ‘아리랑문학마을’이 조성돼 있다.

동항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설치한 원평집강소가 복원되어 탐방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김제 벽골제, 호남의 중심으로 최대의 곡창지대 형성

전라남·북도를 일컫는 ‘호남(湖南)’ 지역은 이곳 김제의 ‘벽골제(저수지, 호수)’를 중심으로 남쪽 땅임을 가리킨다. 벽골제 남쪽이 호남이란 뜻이다. 특히 김제의 김만평야는 ‘이랑이 만 개나 된다’는 뜻의 만경(萬頃)을 내포하고 있으며 삼한시대부터 쌀농사가 발달해 ‘볏비리국’이라 불렸고 백제시대에는 ‘볏골군’으로 편성됐다. 그런 김제는 농경사회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벼 고을’에서 ‘볏골’로 불리며, 우리나라 최고의 고대저수지 벽골제를 안고 있다. ‘푸르고 흰 뼈가 제방을 이루었다’는 뜻의 ‘벽골(碧骨)’이다.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까지 제방만 약 3.3㎞에 이르고, 전체 둘레는 44km를 넘는 곳으로 수문을 통해 정읍과 부안, 신태인까지 물길을 열어 농수를 공급했다. 과거에는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5개의 수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2개만 복원돼 1415년 건립된 벽골제중수비와 더불어 1963년 중요 국가사적지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비류왕 27년인 330년에 축조된 것으로, 당시에는 서해 바닷물이 이곳까지 밀려와 제방을 쌓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백제인은 말뼈와 같은 동물의 뼈를 갈아서 흙과 함께 섞어 제방을 완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래서 노력하는 사람의 ‘뼛골’로 쌓은 백제의 ‘물둑’이라고 지칭된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여러 번 개·보수가 이루어졌고, 조선 태종 때인 1415년에는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또한 금산면 일대에서는 남방식 고인돌과 더불어 청동기시대 긴 돌칼, 목재를 여러 가지 기구와 시설물로 가공하던 유구석부 등이 발견돼 오래 전부터 농경문화가 매우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금산면과 더불어 금구리, 금강리 등엔 ‘쇠금(金)’ 자가 붙어 신라 때부터 사금이 채취되었던 곳임을 시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노다지꾼, 술집, 밥집 등이 들어서 북적거렸고, 벼농사로 인해 일본인들의 쌀 수탈이 극심하기도 했다.

반골 기질의 김제, 아리랑문학마을 & 하얼빈역사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에 위치한 ‘아리랑문학마을’은 조정래 장편소설 <아리랑>의 주 무대를 재현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지평선 가득 하늘과 맞닿게 펼쳐진 ‘징게맹갱 외에밋들(김제만경 너른 들판)’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대량으로 수탈하려는 일본제국주의 만행을 기억하고 그 잔인성을 조망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우리의 민요가락 ‘아리랑’이 노동요에 망향가, 애정가, 만가(애도가), 투쟁가의 노래로 애창되던 것처럼, 소설 속 주 무대인 ‘징게맹갱(김제만경)’은 강탈당하는 조선의 얼과 몸의 또 다른 이름이자 끝까지 민족독립을 위해 싸워나갔던 무수한 백성들의 삶을 배태한 땅”이라고 벽골제아리랑사업소에서 설명한다.

또한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출생한 소설가 조정래는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 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 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 <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아리랑문학마을’에는 소설의 발원지로 내촌·외리마을 5가구 11동이 개설돼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감골댁, 송수익, 지삼출, 손판석, 차득보 가옥 등이 있으며, 억압받고 유린당하는 주인공의 생활터전을 재현해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시대의 비극을 느껴보도록 조성됐다. 그리고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 등 근대수탈기관 4동과 일제수탈관 1동은 조선총독부 권력의 말단으로 작동하며, 어떻게 우리 민족을 괴롭혔는지 중요기관별 활용자료와 당시 사진들을 전시하여 뼈아픈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아울러 조국애를 일깨우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 중이다. 그 외 이민자 가옥 2동은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하여 산지증식계획, 농촌진흥운동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수탈정책에 못 이겨 대대로 살아온 토지를 떠나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시베리아 등 이역 땅으로 쫓겨나야만 했던 사람들의 가옥인 너와집, 갈대집 등을 재현해 이산의 아픔과 고달픔을 보여준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서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대변한다.

