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박근혜 정부는 ‘통일 대박’론을 제기했고 이어 7월에는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등에 대한 본격적 공론의 장을 만들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가동시켰다. 보다 본격화된 남북대화와 교류협력은 비단 이번 정권 임기 내에 마무리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 간에 합의사항이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행될 것이라는 확신이 상호 간 필요하다. 한국의 정치체제가 북한의 일당독재체제와 다르기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자세가 불안감을 완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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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주변의 국제환경 변화는 예측 불가능한 지뢰와 같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변수가 많은 민족적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외부적 돌출 변수에도 끄떡하지 않는 신뢰가 남북 간에 형성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북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과거 노태우 정부뿐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MB정부에 이르기까지 북한당국과 합의한 사항들이 존중될 것이며 이행될 것이라는 보증을 해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신뢰감을 확보해야 한다.
이후 박근혜 정부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지도자들한테 김일성 전 주석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그리고 김정은 최고지도자에 걸쳐 합의한 사항들을 충실하게 이행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더욱 김정은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와 합의한 사항들을 국내정치 그리고 국제정치적 상황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이행하리라는 확답을 확보해야 한다.
박두식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최근 들어 남북관계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남북관계는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이후 별 다른 대화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과 같은 해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등으로 남북관계는 대화보다는 갈등과 대립을 기본 축으로 전개돼 왔다. 그러나 최근 북한 권력 서열 2위로 평가되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일행의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방문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다시 재개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현재로선 이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번져갈지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고 논평한다.
이갑산 범시민사회단체연합 대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다양한 통일논의와 방안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권이 바뀌면서 통일정책 역시 수시로 바뀌었다. 정권차원의 이익과 이해타산이 맞물려 길게 내다보는 안정적 통일정책이 나오지 않고 정권 차원의 대북전략과 같은 정책만 추진되었다. 때로는 잠정적 평화 상태에 불과한 분단의 유지와 관리 정도에 머물거나 혹은 정당 차원의 선거 전략으로 오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집권 후반기에는 개인의 업적 쌓기를 위한 용도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정부에서 공론화 한 이상 입법 기관인 국회에서 통일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가 차원의 통일정책이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반도 통일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는 3가지로 축약된다. 그중 첫째는, 북한의 현 권력이나 혹은 향후 북한 권력을 대체하여 등장하는 새로운 권력이 비핵화를 결단하고 개혁과 개방을 추진한다는 가상이다. 이럴 경우 남한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해 모든 프로그램을 가동해 도움을 주도록 힘쓴다. 그리고 남북한은 과거 1991년 11월에 남과 북의 총리가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단계적인 ‘합의 통일’의 절차를 이행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이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거부하다가 결국 의도적이든, 사고(事故)에 의하여서든, 남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경우다. 이럴 때는 남한과 동맹한 국가의 군대가 연합해 대대적 반격을 하고, 북한 깊숙이 진입해 북한체제가 붕괴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의 도발로 인한 ‘군사적 흡수통일’이 된다는 가정이다. 하지만 한반도는 물론 모든 이웃나라에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다.
셋째는, 북한이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거부하다가 내부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하는 것이다. 체제 실패이다. 이럴 경우 남한은 신속하게 북한의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 안정에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체제 실패 이전에 가능하면, 북한 주민과 북한 군인들이 남한 주도의 통일을 묵시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을, 적어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상황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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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한반도 통일의 가상 시나리오 중 가장 우선은 평화적 ‘합의 통일’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온 국민이 통일의 가능성의 두고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평화적 수단이 아닌 시나리오가 가동될 경우 한반도 비극과 위험은 매우 크다. 범사련의 이갑산 대표는 “인류사회와 역사는 실험실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독일 통일의 경우에도 심각한 내외적 갈등을 완화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평화적 합의 통일을 달성했다. 대한민국 역시 한반도 통일과 인류 평화를 위해 가장 안정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남북한 신뢰프로세스 구축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한 통일 논의와 더불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은, 북한 당국의 무조건 배제를 통한 ‘흡수 통일론’이나 북측의 주장을 옹호하는 ‘종북적 행동’은 삼가야 한다. 그것은 뒤집어진 분단고착 정책일 수 있다. 또한 통일정책이나 통일운동은 ‘증오’나 ‘추종’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정현백 시민평화포럼 대표는 “MB정부 5년 동안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조금씩 축적된 남북 간의 신뢰 구축의 성과들이 무너져 내렸고, 경제적 상호의존을 지향하였던 경제협력은 중단되었다. 국제적으로도 MB정부 5년 동안 6자회담은 2008년의 수석대표 만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다. MB정부 이후 남북관계의 악화는 분단 비용의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특히 5.24조치의 후유증은 심각하다. 북한이 입은 피해를 8억 달러로 산정하고, 남측 기업의 직접 피해액은 45억 달러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 고용 유발효과나 원부자재와 관련된 산업연관 효과를 상정하면 남측 기업이 겪은 간접 피해액은 훨씬 더 크다. 또한 동해안이나 서해안 지역과 연계된 동북아 경제협력도 정체돼 있고, 한·러 양국의 가스관 연결사업 역시 불가능한 기획으로 남아 있다. 