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찬 섬세함과 따뜻함에서 오는 ‘열정’
상태바
가득찬 섬세함과 따뜻함에서 오는 ‘열정’
  • 최빛나 차장
  • 승인 2014.08.05 16: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스로 채우고나니, 베품은 저절로 생기더라”

‘돌아와 주세요~ 정든사람 기다리는 목포항으로…’- 조용필 목포항 中-
목포는 노래 가사처럼 누군가만을 기다리는 듯 한쪽 가슴이 뭉클한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다. 그렇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목포에서 바닷바람 물씬 풍기며 그를 만났다. 첫인상은 멀끔한 키에 예의바르고 말쑥한 사업가 같았다. 인사를 나누고 자세히 보고 있자니 특유의 깊은 눈과 살아온 세월을 말하는 듯 신비로운 인상이 그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 이갑종 화백은 미술작가와 공인중개사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성실함과 끈기로 목포에서는 공인중개사로서는 이미 자리매김 한 상태. 앞으로는 좋은 작품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말한다.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그를 만나니 한결 편안해지며 여유로워 졌다. 이갑종 화백 얼굴에선 지나온 세월의 역사가 묻어남과 동시에 편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삶을 살면서 어려웠던 시절부터 지금에 오기까지 고단함과 즐거운 기억을 이제 그의 반평생만큼도 살아보지 못한 내가 일일이 헤아릴 순 없지만 어수룩하지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그의 말투에서 멋스러움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불현 듯 다가오는 세월의 느낌. 그것이 예술을 하는 나에게 창조의 밑거름을 주는지 혼란스러움을 주는지 잘은 모르지만 목포에 불어오는 따뜻하고 정겨운 냄새가 나는 바닷바람 탓에 그 세월의 풍파가 많이 물들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는 여러 가지를 의미담고 있었다.
“그의 한국화 작품에서는 이 고장 목포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미의 세계를 연출하는 작가라고 감히 평하고 싶고 이 작가의 작품은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표현양식과 화면에서는 유화에서나 볼 수 있는 마띠에르를 느낄 수 있다”- 서양화가 손영선 평-

예술을 바라보는 시차적 변화

▲ 원시춤 10F 혼합재료
예술의 가치는 변치 않을지라도 이를 감상하는 이들의 시선은 점점 달라지는 것 같다. 처음 한국화를 그린지는 약 29여 년 전 70년대, 그때 삶의 꼭지점은 당장 앞에 있는 의식주의 해결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열망이 너무나 강했던지, 마지막 고집이었는지 생활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수만에 호남대 미술학과에 입학, 서양화를 전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열정이 그렇게 뜨거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때의 그림과 지금의 그림은 깊이부터가 다르다. 그때의 그림이 열정적이고 뜨거웠다면 지금의 그림은 조금 편안하고 여유롭다. 보는 사람마다 관점은 달라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당시의 나의 정서와 지금은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렇게 보여진다.
그렇게 늦깎이 그림학도로 새 출발을 시작해 서울 인사동에서 큐레이터 활동을 하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니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진 삶의 질 때문인지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수준이 높아짐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그림만 몰두한지 몇 년이 흘러 수많은 작품을 남기게 됐다. 그렇게 얻어진 한국화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양화를 전공했고, 그로인해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을 함께 표현하고 자기 색채를 가미하여 한국화에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작품이 탄생하게 됐다. 표현주의 양식의 형상과 이미지를 추구하는 심리적 감흥에 집중하는 경향과 한국적인 조형양식부터 인간과 자연의 소통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 있으며 깊은 내면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곧 나를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 흔적 100F 혼합재료 / 추성 130X163 수묵채색

현실로의 이어짐
미술작가들은 대개 형편이 좋지 않다. 형편이 괜찮다 싶으면 유명한 작가라서 그림이 잘 팔리거나 집안이 부유하다. 과거 서울에서 형편이 좋지 않았던 미술작가로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림팔이다. 그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었다. 내 그림을 헐값에 사람들에게 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목포인 고향으로 내려갔다. 목포에서는 부동산을 하는 형제들이 많고 아내가 일찌감치 부동산업에 뛰어 들었다. 중개업하는 일은 시간을 많이 요구하지 않으면서 안정된 수입을 갖다 주었다. 때때로 한국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한탄과 자신의 경제능력에 대해 자책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부동산일을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 좋은 향기, 종교적인 문제, 동물 등 많은 이미지들만 봐도 마음속으로 구상을 하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스스로의 채움을 가졌다. 그렇게 화가와 어울리지 않는 공인중개사를 함께 공유하게 됐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고 일도 잘 풀렸다. 공인중개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않은 요즘 그들에게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했고 세월이 지나니 신뢰도가 쌓였다. 이제는 베풀기도 할 정도 심적 부담감도 줄었다. 그림을 마음 놓고 그릴 수 있는 자금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그렇게 여유를 활용해 광주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박사과정에 있으며 강사로도 활동 하고 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아내, 아들, 완벽하게 이루지는 않았지만 화가였던 꿈을 이뤘고, 밥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은 벌어지고, 목포에서도 꽤 유명한 공인중개사역할을 하고 있다. 전념할 화실도 곧 생길 예정이다. 그러고보면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같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