또한 하얼빈역사는 1910년경 실존건물을 토대로 60% 축소 복원한 건축물이다. 과거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당시 조선통감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현장을 옮겨왔다. 하얼빈 역은 우리의 가슴 속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 교육장으로 기념될 만하다.

백제가 다스리던 시기에 만들어진 벽골제. 김제는 농경사회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벼 고을’에서 ‘볏골’로 불리며, 우리나라 최고의 고대저수지 벽골제를 안고 있다. 대부분의 자리는 논과 마을로 바뀌었고 제방과 수문을 비롯한 일부가 남아있다.

3·1운동 독립만세의 장이 된 ‘김제 원평장터’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위치한 원평장터는 국도 1호선이 관통하는 지역으로 정읍시와 경계해 있다. 1894년 당시에는 번화했던 물류의 중심지였으며 전라우도에서 전주성으로 가는 교통의 관문이기도 하다. 특히 원평장터는 전봉준의 주요 활동무대이며 1893년 3월3일 봉기한 동학교도의 집회 장소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을 도왔던 금구대접주 김덕명의 근거지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살펴보았듯 원평장터에서는 1만여 명의 동학농민들이 모여서 척양척왜·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1개월간 ‘금구원평취회’라는 집회를 연 곳이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앞서 고종의 특사를 처형시킨 상징적인 장소기도 하다. 그 후 1894년 전봉준장군부대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고 원평으로 내려와 구미란에 진을 쳤다. 음력 11월25일 구미란전투가 벌어졌고 곧이어 불길에 휩싸인다. 이후 농민 배세동이 1919년 2월13일 전주장에서 벌어진 3·1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참여했으며, 이웃마을 어유동에 사는 전도근, 고인옥, 전부명, 김성수, 전천년, 이완수, 이병섭 등과 규합하여 직접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적었다. 이어 2월19일 저녁 6시경 원평장날에 소전 자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9척의 장대에 태극기를 매달아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는 김제 지역 최초로 성공리에 벌어진 3·1만세운동이다. 당시 원평장터 3·1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농민은, 과거 동학농민혁명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문헌이 발굴되지 못해 구전으로만 전하고 있다. 이후 이종희 장군 등은 만주로 가서 광복군으로 활동을 한다.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최고원 상임이사는 “행사를 이어 온지 30년이 되는 해다. 3·1만세운동 기록도 발굴되지 않았다면 역사적 사실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9명의 독립투사도 국가보훈처에서 예우하지 못할 뻔 했다. 30년 전에 독립만세운동 참여자 재판기록을 찾아내어 진행된 것이다. 모악향토문화연구회 최순식 선생님이 자료를 발굴했고, 1989년에 주민들과 함께 음력 2월19일 원평장날에 벌어진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3·1절과 같이 음력 2월19일을 양력날짜로 환산하여 3월20일에 행사를 진행해왔다. 그리고 원평장날에 장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원평장날인 3월19일로 기념행사를 이어 온지는 10년이 됐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올 2019년 행사준비는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돼서 지역주민들과 원평장터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 광장에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농민이 외친 3·1만세운동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감동한 김제시에서는 농민으로 결성된 합창단 (사)지평선팜합창단(지휘자 심춘택)을 앞세워 기념무대를 준비한다. 또한 1919년 김제 만경에서도 학생들이 4월4일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경여중고 학생들이 조은성 안무가(예술총감독)의 지도로 멋진 춤을 시연하기로 했다.

특히 그날의 사건과 함성을 기념하고자 재현극을 해마다 무대에 올리고 있다. 김제 지역 주민들이 직접 기획, 연출하고 무대에 올라 연기도 펼친다. 또한 모든 참가자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원평장터를 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예정이다. 대형 태극기의 뒤를 따르는 원평장터 3·19만세운동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그리고 학생들과 가족 단위 참가자를 위한 페이스페인팅, 손태극기 만들기, 탁본 등 무료체험도 기획하고 있다. 행사장 곁에 지역민이 함께하는 작은 원평장터(프리마켓)와 독립운동 자료 야외전시도 펼칠 예정이다.