남북관계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전력이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대한 억지효과는 있을 수 있으나 중국이나 러시아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다. 이는 동북아에서 무기경쟁과 긴장도를 높이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가 제시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군사적 억지, 북방 경제론의 제기, 동북아 안보협력에서 긍정적이지만, 아직 뚜렷한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해 일관성 결여를 낳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전략적 방향들의 충돌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아직껏 정리되지 않은 각양각색의 발언과 정보들은 국민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정부차원에서 할 일과 민간차원에서 할 일이 다르고 각각 기준선을 마련하고 정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정부는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 행동하고, 민간은 경제적인 논리나 자연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정부가 민간보다 보수적이고 변화에 더디지만, 정부의 노력에 따라 민간의 역할과 내용이 규정된다. 민감한 남북교류에 있어서 남북 당국자 간의 정치적 합의와 이해는 민간 교류의 폭과 한계를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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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산 범사련 대표는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신뢰’라는 것은 ‘상호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정부나 민간이나 차이가 없다. 원칙 없는 대북정책의 변화나 무책임한 행보는 신뢰를 깨고 통일을 방해할 뿐이다. 과거 5.24조치와 관련한 문제도 신뢰의 문제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북측의 폭격과 조준사격으로 남측의 인명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일말의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방적인 남측의 유화정책과 관계 회복 제안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신뢰를 쌓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신뢰는 일차적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있다. 다만 민간차원의 지원이나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교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지고 자율에 맡길 수 있다.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민간의 자율과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장애물인 ‘북핵’이 남북관계와 동북아 정세를 급속히 냉각시키고 악화시킨다. 따라서 북핵의 근본적인 해결 과정 없이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변화는 요원하다. 냉각기를 폭파 해체하고 전투적인 상황을 연출한 북한은 뒤로 대량 살상무기인 핵무기를 보다 안정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꼼수를 썼다. 그로 인해 신뢰가 무너졌다.
북한은 남북한 간 쌓아온 신뢰를 깨며 ‘핵무기 보유국’을 선언했지만 그 효과는 냉담한 국제적 반응이었다. 그리고 심화되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다. 북핵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주변국들의 핵무장과 긴장의 고조를 겪으면서도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이라는 판단을 쇄신돼야 한다. 더 이상 ‘핵’은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지 못한다.
따라서 남한은 이러한 ‘안보 딜레마’를 극복해야 한다. 첫째, 고위급 회담의 정례화 등을 포함한 남북관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여당과 야당이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한다는 의구심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극도의 정치화된 언사와 감정적 격앙을 충동하는 대북정치는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나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는 항시 왜곡된 정보가 범람하고, 이는 국민을 극심한 진영논리에 빠지게 한다. 상호 토론과 공감의 확산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정부 내 신뢰 문제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 효율적인 대북정책과 상충되는 정책들의 조정이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특히 전체적인 대북정책의 가이드라인이나 원칙에도 불구하고, 맥락이 맞지 않는 정부 책임자들의 발언이 돌출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민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혼란한 정책과 언술을 극복하고 정부 내 여러 부처들이 일관되고 통합적인 정책을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회에 의한 비판이나 감시 나아가 정책제안을 통해 남북관계에 대한 정책조정이나 효율적인 운영의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셋째,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남북문제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고, 중장기적 정책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때그때 돌출한 여론에 끌려 다니는 형세로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 보다 중장기적인 시야에서 남북관계의 발전을 고민해야 한다. 정부의 안보정책이나 북에 대한 대응이 중장기적으로 금융시장이나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고, 이런 토대위에서 정책을 국민에게 제시하면서 신뢰를 얻도록 해야 한다.
넷째, 북한과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남북 간 교류를 비중 있게 다뤄야 한다. 정부 차원의 고위급 회담 외에도 국회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북측과 의 교류를 제안하거나 시도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에서 소통의 부재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오랜 남북 교류의 경험을 통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갔던 성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국제사회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갈등은 항상 극단화된 사건을 통해서 알려진다. 주로 서방국가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북한의 악마화’는 남북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다. 워싱턴D.C의 정가나 씽크탱크 사이에서 만연한 ‘북한의 악마화’는 결국 북한 붕괴나 흡수 통일론으로 이어진다. 이런 해결 방안은 현실성이 매우 약하다.
오히려 분단의 현실을 통해 북한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정치문화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북한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국제사회의 다자적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자적 접근을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실현은 현재 남측의 한국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최근 보수진영에서도 북한의 핵개발 진전과 미국의 군사적 압박 강화가 반복되는 ‘안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대북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는 핵문제의 해결을 장기적인 과제로 접근하면서 우선적으로 북한이 핵개발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은 채 핵 보유 상황을 투명하게 밝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목소리다. 이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을 동시에 이루자는 의지가 한 데로 모아지고 있다.
[자료 : 국회예산정책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