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명물 ‘초당두부’ & 여류시인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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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명물 ‘초당두부’ & 여류시인 ‘허난설헌’
  • 취재_오경근 칼럼니스트 / 사진_양현철, 이관우 기자
  • 승인 2019.01.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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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3대도시, 강릉 천재 여류시인의 고장

(시사매거진249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조선시대 대표 여류시인의 한 사람인 ‘난설헌(蘭雪軒) 허초희’는 초당두부가 유명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출중하였으며 남성 중심사회인 조선에서 매우 독창적인 시를 창작해 중국과 일본 근동에 이름을 떨친 여성이다. 화담 서경덕과 동문이며 동인의 영수인 허엽의 딸이자, 미암 유희춘의 문인이며 절대시재라 불린 허성과 허봉의 동생이다. 뿐만 아니라 유성룡과 이달에게 문장과 시를 배운 교산 허균의 누나기도 하다. 이러한 가정환경과 문학교육이 허난설헌 시문학의 뿌리가 되어 어린 나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중국 <양조평양록>과 김만중의 <서포만필>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하곡 허봉 역시 “난설헌의 시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할 만큼 뛰어나다. 그러한 사대부 명문가 출신인 허난설헌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겨울바다가 넘실대는 강릉을 찾아가보았다.

사진_양현철, 이관우 기자


강릉시 초당동, 부사 허엽의 호를 딴 ‘초당두부 만들기’

강원도 3대 도시 중 하나인 강릉시(江陵市)는 원주시·춘천시와 더불어 태백산맥을 경계로 구획된 영동지방의 주요 정치·경제·문화 도시의 으뜸으로 자리매김 된다. 특히 강릉시는 강문해변과 경포호수, 경포아쿠아리움, 허균·허난설헌기념관이 위치해 있어 영동문화권의 역사와 전통을 두루 아우르는 역사문화탐방의 명고장이기도 하다.

더욱 이곳은 겨울바다를 보기 위해 제일 먼저 발길을 옮기는 동해 제1의 도시로써 여러 명승고적과 명물을 만날 수 있어 전국 최고의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특히 강문교를 건너 죽도봉(31.1m)에 오르면 잔잔한 경포호수와 더불어 동해의 백사장과 죽도명월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송강 정철이 읊은 <관동별곡>에 묘사된 아름다움을 충분히 관망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강릉에서는 현재, 불린 콩을 곱게 갈아 면포에 내린 다음 팔팔 끓는 콩물에 바닷물을 부어 응고시킨 후 나무틀에 담아 두부를 만드는 초당두부가 유명하다. 강릉시 초당동에서 탄생한 이 고장만의 명물이다. 초당두부는 보통 콩을 불리는 작업에 가장 큰 공을 들이는데 겨울에는 12시간, 봄가을에는 8시간, 여름에는 6시간 불린 후 콩을 갈아 만든다. 그리고 콩물을 끓일 때 불의 세기 조절과 간수 맞추는 것을 특별한 비법으로 여긴다. 바닷물을 미리 떠다가 불순물을 가라앉힌 후 간수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만들던 초당두부가 현재까지 그 명맥을 잃지 않고 이어지는 데는 한국전쟁의 어려움이 큰 몫을 차지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정 경제를 이끌기 위해 동네 부녀자들이 밤새워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던 것이 차츰 그 고소한 맛과 영양가를 인정을 받으며 지금의 인지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현재 초당동에는 20여 곳에 이르는 두부집이 있다.

이러한 초당동의 내력에는 조선시대 동인의 영수이며 강릉부사 ‘초당 허엽(許曄)’의 일화가 전해져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 초당 허엽은 관청 앞마당에 있는 샘물로 두부를 만들도록 하고 강릉에서 천일염이 생산되지 않는 관계로 그곳 바닷물을 떠다가 간을 맞추도록 했다. 이것이 차츰 맛 좋기로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초당 허엽’의 호를 붙여 ‘초당두부’라 부르게 된다. 현재 이곳 샘물 자리에 허엽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허난설헌의 생가 인근에는 허난설헌과 허균을 비롯하여 허씨 5문장가의 생애와 문장을 만날 수 있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 있다.(사진_양현철, 이관우 기자)


동인영수 ‘허엽의 가계도’, 조선 최고의 ‘5대문장가’

조선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하던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 된 후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동인’의 세력을 아우르는 최고 영수가 된 ‘초당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학자와 문장가로 이름이 높다. 부교리, 대사성, 삼척부사, 부제학, 경상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그는 강릉부사로 부임한 후 중소 지주 출신의 지식인들을 모아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보다는 지방 유향소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허엽의 슬하에는 당대 뛰어난 문장가로 주목을 받는 4남매 자녀가 있다. 큰아들 허성과 둘째 허봉, 셋째 고명딸 허초희와 넷째 허균이 바로 그들이다. 먼저 장남인 ‘악록 허성’은 이조참의,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전라도관찰사,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로 <악록집>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둘째 ‘하곡 허봉’은 사가독서, 성절사의 서장관, 이조좌랑, 교리를 거쳐 창원부사를 역임했다. 선조 임금의 스승인 ‘미암 유희춘’의 문인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기행문 <하곡조천기> 외에 <하곡집> <하곡수어> 등이 있다. 깨끗하고, 산뜻하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그의 특징이며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셋째 ‘난설헌 허초희’는 허엽의 고명딸로 어릴 적부터 허성과 허봉 두 오빠의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익히고 8세 무렵에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중국 고서에는 선계에 있는 가상의 집을 ‘광한전’이라 했는데 허초희는 “옛사람이 말하기를 보배 만든 차일은 창공에 매달려 있고, 구름 같은 휘장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뛰어넘었도다. 누각은 은빛으로 번쩍거리고 티끌 속에서 아득히 솟아나온 기둥은 하늘의 푸른 기와집이어라”고 읊어 지식의 깊이를 드러냈다. 사후에 정2품 정부인으로 봉해졌다.

