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사상 초유 징계, 위기인가 기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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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사상 초유 징계, 위기인가 기회인가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4.06.3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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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KB금융 등 금융권 임직원 220명 제재심의 재논의키로

금융권이 사상 최대 규모의 고강도 위기를 맞고 있다. 시중은행장들을 비롯한 200여 명의 금융권 임직원이 금융당국의 징계 대상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6월26일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고객 개인정보 유출과 불법 대출 등의 금융 사고를 일으킨 15곳 안팎의 금융사와 전현식 CEO 10여 명 등 임직원 220명에 대한 징계 수위를 최종 확정에 나섰다. 하지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무더기 제재 방식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사상초유의 금융권 인사 징계가 예고된 6월26일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 전체회의가 개회 3시간여를 넘기며 ‘마라톤 회의’로 진행되었다. 이날 오후 2시30분 서울 여의도 금감원 본원에서 열린 제재심의위에는 KB금융지주, 국민은행, 우리은행, ING생명,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 씨티캐피탈, IBK캐피탈 등 15개 금융사 220명에 대한 징계안이 처리 대상으로 올랐다. 하지만 금감원은 제재심의위원회에 상정됐던 안건 15건 가운데 6건만 심의 의결하고 나머지 안건에 대해서는 추후 열리는 제재심의에 다시 상정해 재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금감원은 효성그룹 임원들에게 거액을 부당하게 대출한 효성캐피탈의 전·현직 대표이사 2명에게 문책경고를 내리고 조현준 (주)효성 사장과 조현상 부사장, 조현문 전 부사장에겐 주의적 경고를 내렸다. 효성캐피탈은 기관경고를 받았다. 조현준 사장 등 효성 임원들은 효성캐피탈에서 4,300억 원을 부당하게 대출 받아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금감원은 “KB금융 안건과 국민은행 제재 안건 가운데 주전산기 전환사업·카드분사 시 정보제공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검사국의 보고와 함께 진술자의 진술을 청취했으며, 추후 제재심에 다시 상정해 진술자 등에 대한 질의응답 등 충분한 심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상 초유의 대규모 징계를 결정해야 하는 데다 징계 대상자들이 원할 경우 추가 소명 기회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만에 끝내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제재심의위 위원장은 최종구 금감원 수석부원장이며, 위원회는 총 9명으로 구성된다.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 추천하는 민간위원 각 3명씩과, 금감원 임원, 금융위 담당 국장, 금감원 법률자문관 등이다. 이례적으로 금융위원회 담당 실무 과장들도 참석했다.
금감원은 지난 6월19일 사전 징계 대상자들의 소명서를 받고 징계 수위를 검토했다.

이번 징계심의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은 KB금융그룹이었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KB국민은행장이 모두 중징계 대상자다. 임 회장은 KB국민카드 분사 과정에서 은행의 고객정보를 허술하게 관리함으로써 대규모 고객정보 유출 사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징계 대상에 올랐다. 이 행장의 징계 사유는 일본 도쿄지점 부당 대출과 주전산시스템 교체 과정에서 내부 통제를 하지 못하고 갈등을 표출시켰다는 점, 또 보증부대출 부당이자 환급액 허위보고, 국민주택채권 횡령 등의 문제로 임 회장과 이 회장 외에도 직원 100여 명이 제재를 받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국민은행은 리스크 부문 부행장은 도쿄지점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기 때문에 간접적 책임은 있지만 중징계는 과하다는 입장이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 등 KB임직원에 대한 징계수위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금감원은 이날 제재심의위원회에서 3시간여 가량 KB금융지주와 국민은행의 소명을 들었지만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 관련 안건을 7월3일 열리는 다음 제재심의위에서 논의키로 했다.
임영록 KB회장은 이날 제재심의위 출석에 앞서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오늘 충분히 소명하겠다”며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고 좋은 쪽으로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징계를 받아도 LIG손해보험 인수에는 문제가 없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저와 임직원들이 가슴 아픈 처벌을 받아 거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선처를 해달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심의위에서 국민은행 주 전산시스템 사태는 조직 내 의사소통 미흡으로 인한 것이며, 고객정보 유출 건은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KB금융지주는 이번 징계가 주의적 기관경고(경징계) 수준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 LIG손보 인수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9번째 심의 대상인 국민은행의 이건호 행장은 “소명 과정 자체가 오늘 다 끝나지 않았다”며 “오늘 건에 대해서는 내 입장을 열심히 설명했다”고 밝혔다.
김중웅 국민은행 이사회의장은 “사외이사들을 대변해서 왔다”며 “임직원이 억울하게 피해를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사외이사들이 이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정관주의를 다해 성실히 수행하고자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당국 관계자는 “제재심의가 끝난 게 아니라 단언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소명은 충분히 예상했던 수준이라 제재 수위를 바꿀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KB금융그룹으로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임 회장과 이 행장의 동반 사퇴다. ‘문책경고’가 확정되면 연임이 불가능하고 퇴직 후 3년간 금융권 재취업이 금지된다. 지금까지는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은 당국의 중징계를 받으면 대부분 사퇴했다. 법적으로는 연임이 불가능할 뿐 남은 임기를 수행하는 데는 하자가 없지만 황영기 전 회장과 강정원 전 행장은 중징계를 받은 후 스스로 물러난 바 있다.
임 회장과 이 행장이 전산 시스템 교체 과정에서 팽팽히 맞선 만큼 적어도 한 사람은 퇴진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이들의 징계 사유로 작용한 사건·사고들은 이전 경영진 재직 때부터 쌓인 문제들이 터져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임 회장이 금융지주 사장, 이 행장이 은행의 리스크담당 부행장을 맡고 있던 시기와 겹치는 만큼 책임을 피해나갈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KB 관계자는 “국민주택채권 횡령 사건 등의 경우 내부통제 강화 일환으로 직접 적발해 감독당국에 보고한 사안인데 이런 부분까지 징계 사안에 포함된다면 향후 임기 중 사건을 덮는 데만 급급한 풍토가 조성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밖에 우리은행은 파이시티 불완전판매, 신한은행은 불법 계좌 조회 등으로 징계 대상에 올랐다. 씨티은행과 SC은행의 임직원들에게는 고객 정보 유출의 책임을 묻는다. 리처드 힐 전 SC은행장과 신충식 전 NH농협은행장은 중징계, 이순우 우리금융지주회장과 하영구 씨티금융지주 회장은 경징계를 통보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은행의 경우 파이시티 사업 신탁상품 불완전판매, CJ그룹 비자금 사건 등으로 임직원이 징계를 받을 것으로 관측된다. 신한은행은 고객정보 불법조회로 이날 제재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최근 관련 민원이 접수되면서 일정이 늦춰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유출 카드 3사(KB국민·농협·롯데)의 전직 최고경영자(CEO)도 징계 대상자다. 최기의 전 국민카드 사장, 손경익 농협카드 전 사장, 박상훈 롯데카드 전 사장도 중징계를 받을 전망이다.

