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류세 인하 없이, 기름 값 ‘1,300원’ 어려워

계속 떨어지는 휘발유 값에 디젤 자동차의 인기까지 떨어질 정도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1월13일 현재 국내 휘발유 평균가는 리터당 1,537원이다. 서울지역은 1,613원으로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주유소의 판매가는 리터당 1,398원이었다.
이 같은 저유가는 국제 유가가 국제 유가가 50달러 이하로 폭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이 주로 도입하는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석유수출기구(OPEC)가 지난해 11월27에 석유 감산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75달러 선을 끝으로 내리막을 걸었다. 6일에는 48.08달러에 거래되면서 50달러 지지선 마저 무너졌고 12일에는 45달러 선까지 내려왔다. 최근 들어서는 올해 6월 원유 가격이 20달러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투자자들의 베팅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유가는 얼마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아직 리터당 1,500원대인 국내 휘발유 평균 판매가는 언제쯤 1,400~1,300원대 이하로 내려갈 수 있을까.
지난 7일 국제 유가는 배럴당 46달러로 떨어졌다. 1년 전 104달러의 절반 이하다. 하지만 같은 날 국내 평균 휘발유 가격은 1,546원이었다. 1년 전 리터당 1,886원과 비교해 불과 322원 떨어지는 데 그친 것이다. 경유도 지난해 1월 1,705원에서 올해 1,380원으로 고작 325원 낮아졌을 뿐이다.
유가가 조금만 떨어져도 흐뭇해하던 국민들이 “오를 때는 시시각각 천정부지로 치솟던 국내 유가가 내려갈 땐 왜 찔끔찔끔 내려가느냐”며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론을 반영해 정부는 정유 업계에 유가 인하를 사실상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유 업계는 제품 가격 인하에 대해 부정적이다. 국내 정유 업계는 국제 유가 하락에 따른 제품 가격 인하 요인을 국내 공급가격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유가 하락에 따라 큰 폭의 재고 손실 등이 발생해 업계 사정이 어려운 만큼 고유가 시대에 만들어졌던 알뜰주유소와 전자상거래 등 유통 정책을 시장 친화적으로 전환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주유소에는 카드 수수료와 준조세 등 각종 비용이 있어 유통 이윤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정부가 유류세를 인하하지 않으면 휘발유 가격이 1,300원대 이하로 떨어지기는 힘들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 같은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알뜰주요소 확대, 전자상거래 활성화 등 기존 대책을 그대로 이어가는 한편, 오는 3월부터는 7대 광역시 내 구 단위별로 휘발유, 경유, 등유, LPG 가격이 비싼 주유소와 싼 주유소 5곳의 가격 동향을 발표, 업계의 가격 경쟁과 유가 하락을 유도할 방침이다.
이처럼 국제 유가가 1년 전보다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국내 유가 변동 폭이 적은 가장 큰 이유는 유류세가 정액제로 부가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 마지막 주 전국 리터당 평균 휘발유 가격 1,549.9원의 경우, 이 중 정유 공급가는 541.1원이며 그 기준이 된 국제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435.5원이다.
정유사가 붙인 부가가치는 105.9원이다. 물류비, 시설 운영비, 수입부과금 등 고정비와 10원 정도의 정유사 이윤이 포함된 액수다.
여기에 문제의 유류세가 붙는다. 교통에너지환경세(교통세)는 정액제로 529원, 교육세 79.35원, 주행세 137.54원이 더해진다. 이렇게 해서 나온 유류세 745.89원은 유가가 싸지든 비싸지든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기름 값에 더해진다.
여기에 판매부과금, 이윤 등 주유소 부가가치가 더해지고 끝으로 부가세 10%가 추가되면 1549.9원이 나온다. 소비자가 지불하는 기름 값의 절반가량을 유류세가 차지하는 셈이다.
유류세를 사실상 고정해 놓은 것은 국제 유가 변동과 없이 정부의 세수 확보를 위해서다. 한 해 2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류세는, 요즘처럼 복지 수요가 높아져 쓸 돈이 많아진 정부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세수다.