최고원 상임이사는 “현재 100주년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더 중요하다.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원평장터 3·1만세운동과 얼마 전 민중의 촛불집회로 이어지기까지 계속해서 숭고하게 전달되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참여했던 이들의 기록은 물론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어 역사의 한 장으로 기록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독립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의 업적 또한 되살리는 일이 남아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지금은 원평장터 3·1만세운동을 재현하는 단막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지만, 종교의 성지인 금산면 원평장터를 중심으로 정여립의 대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에서 3·1만세운동까지 총괄적 역사를 아우르는 총체극을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서 지역축제 무대와 원평집강소 무대에 원평장터의 살아있는 애국정신을 아름다운 음악과 이야기로 올리고 싶다”고 덧붙인다.

2016년 아리랑 문학마을 제18회지평선축제 기념공연

Interview| ‘김제아리랑춤연구회’ 안하영 회장 & 조은성 예술총감독 인터뷰

김제아리랑춤연구회 안하영(安夏瑩) 회장은 지난 2016년 9월 조은성(趙誾城) 예술총감독과 함께 김제시 예술인들이 참여하는 ‘김제아리랑춤연구회’를 결성했다. 아울러 지난 2016년 10월, 제18회 지평선 축제동안 죽산면 홍산리 소재의 ‘아리랑문학마을’에서 지역민과 함께하는 공연을 진행하고, 내촌·외리 주민과 나눈 협약식을 통해 아리랑문학마을을 알리는 역할도 담당했다. 또한 소설 <아리랑>을 소재로 ‘김제 아리랑춤’을 창작하여 김제생활문화센터에서 청소년들과 지역민에게 매주 토요일마다 보급하고 있다. 더불어 창작과 발굴, 보존, 육성을 위해 헌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안 회장과 조은성 예술총감독의 활동상황과 미래비전을 들어보았다.

2016년12월 김제아리랑춤 연구회 & 외리, 내촌 협약식 축하공연(김제 아리랑춤)

'김제아리랑춤연구회' 안하영 회장 Q&A

Q. 앞으로 무엇을 발굴할 계획인가 
A. 김제시의 문화를 전승하고 발굴·보존하며 이곳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김제시에 산재해 있는 소재를 통해 김제시만의 고유의 정서를 담아내고 싶다. 또한 그 맥을 계승·발전시키며 지역 문화의 맥을 잇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참여하는 문화 사업을 더욱 체계적으로 고안해낼 계획이다. 그럼으로 김제시를 더욱 가깝고 친밀하게 여길 수 있도록 아리랑춤과 함께 새로운 문화예술을 연구하고 교육하며 공연예술을 무대화하고 싶다.
 

Q.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A. 김제시를 사랑하는 어린이와 초·중·고학생, 청년, 성인 누구나 남·여 제한이 없으며, 다문화 가정도 우리의 아리랑춤을 배우는 데 참여가 가능하다.
 

Q.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A. 김제의 농경사회와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를 소제로 해 전통 고전무용으로 창작해 지도하고 있다. 그 첫 작품이 ‘김제 아리랑춤’이다. 모두 김제의 역사와 전통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김제 동원 중심 전통무용, 김제 지역 역사와 소설, 구전되는 동화를 춤으로 엮어 교육 한다.
 

Q.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A. 김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춤으로 개발하여 정기공연, 기획공연, 학술 발표, 강습회 등을 진행한다. 그러한 교육 육성사업을 통해 김제시의 고전·현대무용 춤문화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한다.
 

Q. 이곳 김제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면 
A. 옛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처럼, 김제는 전통 농경사회로 인해 예부터 인심 또한 풍요롭다. 무엇보다 쌀이 많이 생산되고 삶이 풍요롭기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인심이 좋고, 선하며, 남을 먼저 배려하고, 문화예술도 매우 사랑한다. 특히 김제아리랑, 동원문화, 향교문화, 벽골제문화, 전래동화 등 지역문화유산이 매우 풍부한 곳이다.

