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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트디즈니는 20세기의 전설이자 대중의 영웅이었다. 전 세계에 걸친 그의 인기는 그의 이름이 대변하는 몇 가지 사고방식, 즉 미국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상상력, 낙관주의 그리고 자수성가라는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었다. |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리더십
“자신의 믿음대로 살아라’ 나는 우리 앞에 행운이 기다린다고 확신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이 기회를 잡아야 해” - 월트 디즈니(Walt Disney)
월트 디즈니는 비저너리(Visionary) 리더의 대표주자이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좇으며 마침내 그 꿈을 실현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또한, 스스로의 꿈만이 아니라 꿈을 전하며 꿈으로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여 모두가 함께 꿈을 향해 돌진케 하는 위대한 리더들도 많다. ‘꿈’으로 대표되는 리더, 바로 ‘비저너리 리더’(Visionary leader)들이다.
‘디즈니’가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만화 영화’ 또는 ‘디즈니랜드’로 대변되는 놀이동산을 떠올릴 것이다. 상상력이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인 ‘월트 디즈니(Walt Disney)사’. 이것은 창립자 월트 디즈니의 기업정신이기도 하다. 80년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를 무대로 영화와 애니메이션, 출판 등 미디어와 유통산업의 공룡기업으로 성장한 ‘월트 디즈니사’의 출발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한 젊은이의 작은 꿈에서 비롯되었다.
1901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월트는 가난한 집안환경으로 인해 농장의 머슴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져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이웃들에게 팔기도 하였으며, 헛간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고, 그 생활을 매우 행복해 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꽃을 그리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꽃송이 한 가운데 사람의 얼굴을 하나 그려 넣을 정도로 월트는 상상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처음엔 그의 상상력은 대접 받지 못했다. 캔자스 시에서 삽화나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로 활동했으나, “당신은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전혀 없으니 신문 편집자로나 일하시오”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고, 초기에 만들었던 단편 만화 영화도 대부분 실패했다. 때문에 그는 가족의 생활비를 거의 감당하지 못했다. 그가 작업실로 사용한 차고의 장비들은 그가 평생 동안 저축한 돈을 쏟아 부어서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확신에 찬 그의 꿈은 그의 상상력을 이끌어 냈고 임시 작업실의 어둠 속에 빛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그 시기에 차고에서 ‘미키 마우스’가 탄생했다.
“자신의 믿음대로 살아라’ 나는 우리 앞에 행운이 기다린다고 확신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이 기회를 잡아야 해” - 월트 디즈니(Walt Disney)월트 디즈니는 비저너리(Visionary) 리더의 대표주자이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좇으며 마침내 그 꿈을 실현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또한, 스스로의 꿈만이 아니라 꿈을 전하며 꿈으로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여 모두가 함께 꿈을 향해 돌진케 하는 위대한 리더들도 많다. ‘꿈’으로 대표되는 리더, 바로 ‘비저너리 리더’(Visionary leader)들이다.‘디즈니’가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만화 영화’ 또는 ‘디즈니랜드’로 대변되는 놀이동산을 떠올릴 것이다. 상상력이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인 ‘월트 디즈니(Walt Disney)사’. 이것은 창립자 월트 디즈니의 기업정신이기도 하다. 80년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를 무대로 영화와 애니메이션, 출판 등 미디어와 유통산업의 공룡기업으로 성장한 ‘월트 디즈니사’의 출발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한 젊은이의 작은 꿈에서 비롯되었다.1901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월트는 가난한 집안환경으로 인해 농장의 머슴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져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이웃들에게 팔기도 하였으며, 헛간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고, 그 생활을 매우 행복해 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꽃을 그리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꽃송이 한 가운데 사람의 얼굴을 하나 그려 넣을 정도로 월트는 상상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처음엔 그의 상상력은 대접 받지 못했다. 캔자스 시에서 삽화나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로 활동했으나, “당신은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전혀 없으니 신문 편집자로나 일하시오”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고, 초기에 만들었던 단편 만화 영화도 대부분 실패했다. 때문에 그는 가족의 생활비를 거의 감당하지 못했다. 그가 작업실로 사용한 차고의 장비들은 그가 평생 동안 저축한 돈을 쏟아 부어서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확신에 찬 그의 꿈은 그의 상상력을 이끌어 냈고 임시 작업실의 어둠 속에 빛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그 시기에 차고에서 ‘미키 마우스’가 탄생했다.애니메이션의 아버지
