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압도적인 승리다. 깜깜이 선거가 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육감 선거가 이번 6.4지방선거에서 가장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것은 물론 예상을 뒤엎는 결과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특히 고승덕·문용린 후보의 2파전으로 예상됐던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조희연 후보가 출구조사에서부터 승리, 일찌감치 당선을 확정짓는 이변을 낳았다.
이번 교육감 선거는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 ‘앵그리맘’들의 표심이 승패를 갈랐다는 분석이다. 전국 17곳 중 13곳에서 진보 성향 교육감이 당선된 것은 정치권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돼 정치권의 변화보다는 교육계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결과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전국 17개 시·도 교육감 선거 개표 결과 13개 지역에서 진보 성향 후보가, 3개 지역에서 보수 성향 후보가, 1개 지역에서 중도 후보가 당선됐다.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는 여론조사에서 3위를 차지했던 진보 성향의 조희연 교육감이 대역전극을 펼치며 39.1%의 득표율을 기록, 보수 성향인 문용린 후보와 고승덕 후보를 제치고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조 교육감은 낮은 인지도 탓에 선거 초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지율로 출발했다. 지난 3월 일찌감치 진보 시민·교육단체로 구성된 ‘2014 좋은 서울교육감 시민추진위원회’에서 단일화 경선에서 후보로 결정됐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수 후보인 고승덕, 문용린 후보에 밀려 항상 3위에 머물렀다. 그랬던 조 교육감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차남 조성훈씨가 한 포털사이트에 글을 올리면서부터다.
조 씨는 5월29일 ‘한 인간으로서의, 그리고 한 아버지로서의 조희연’에 대해 “누구보다 평등교육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할 사람임은 분명하다”며 표심을 호소했다. ‘가까이에서 아버지를 바라봐온 아들로서 아버지가 한 점의 부끄러움 없는 사람임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는 이 글이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부터 조 교육감의 지지율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조 씨가 글을 올린 이틀 뒤 경쟁자인 고 후보의 딸이 ‘아버지는 교육감 자격이 없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선거 판세가 크게 요동쳤다. 당선이 확실시된 후 조 교육감도 “아무래도 둘째 아들의 편지와 고 후보 딸의 편지가 서울교육감 선거에 대한 전국민적 관심을 촉발시키면서 지지도 비약의 계기를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사실상 두 자녀들의 상반된 글이 승패를 결정지은 셈이다.
조 교육감은 “당선의 기쁨보다는 책임감이 더욱 앞선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살인적인 입시 고통을 해소하고 공교육 정상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핵심공약이었던 일반고 전성시대를 여는데 주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는 “교육정책은 무엇보다 안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전임 교육감이 해온 정책 중 긍정적으로 평가된 자유학기제 진로교육 등은 적극적으로 계승해 이어 나가겠다”고 전했다.
조 교육감은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았지만 진보 학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 온 인물이다. 1978년 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 재학 시절에는 ‘유신헌법 철폐’ 유인물을 뿌렸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한 적도 있다. 이후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지난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혐의를 벗었다. 또한 1994년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참여연대를 창립을 주도했으며 초대 사무처장과 집행위원장,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의장,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비판사회학회 회장, 희망제작소 이사 등을 두루 맡아 비슷한 길을 걸어온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시너지도 기대해볼만 하다.
경기도에서는 진보 성향의 이재정 교육감이 당선됐다. 그는 보수 성향의 조전혁 후보를 개표 초반부터 10%p 가까이 앞서며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 경기도교육감은 20대에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뒤 종교 활동에 매진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성공회대 총장, 교수로 교육활동을 해왔다. 성공회대 초대 총장, 16대 국회의원(교육위원)을 역임하고 노무현 정부 시절 33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상곤 교육감이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 경기도교육감 선거에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진보 단일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 교육감은 “혁신학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학부모, 교사, 시민단체와 논의하고 실천하겠다”고 당선소감을 밝히며 “세월호 희생자의 뜻을 기리고 단원고 학생, 유가족, 교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인천 역시 진보 성향의 이청연 교육감이 31.9%를 얻으면서 보수 성향 이본수 후보를 제쳤다. 이 교육감은 투표 종료와 동시에 공개된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에서도 32.8%를 기록하며 25.9%를 기록한 이본수 후보를 6.9%p 차로 앞섰다. 이 교육감은 전교조 인천지부장 출신으로 인천 혁신학교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진보 성향의 부산 김석준(34.7%), 광주 장휘국(47.6%), 전북 김승환(55.0%), 전남 장만채(56.2%), 경남 박종훈(39.4%), 제주 이석문(33.2%) 교육감 역시 보수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으며, 충북 김병우(44.5%), 세종 최교진(38.2%), 강원 민병희(46.4%) 교육감도 당선됐다. 특히 초반부터 박빙의 승부로 예측이 어려웠던 충남에서도 진보 성향의 김지철 교육감이 31.9%를 얻어 보수 성향 서만철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대전은 중도성향의 설동호 교육감(31.4%)이 당선됐다.
보수 성향 후보 중에 당선된 지역은 대구, 울산, 경북 등 3곳뿐이다. 대구의 우동기 교육감은 58.5%의 득표율로 압승했으며, 울산 김복만(36.2%), 경북 이영우(52.1%) 후보도 교육감에 당선됐다.