넷째 ‘교산 허균’은 형조정랑,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삼척부사, 광주목사를 지낸 인물로 우의정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우고, 삼당파 시인 이달에게 시문을 배웠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 글재주와 학식을 인정받았다. 특히 현세에 전하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하며 <호민론>과 <한정록> <상서부부고> <학산초담> <성수시화> <국조시산>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 등지를 왕래한 이들 ‘허엽의 가문’은 동인 중에서도 북인 계열에 가깝고, 그 사상의 기저 역시 성리학 이념 하나에만 고착되지 않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세계관 역시 여러 분야에 걸쳐 비교적 열려 있는 편이었고, 양반과 서자는 물론 얼자에 대해서도 교류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러한 가풍으로 인해 허엽은 고명딸 허초희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주었으며, 아들들과 같은 자유로운 사상으로 문학을 창작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허난설헌의 생가 옆에는 허엽, 허성, 허봉, 허초희(허난설헌), 허균 등 허씨 5문장가의 시비가 있다.(사진_양현철, 이관우 기자)

난초같이 살다간 천재적 여류시인 ‘허난설헌’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 가을바람 잎새에 한 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허난설헌의 시 ‘감우(感遇 느낀 대로 노래한다)’ 전문-

‘난설헌(蘭雪軒) 허초희’는 강릉의 명문가 양천허씨 가문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오빠인 ‘악록 허성’과 ‘하곡 허봉’의 지도하에 자유로운 사상과 학문을 습득했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 속에 아버지는 물론 오빠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15세 무렵, 동인 계열에서 붕당 된 남인 계열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결혼했다. 한 살 연상의 김성립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 출신이다. 당시 남인은 북인보다 더욱 깊이 성리학 사상에 고착돼 있었기에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자유로운 가문에서 성장한 허난설헌은 가부장적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시집살이를 어렵게 했다.

양반가의 여성에게조차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 시를 쓰고 책을 읽는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시어머니는 허난설헌에게 매우 냉정했다. 심각한 고부갈등 속에 남편 김성립은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했다. 이후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낀 허난설헌은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그러는 사이, 친정아버지 ‘초당 허엽’과 둘째 오빠 ‘하곡 허봉’이 객사함으로 인해 집안은 갑작스런 몰락의 길로 치닫는다. 게다가 허난설헌의 두 아이 역시 돌림병으로 죽고 뱃속의 아이도 유산된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속이 좁은 남편 그리고 몰락한 친정에 대한 비애,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으로 점차 건강을 잃고 쇠약해가던 허난설헌은 2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무덤은 현재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김씨 가문의 묘역에 있다. 남편 김성립 역시 허난설헌 사후 남양 홍씨와 재혼했지만 곧이어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한다.

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29-5번지에 위치한 허난설헌의 묘. 바로 옆에는 돌림병으로 죽은 두 아이의 무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사진_양현철, 이관우 기자)

중국·일본까지 이름을 알린, 여류시인 허난설헌

‘난설헌 허초희’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유언한다. 그동안 창작한 시문만 해도 족히 방 한 칸 분량을 넘어서던 차에 여성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지 않던 안동김씨 가문에서는 과감히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러나 동생 허균만은 누나의 천재성을 안타깝게 여겨 강릉 본가에 남겨둔 허난설헌의 시와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시, 둘째 형 허봉의 처소에서 나온 시, 어머니 강릉 김씨가 간직하고 있던 시, 스승 이달이 소장하고 있던 시 200여 편을 모아 <난설헌집>을 엮는다. 그에게는 누나 허난설헌의 마지막 당부의 편지가 남아 있었다.

‘산해경에는 질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서는 길쌈하지 않아도 옷을 입고, 추수하지 않아도 밥을 먹고 살 수 있다. 질민국은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읊은 무릉도원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소망이고 꿈인 낙원이다. 균아, 세상을 바꿔라. 세상을 너의 것으로 해라. 세상을 억압받는 자의 것으로 해라. 내가 시에서 노래한 낙원을 이 땅 조선에 세우거라’ -만력 기축년(1589년) 삼월, 난설헌 쓰다-

이어 병오년(1606년)에 허균은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그녀의 시를 일람하게 한다.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매우 경탄한 주지번은 중국으로 돌아가 제일 먼저 <난설헌집>을 출간한다. 그녀의 사후 18년만의 일이다.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매우 큰 인기를 누리며 문인들이 앞 다투어 애송하는 명시가 되었고,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동래에 무역 나온 일본 무역상의 손에 들어가 일본에까지 전해진다. 1711년 일본 분다이야 기로에 의해 다시 일본판 <난설헌집>이 간행된다.

이렇게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선명히 남긴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 남매의 작품은, 현재 강릉시 초당동 477-8번지에 위치한 허균·허난설헌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조선시대 교산 허균에 의해 창작된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중국·일본에까지 널리 이름을 알린 난설헌 허초희의 <난설헌집>이 보관돼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허난설헌의 생가 터와 더불어 전통문화를 몸소 익힐 수 있는 전통차 체험관이 함께 개설돼 있다. 봄여름가을겨울 각각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강릉에서 허난설헌의 아름다운 시를 음미함과 더불어 바닷물로 간을 맞춘 초당두부를 맛있게 먹어볼 일이다.

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29-5번지에 위치한 허난설헌의 묘. 바로 옆에는 돌림병으로 죽은 두 아이의 무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사진_양현철, 이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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