가장 많은 아카데미상 수상자로 선정된 월트 디즈니는 예술가적인 업적으로만 따져도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월트 디즈니는 광고회사에서의 일을 시작으로 만화로 된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만화는 광고에서 대성공을 이루게 되고 그는 자신의 애니메이션 회사를 직접 설립한다. 그가 회사에서 설립한 첫 번째 작품으로는 1922년도 작품인 ‘Puss in Boots’가 있다. 자신이 제작한 만화에 직접 목소리를 넣기도 한 그는 자신이 창조한 첫 번째 캐릭터로 오스왈드를 만들어 낸 이후 쥐를 보고 영감을 얻어 생애 최고의 캐릭터인 미키 마우스. 또한 도날드 덕, 구피, 플루토 등은 인기 캐릭터 상품으로도 제작되어 현재까지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후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아기돼지 삼형제’ 등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작한 그는 아이들에서부터 어른들까지 좋아할 수 있는 만화들을 만들어냈고, 아카데미를 비롯한 베니스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수많은 상을 받기에 이른다. 1940년 애니메이션 최초로 뮤지컬 형식의 만화인 ‘판타지아’를 제작해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기념비적인 작품이란 칭송을 받기도 했다. ‘판타지아’는 뉴욕 비평가 협회의 극찬과 미국 최고의 100대 영화에 선정되기도 했다. 아이들을 위한 꿈의 동산을 창조하기도 한 그는 최고의 테마 파크인 ‘디즈니 랜드’를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그가 창조했던 캐릭터들을 다시금 회고하면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미키 마우스’ 캐릭터는 1928년에 만들어져 ‘미치광이 행성’이라는 무성영화에 처음 선을 보였다. 하지만 이 만화가 발표되기 전 영상과 음성이 동시에 나오는 유성영화시대가 열리면서 미키 마우스는 세계최초의 완전동시 음성 만화영화인 ‘증기선 윌리’로 스크린에 데뷔하게 되었고 이 영화는 1928년 11월 뉴욕의 콜로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애니메이션 기술을 완벽하게 만들고자 하는 월트의 열망을 끝이 없었다. ‘바보 교향곡’을 제작하는 동안 애니메이션에 천연색 기법이 도입되었다. 1932년에는 ‘꽃과 나무들’이라는 영화로 자신이 받은 32번의 아카데미상 중 첫 번째 상을 수상했고, 1937년에는 다면 촬영 기법을 적용하여 촬영한 최초의 영화인 ‘낡은 풍차’를 발표했다. 이후 월트는 ‘피노키오’, ‘판타지아’, ‘덤보’ 와 ‘밤비’ 같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의 고전을 완성했다.
시대를 앞선 환상의 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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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월트디즈니사를 대표하는 ‘디즈니랜드’는 1,7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 마법 왕국으로 1955년 7월 17일,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서 최초로 개장하여 월트디즈니의 다양한 이야기와 연관된 실제적 체험의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홈 엔터테인먼트의 새 시대를 열었으며, 규모나 제공 서비스 면에서 단연 최고의 테마파크의 모델로 불리우고 있으며 매년 2,500만 명의 고객이 방문한다. |
월트디즈니는 20세기의 전설이자 대중의 영웅이었다. 전 세계에 걸친 그의 인기는 그의 이름이 대변하는 몇 가지 사고방식, 즉 미국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상상력, 낙관주의 그리고 자수성가라는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세계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 행복 그리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제공하였다.
지금의 월트디즈니사를 대표하는 ‘디즈니랜드’는 1,7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 마법 왕국으로 1955년 7월 17일,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최초로 개장하여 월트디즈니의 다양한 이야기와 연관된 실제적 체험의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홈 엔터테인먼트의 새 시대를 열었다.
“디즈니랜드 방문을 환영합니다. 여기는 모두의 낙원입니다. 여기에서는 나이 드신 분이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어 체험하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도전을 맹세하게 되지요. 디즈니랜드는 미국을 창조한 이상과 꿈, 그리고 냉엄한 현실을 근간으로 해서 전 세계 사람들의 행복과 영감의 원천이 되고자 합니다.” 디즈니랜드의 개장식에서의 월트 디즈니의 연설문에서처럼 미국 디즈니랜드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동심과 환상을 심어주는 꿈의 세계이며, 미국 개척의 역사, 근대 과학을 기둥으로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가족단위로 즐길 수 있는 최대 규모의 테마파크이다.