산업자원부는 “국제 유가가 떨어졌을 때 유류세를 인하한다면 올라갔을 때 인상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며 유류세를 낮출 뜻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부가 업계에 기름 값 인하를 압박하고 나섰지만 사실상 지난 1997년 가격 고시제가 폐지되면서 정부가 유가에 직접 개입할 길은 막혔다. 그러나 정부는 업계에 유가 인하를 압박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바 있다.
지난 2011년 1월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에서 120달러로 치솟고 휘발유 가격이 1,800원대에서 2,000원대로 올라가자 당시 이명박 정부는 전 방위적으로 업계 압박에 나섰다. 공정위는 주유소 원적지 관리 담합 조사에 착수했고 끊임없이 업계를 압박해 그해 4월부터 3개월 동안 휘발유와 경유 가격을 리터당 100원 내렸다.
현재 업계는 “정부가 업계의 어려운 사정을 뻔히 알면서 기름 값 추가 인하 여론을 의식해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반발하면서도 4년 전과 같은 ‘업계 때리기’가 본격화될까 좌불안석이다.
확실히 다른 것은 2011년 당시에는 고유가여서 업계도 인하 여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저유가라는 점이다. 업계가 요구를 감당하기에 힘에 부치는 것이 분명하다. 또 당시에는 기름 값에서 유류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현재는 유로세 비중이 상당하다. 이에 업계는 정부도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유로세 인하 시 떠안아야할 세수 감소 규모보다 국민 개개인이 취하는 이익이 현저히 낮다는 논리로 피해가고 있지만 궁색한 변명으로 보인다. 정부가 내 밥그릇은 꼭 움켜쥔 채 남의 밥그릇만 내놓으라고 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유가하락은 석유 시장에 초과공급이 심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통상적으로 상품시장에서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는 늘어나고 공급은 줄어든다. 그러나 현재 큰 폭의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석유 수요는 계속 둔화되고 원유 공급은 늘어나는 모습이다. 디플레이션과 산유국 위험 우려로 유가하락의 석유수요 증대 효과가 미진한 가운데 산유국 간 공급경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유가하락 압력은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양대 에너지 기관인 국제에너지기구(WEKA)와 미국에너지정보청(EIA)은 세계 원유 수요 전망치를 계속 하향 조정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유로존과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의 성장 부진을 근거로 지난 5개월 동안 세게 석유 수요 예상치를 4차례 하향 조정했다. 공급면에서는 급증하는 미국 타이트 오일을 견제하기 위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OPEC의 원유 공급 기조도 이어질 전망이다. 북미를 중심으로 비 OPEC의 공급이 계속 화대되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는 유가 20달러 상황에서도 감산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유가 하락은 석유를 전량 수입하는 우리 경제에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우리 경제는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석유 의존형 성장이 강화되는 모습이다. 경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석유 투입량이 1990년대 이후 2000년대 까지 낮아지다가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원유 순수입액은 GDP대비 5.9%로 중국(2.4%), 인도(4.4%), 일본(3.2%) 등 다른 원유 순수입국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유가 하락의 긍정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클 것으로 기대된다. 유가 하락은 석유 순수입 부담을 줄이면서 경상수지 개선에 기여한다.
또 석유제품과 유류비, 광열비 등에서 원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 물가 상승 압력을 완화시킬 것이다. 에너지 관련 지출 부담이 줄어들면서 가계의 소비 여력이 개선될 여지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제 유가 하락을 우리 경제의 호기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유가 하락을 우리 경제의 호기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제조업 등 수혜업종에서 제조업 혁신 3.0 등과 연계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계기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며 “국제 유가 하락이 국내 휘발유 값 등에 적시에 반영되고 잇는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전기, 가스 등 공공요금도 유가 절감분을 요금에 즉각 반영하도록 해, 서민 가계의 주름살이 펴지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유가 하락은 우리 경제에 호재다. 실질 소득을 늘리고 내수를 활성화해 경제 회복을 견인할 수 있는 계기로 유가하락을 적극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정부가 유가 하락에 목을 매는 것은 가계 지출의 숨통을 터 소비 증대를 이루기 위해서다. 또 상품 가격과 서비스 요금에서 유가가 차지하는 비중을 낮춰 물가를 인하하겠다는 전략이다.