2018년 조은성 차오름 무용단 야외 정기공연

 ‘김제아리랑춤 창작인‘ 조은성 예술총감독 Q&A

Q. 어떤 계기를 통해 '김제 아리랑춤연구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는가 
A. 1997년 12월, 벽골제의 '단야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큰 어미 단야>라는 제목으로 벼 고을의 얼과 숨결을 몸짓을 통해 창작되어지는 작업을 했다. 특히 김제에서 처음으로 개인공연을 마련하면서 이곳만의 춤을 구상하던 중 무용수 부족과 연습실, 등의 난관들이 과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교직에 몸담고 있던 장점을 발휘하여 청소년들의 방과후수업, 동아리수업 등을 통해 전통무용(춤)을 보급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 김제지역 문화증진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2016년 연구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Q. 김제 아리랑춤은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 
A. 김제평야의 지평선을 생각하며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은 들녘에서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곡식과 풍요로운 김제 사람들의 여유로운 마음속에서 걸어가는 가을과 벽골제를 만들기 위해 '단야 아가씨'의 희생정신과 우리 삶을 반영하는 몸짓을 담았다. 또한 그 지역 사람의 보편성이 담겨있는 아리랑이 하나가 되어 만경들놀이 춤을 접목시킴으로 이곳 김제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동작을 아리랑 박자에 가미했다. 온몸으로 퍼지는 춤사위를 한국적인 멋으로 우아하면서 선이 고운 춤을 선보이고 있다.
 

Q. 처음 이곳 김제에서 아리랑춤아카데미를 개설한 배경은 무엇인가
A. 2016년 10월1~2일 조은성의 ‘아리 아리 아라리오’ 개인발표회를 김제 아리랑문학마을 야외무대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이후 내촌마을, 외리마을 주민들과의 화합의 장이 마련되어지면서 소설 아리랑 속의 김제 들녘의 농경문화와 일제강점기의 서글픈 현실이 한국 전통무용으로 창작되면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하는 화합의 장이 되었다.
 

Q. 김제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 재능기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취지와 의미에 대해 들려 달라 
A.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7호 한량무 보유자 금파 김조균 선생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동초수건춤) 보유자 최선 선생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7호 호남산조춤 보유자 이길주 선생님의 맥을 이은 제자 조은성의 춤을 김제지역에 청소년,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용발표회, 강습회, 특강 수업 등으로 진행하고 있다. 더욱 아리랑춤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지속적인 창작으로 청소년 정서 함양과 자신감 고취를 위해 힘쓰고자 한다. 무엇보다 무형문화제 스승의 춤은 이어감은 물론 더욱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Q. 현재 가장 중점을 두고 계시는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A. 첫째, 김제지역 공연문화에 동참하고자 김제아리랑춤연구회에서 교육을 하면서 한국 전통무용(춤)이 보다 전문적인 무대 공연에 필요성을 느껴 <차오름> 무용단 활동을 만들어 시민대상으로 무료공연 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 배우고 익힌 것들을 무대에서 보여주면서 무용단과 더불어 시민과 함께하는 단체로 왕성하게 활동하여 순수예술단체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자 한다. 둘째, 호남평야의 풍요로움과 인정이 많은 고장의 김제아리랑과 농경문화를 춤으로 승화·발전·계승시키고자 한다.
 

Q. 김제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어떠한 공연·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인가 
A. 2018년 김제풍류Ⅰ(향기롭게), 김제풍류Ⅱ(맥을 잇다)를 통해 한국 전통춤의 맥을 김제 지역에 알리고, 이곳에 무용 인구 저변활동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2019년 김제풍류Ⅲ, Ⅳ를 야외무대와 예술회관 무대에서 한국의 전통무용과 아리랑춤을 실연하려 계획 중이다.
 

Q. 현재 조금 더 개선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 언제든 참여 가능한 우리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향후 계획이 첫째 김제아리랑춤연구회를 통해 청소년 교육에 중점을 두며, 특강 2회(학기별) 실시하고, 개인 봉사활동 공연도 실시할 생각이다. 둘째, 조은성 차오름무용단을 통해 김제풍류Ⅲ, Ⅳ를 공연에 올릴 것이고, 동계·하계 강습회를 실시함과 더불어 지역 예술제, 축제 참가와 출연을 지속할 예정이다. 또한 3·1절 100주년 기념 원평장터 행사에 참여해 김제문화 홍보와 자부심을 일깨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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