미국 디즈니랜드가 탄생하게 된 계기는 1948년 미국에서 주휴 2일제가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을 계기로 월트 디즈니는 주제공원을 조성하고 싶어 하였다. 이름은 ‘미키마우스 공원’이였고, 할리우드 북부에 있는 스튜디오의 한쪽인 자기회사 소유의 땅 19만 8,000평이 후보지였으며, 간단한 부지계획까지 작성되었다. 그 후 그의 꿈은 과거, 현재, 미래를 혹은 환상과 모험, 휴식의 나라 등 여러 곳을 기차로 도는 주제공원 구상으로 대규모 테마파크를 꿈꿔왔다. 이렇게 여러 곳을 순회하는 디자인 개념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차로부터 출발된 것이었다. 월트 디즈니는 청소년기에 철도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게 철도의 세계는 낭만으로 기억되어 대규모 테마파크 구상의 원점도 기차이고, 기차를 공원 주위로 만들어 달리게 하고 싶다는 집념으로 지금의 미국 디즈니랜드를 탄생시켰다.
그 후 50여 년 뒤,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체험을 제공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월트디즈니의 테마파크 및 리조트는 2007 회계연도에 대략 110억 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창출했으며 북미지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에 위치한 디즈니의 5개 놀이공원을 찾는 입장객은 연간 수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월트 디즈니사의 CEO ▲ 디즈니사의 위기 속에서 재도약의 계기를 만든 인물이 ‘마이크 아이즈너’ 회장이다. 디즈니사에 강력한 비전을 불어넣었고, 회사 구조 개편을 통해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 즉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다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즈의 창시자로 1923년 그의 형 로이 디즈니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로 시작하였다. 끊임없는 뛰어난 창조력으로 세계적 글로벌 기업이 된 디즈니사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디즈니의 글로벌화 전략의 중심에는 창립자 월트 디즈니가 있었다. 월트 디즈니, 그는 작은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국에 물품을 수출하고 다양한 분야를 막론하는 대기업 디즈니를 일구어 냈다. 월트 디즈니는 생각과 마음이 젊고 행동력을 갖춘, 아이디어와 용기의 소유자였다. 모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뛰어나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토키(영사할 때 영상과 동시에 음성·음악 등이 나오는 영화의 총칭), 화면의 컬러화, 멀티플레인 카메라 등을 가장 먼저 텔레비전에 적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창조력뿐만 아니라 경영적 수완에도 뛰어나, 일찍부터 캐릭터의 상업화가 중요함을 깨달아 그에서 수입을 거둬들였다. 그가 만든 캐릭터는 미키마우스를 대표주자로 하여 도널드 덕,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밤비, 덤보, 신데렐라 등은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있다.
시대를 앞선 월트의 선견지명은 실제로 그의 나이 50세 근방에 디즈니랜드를 건설함으로써 새로운 도전을 이뤄내고자 하는 의지를 갖추고 있었다. 월트 디즈니는 항상 소비자들에게 꿈을 주는 기업이 될 것을 강조하며 기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와 폭풍과도 같은 추진력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월트 디즈니는 자신의 성공비결로 4C, 즉 호기심(curiosity), 자신감(confidence), 용기(courage), 그리고 일관성(constancy)을 들었다. 이 네 가지 철학을 통해 디즈니의 모든 운영체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형 로이 디즈니와의 불화와 후계자 양성 실패로 인해 사후 회사에 큰 불안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위기의 디즈니, ‘월트 정신’으로 재건
이러한 디즈니사의 위기 속에서 재도약의 계기를 만든 인물이 ‘마이크 아이즈너’ 회장 이다. 원래 디즈니는 상업적 목적과 디즈니가 표방하는 꿈과 행복의 문화 간에는 모순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디즈니사의 특징이었다. 월트 디즈니가 살아있을 무렵에는 월트가 상업적 목적을 추구해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월트 디즈니와 디즈니사를 아동기의 순수함이란 개념과 동일시해왔다. 그 시절의 디즈니사는 디즈니의 내부의 반대와 외부의 경쟁을 가차 없이 제압하고,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디즈니가 다른 기업과 차별화되는 요소였다.