한편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산업연구원, 금융연구원, 에너지경제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5개 국책연구기관도 유가 하락은 한국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해 올해 성장률을 0.1% 포인트 끌어 올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가 하락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분석’이라는 제목의 공동 보고서는 먼저 저렴하게 원유를 들여올 수 있게 돼 기업의 비용 절감 효과가 크다고 봤다. 유가가 공급 측 요인만으로 10% 하락하는 경우 우리 경제의 성장률과 소득은 각각 0.2%포인트, 0.3%포인트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유가 하락이 공급 측 요인뿐 아니라 세계 경제 성장 둔화 등의 수요 측 요인에도 영향을 받을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축소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보고서는 유가 하락에 따른 경제 전체의 구매력 증가분이 개별 경제주체에 배분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며, 산업별 대응 전략을 마련하고 선제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산유국과 신흥국의 경제, 금융 시장 불안이 국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워 자본 유출입이 확대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배럴당 평균 유가(두바이유 기준)를 지난해 평균(97달러)보다 35% 떨어진 63달러로 예상했다.
전문가는 계속되는 유가 하락의 원인으로 세계 경기 침체로 인해 수요가 위축됐지만 공급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을 꼽았다. 그렇다면 유가가 하락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과거 유가 하락 조짐이 나타나면, 세계 석유 생산량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12개 회원국은 물론 비 회원국들까지 앞 다퉈 생산량을 줄이는 방법으로 유가를 지탱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지난해 11월 열린 OPEC 반기 회의가 생산량 감축에 관해 뾰족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막을 내렸고, 현재는 아예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있는 모양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갖가지 음모론이 등장하고 있다.
가장 주목 받는 것은 ‘셰일오일 죽이기’다. 현재 미국에서 주로 생산되는 셰일오일은 전통적인 원유와 달리 넓게 퍼져 분포하기 때문에 수직, 수평 시추, 수압파쇄 등 고도의 기술력으로 추출해야 한다.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들어, 전통적인 원유는 배럴당 20~40달러지만 셰일오일은 50~70달러나 돼 채산성이 낮다.
그러나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 시대가 수년간 계속되면서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아지자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에서는 관련 업체들이 셰일오일을 생산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미국 정부도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셰일오일 생산에 힘입어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하루 900만 배럴을 돌파했고, 미국이 석유 수출을 재개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OPEC가 나섰다는 주장이다. OPEC의 셰일오일 죽이기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그간 초고유가에 힘입어 확보해 놓은 2,412억 달러가량에 이르는 막대한 외화 보유액을 무기 삼아 이처럼 공격적인 행보를 펼치고 있다. 사우디의 알리 빈 이브라힘 알나이미 석유부 장관은 지난 12월22일 “OPEC는 감산하지 않는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로 떨어져도 석유시장 점유율을 지킬 것이다”라고 공언한 바 있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반응이다. 셰일오일이 OPEC의 유가 하락 방치로 인해 위기에 내몰렸지만, 미국은 오히려 유가 하락을 즐기는 모양새다. 실제로 미국은 셰일오일 등 자국 내 원유 생산량을 줄이지 않고 유가 하락을 부채질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유가 하락이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 사우디가 ‘특정 목표를 위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두 나라의 교감 여부를 떠나 미국은 저유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유가 하락을 통해 하루 평균 4억 5,000만 달러(약 488억 원)의 가계 지출이 감소했고 이를 통해 늘어난 실질 소득은 여타 소비 증가로 이어져 기업 실적을 개선하고 있다.
이는 다시 고용 촉진을 유발해 이 같은 선순환이 미국 경제 회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저유가는 최근 오일 머니를 앞세워 세계 질서에 반기를 들고 있는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러시아는 원유와 석유 제품 수출이 전체 수출의 49%, 전체수입의 45%를 차지할 만큼 의존도가 높다. 국가 경제가 유가에 좌우될 정도인 러시아는 지난해부터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서방국들과 갈등을 빚어 왔다. 서방은 ‘신 냉전시대의 부활’을 막기 위해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저유가 시대가 되면서 제재효과가 점점 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라크 유전에서 캐낸 석유 밀매를 자금줄로 하고 있는 IS를 압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언제까지 저유가를 즐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예측이다. 유가 내림세가 더욱 빠르고 가팔라지면 미국 전통적인 석유 산업에도 악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셰일오일 산업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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