자살보험급을 약관대로 지급하지 않아 논란을 일으킨 ING생명에 대한 징계 결정은 이달 3일로 연기했다. 금감원은 5월 회의에서 이월된 7개 안건 중 자살보험금 미지급 논란을 빚은 ING생명에 대한 제재 문제를 놓고 2시간가량 논의를 벌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다음 회의에서 재논의키로 했다.
금감원은 “ING생명 자살보험금 지급과 관련해서는 판례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돼 충분한 심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다음 제재심의위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은 지난해 8월 ING생명이 2003년부터 2010년 사이 재해사망특약 가입 2년 후 자살한 90여 명에 대해 200억 원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실을 적발했다. ING생명 외에도 대부분의 생보사들이 2010년 4월 표준약관을 고치기 전까지 자살할 경우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약관을 적용했지만 사실상 재해사망보험금의 절반 수준인 일반 사방보험금을 지급해왔다. 제재심의위의 판결로 생보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소급 지급해야 할 경우 추가로 지급돼야 할 자살보험금은 5,000억 원에 달하며, 약관에 따라 미래에 지급해야 할 보험금까지 합치면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ING생명 관계자는 “시간이 부족해 안건을 다음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 것으로 안다”며 “연기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 지 예단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제재심의위는 자산운용사의 지위를 이용해 이른바 ‘채권파킹’ 등 불공정거래를 한 혐의를 받고 있는 맥쿼리투자신탁운용에 대한 심의도 7월로 연기했다. 채권파킹은 펀드매니저가 증권사에 채권매수를 구두로 요청한 후 증권사가 잠시 보관하도록 한 후 결제하는 행위다.
이 외에도 동부증권이 계열사가 발행한 회사채의 50% 이상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한 금융투자업 규정을 어기고 동부CNI 회사채를 전량 편법 인수한 것으로 드러나 제재심의위원회에 징계안을 상정할 예정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동부증권과 유진투자증권은 지난해 10월 동부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동부CNI가 300억 원의 회사채를 발행할 당시 150억 원어치를 각각 인수했다. 그 후 유진투자증권은 동부증권에 동부CNI 회사채를 모두 재매각했다. 결과적으로 동부증권은 동부CNI가 발행한 회사채 300억 원 전량을 인수하게 됐다. 동부증권은 이후 인수한 회사채 중 일부인 100억 원 이상을 개인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유진투자증권 역시 회사채 우회 인수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되면 징계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10월 동양사태 직후 대기업 집단에 소속된 증권사는 투기등급의 계열사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융투자업 규정을 개정했다. 개정 규정은 계열사가 발행한 회사채의 50% 이상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일부에서는 금감원이 예방 차원의 감독이 아니라 ‘사후 약방문’식으로 제재에 치중하는 금융당국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특히 국민카드 분사 당시 신용정보법에 따른 승인을 받지 않고 국민은행의 고객정보를 가져간 것은 금융위원회의 심사가 미흡했던 측면도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별도승인 안건에 대해 금융위가 포괄승인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산시스템 교체 과정에서 내부 조율을 하지 못하자 금감원으로 문제를 들고 간 이 행장의 경우에도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자진 신고한 CEO에게 중징계를 취하면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일이 터진 뒤 중징계를 때리는 것만이 감독기관의 의무는 아니다”며 “사전, 상시 감독이 아닌 징계 위주의 처방은 당국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꼬집었다.
이 외에도 금융당국이 여론과 정부·정치권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제재심의 시 ‘원칙’과 ‘일관성’있는 태도를 준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는 “금감원이 금융사고에 대해 ‘중대성’의 원칙에 비례해서 원칙 있고 일관되게 검사 및 제재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손상호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는 “특정 금융사와 금융사 CEO에 초점이 맞춰져 제재 논의가 흘러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제재에 대한 세밀한 규정, 전례 등이 보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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