하지만 월트가 죽고 나서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9년 디즈니사의 시장 점유율은 4% 하락하여 7개의 메이저 스튜디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행히도 월트는 후계자 임명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신이 없는 디즈니사의 운영, 지휘는 생각치도 않았기 때문에 후계구도의 조직과 경영방식에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월트의 뒤를 이은 인물들은 과거의 했었던 방식들을 그대로 답습하여 비창의적인 분위기가 회사를 지배하고, 창조정신은 고갈되어 간 것이다. 그래서 회사의 수익성은 떨어지고 브랜드 가치가 추락하는 등 창립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4년 아이즈너 회장이 CEO로 디즈니사에 취임할 당시도 회사 이익은 계속 하락하여, 그 결과 80년 1억 3,500만 달러에 이르던 수익이 83년에는 9,300만 달러에 그치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등 한 때 헐리우드의 선두 주자였던 디즈니사는 이미 2류 회사로 전락해버렸다. 이 때 방향성을 잃었던 디즈니사에 강력한 비전을 불어넣었고, 회사 구조 개편을 통해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 즉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 바로 아이즈너 회장이다. 그는 지금까지 축적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드는 즉, 월트의 사후 시들어 버린 ‘월트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찾는 것이 디즈니의 재건으로 가는 첫 디딤돌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디즈니의 4가지 주력 사업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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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트디즈니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미키 마우스를 대표 주자로 하여 도널드 덕,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밤비, 덤보, 신데렐라 등은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있다. |
미디어 네트워크 분야에서는 텔레비전 인터네셔널, 디즈니-ABC 인터내셔널 텔레비전, ESPN, 월트디지니 인터넷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즈니 채널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 역시 믿고 즐길 수 있는 월트디즈니의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은 창의적이면서 높은 품질 수준을 자랑한다. 특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유료 채널로 주요 시장에서 어린이들에게 꾸준히 시청률 1위를 지키고 있다. 디즈니-ABC 텔레비전 그룹은 월트디즈니 컴패니의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및 뉴스 텔레비전 사업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을 하는 중심점이다.
첨단 기술 분야를 선도하는 디즈니-ABC 텔레비전 그룹은 디지털 미디어 멀티플랫폼 사업을 구축했으며 그룹의 전략적 파트너들과 공조하여 회사의 콘텐츠를 소비자들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달하고 있다. 또 세계 최고의 스포츠 분야의 네트워크 채널인 ESPN은 다국적, 멀티미디어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사로 광범위한 멀티미디어 스포츠 자산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으며, 50여 개에 이르는 사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스튜디오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월트디즈니 픽쳐스,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 애니메이션과 디즈니 툰 스튜디오를 포함하여, 터치스톤 픽쳐스, 할리우드 픽쳐스와 미라맥스 필름에서 영화를 배급하고 있다. 월트디즈니 홈 엔터테인먼트는 디즈니를 비롯한 기타 영화 타이틀을 대여 및 판매용으로 전 세계 홈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공급하고 있으며, 디즈니 공연 제작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최대 제작자 중 하나이다. 디즈니 뮤직 그룹은 월트디즈니 레코드, 할리우드 레코드, 브에나비스타 레코드와 리릭 스트리트 레코드라는 4개의 음반제작사를 통해 창작 음악 및 영화 사운드트랙을 배급하고 있다. 이러한 디즈니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거대한 유통망을 기반으로 지난해 전 세계 박스 오피스의 인기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며 3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둠으로써 최고의 실적을 올린 한 해를 보냈다. 2007년 한 해 동안 미국 국내 시장에서만 13억 5,000달러가 넘는 총 수익을 거두었으며 과거 14년 동안에 10억 달러를 돌파한 11번째의 해 이기도 했는데 이는 업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업적이다.
이런 디즈니의 글로벌 사업은 회사의 순이익뿐 아니라 그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회사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전략적인 핵심 분야이다. 이미 세계 여러 시장에서 글로벌 사업부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고 이를 통해 디즈니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변모하는 경제 환경과 날마다 새로운 기술이 출현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디즈니는 디즈니만의 창의적 제품을 개발하고 미국 이외 지역에서의 성장을 추진해 나아갈 이상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상업적인 분야 말고도 글로벌 기업으로써 사회 공헌분야에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월트디즈니 컴패니는 공공 서비스 시책, 지역사회 복지 및 자원 봉사를 통해 어린이들과 가족들의 소망을 현실로 바꿔줌으로써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예로 전 세계 40개국에서 2007년 4월을 제1회 ‘디즈니 인터내셔널 발룬티어스 데이’로 지정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우에는 7개국에서 약 800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4,000시간 이상을 지역사회 봉사, 고아원과 학교 방문, 집과 병원 페인트칠하기, 지역사회센터 환경 정비 및 청소와 같은 봉사 활동을 위해 투자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또 월트디즈니 자원봉사 그룹 ‘VoluntEARS’가 선택한 자선단체에 재정적 기부를 하는 직원들에게 회사 차원에서 ‘EARS TO You’라는 보상제도를 마련하여 봉사활동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월트디즈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장 중 하나입니다. 한국의 탁월한 정보기술은 월트디즈니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결합하여 훌륭한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월트디즈니 컴패니 코리아가 작년 레인콤과 협력을 통해 탄생시킨 ‘미키 마우스’ MP3 플레이어가 청소년 및 여성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나아가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게 된 성공도 이 분야의 높은 시장성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