이처럼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성향 후보가 완패하고 진보 성향 후보가 압승을 거둔 데에는 세월호 참사로 인한 현 정권에 대한 분노와 진보 후보들의 단일화 성공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다수의 진보 성향 후보가 출마한 대전과 진보 성향 후보가 나오지 않은 경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진보단일 후보를 내세웠지만 보수후보는 단일화에 실패하며 후보가 난립했다. 하병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대변인은 “세월호 참사로 교육에 대한 국민적 성찰이 교육감 선거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며 “입시교육에 찌든 나머지 인간의 생명과 안전의 소중함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교육계의 자성과 혁신을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는 정치인 출신도 고전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핵심 간부 출신이 8명이나 교육감에 당선됐지만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출신은 4명 중 1명만 당선됐다. 전교조에서 시·도 지부장 등을 역임하고 교육감에 당선된 지역은 인천(이청연), 광주(장휘국), 강원(민병희), 충북(김병우), 충남(김지철), 경남(박종훈), 제주(이석문), 세종(최교진) 등 8곳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전교조 출신이 전국 교육감의 절반을 차지함에 따라 전교조가 그동안 추진해왔던 교육정책과 전교조 활동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학생인권 강화, 학생회 및 학부모회 법제화 등 학교자치 실현, 교장공모제 등 교원인사 정책 혁신, 자사고 등 이른바 ‘특권학교’ 및 일제고사 폐지, 교원평가 및 교원성과급제 폐지, 무상급식 및 친환경급식 확대 등 주요 정책에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전교조 출신이 대거 교육감에 당선된 것에 비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출신은 4명이 교육감 선거에 도전장을 냈지만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했다. 서울시교육감에 출마한 고승덕 후보는 선거 초반 여론조사 결과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해 당선이 유력했지만 선거 막판 딸이 올린 SNS 글에 발목을 잡혀 끝내 낙선했으며 경기도교육감에 출마한 조전혁 후보는 17대 국회의원(교육위원)을 역임하며 전교조 조합원 명단을 공개하는 등 ‘전교조 저격수’로 활동했지만 보수 후보 난립으로 표만 나눠가진 셈이 됐다. 광주시교육감에 출마한 양형일 후보 역시 17대 국회의원과 조선대 총장을 역임했지만, 재선에 도전한 장휘국 교육감의 넘어서지 못했다.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되자 여야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여당이 우려를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야당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5일 오전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의장은 국회 당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석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집중하느라 교육감선거에서 전교조 출신 교육감들이 많이 진출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며 “국가 백년대계의 교육을 생각할 때 참으로 무거운 마음이 든다”고 밝혔다.
심윤조 비대위원은 이념 교육화를 걱정했다. 심 위원은 “17개 시·도 중 13개 시도에서 진보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됐고 그 중에서 8분은 전교조 출신의 교육감”이라며 “앞으로 어린아이들의 교육현장이 이념교육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민현주 대변인 역시 이날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진보진영 교육감 후보가 많이 당선됐는데 아무리 교육정책에 있어서 가치가 다르다고 해서 일방통행을 하는 교육정책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며 “이로 인한 피해는 우리 아이들이 겪어야 한다. 교육감 선거에서 당선되신 분들이 잘 협조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야당은 결과에 상당히 만족한다는 입장이다. 라디오 방송과 전화 인터뷰를 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교육감 선거가 시대정신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면서 “탐욕과 지나친 정쟁 대신 사람 중심, 생명 중심의 교육과 그런 사회가 돼야 한다는 전반적인 성찰에서 나온 선거 결과”라고 밝혔다.
같은 당 정동영 상임고문도 진보 교육감의 약진이 대한민국을 바꾸라는 요구를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 고문은 한 인터뷰에서 “결국 세월호 사태가 진보 교육감 시대를 열었다. 30∼40대 이른바 분노한 엄마들, 앵그리맘의 표심이 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는 보수 교육감보다는 협력과 공존, 덕성을 중시하는 진보 성향의 교육감을 선택했다”며 “지난 4년 동안 김상곤 교육감을 포함해 진보 교육감들이 보여준 혁신학교, 인권조례, 무상급식 등 성과가 쌓여서 진보교육감 시대를 활짝 열었다”고 평했다.
결과를 놓고 전교조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도 상반된 입장을 내놨다. 전교조가 “혁신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라고 결과를 반긴 반면 교총은 “교육감 직선제 폐지 촉구운동과 함께 헌법소원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전교조는 5일 논평을 통해 “혁신교육과 교육복지, 평등교육을 표방한 진보 교육감에 대한 지지가 높게 나타났다”며 “입시, 특권교육을 키워온 박근혜 정권과 달리 혁신학교와 무상교육 확대, 자사고 폐지 등 반경쟁 교육복지를 표방한 교육감들의 공약에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세월호 참사로 교육에 대한 국민적인 성찰도 교육감 선거에 반영됐다”며 “이번 선거를 계기로 정부는 학교 현장과 소통구조를 복원하고 살인적인 입시교육에서 벗어나 교육의 기본 가치를 되살릴 수 있도록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반면 교총은 교육감 선거 결과와 관련, 직선제 폐지 촉구 운동을 전개할 것을 예고했다. 논평에서 교총은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도 “가장 교육적이어야 할 선거가 공작정치와 진흙탕 선거, 흑색선전 등으로 정치 선거보다 더 비교육적이고 정책이 실종된 선거가 됐다”고 지적하며 “정치권과 국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감 직선제 폐지 촉구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교총은 “교육감 직선제가 헌법 31조4항에 명시된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교육감 직선제에 대한 헌법소원을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육감 선거에서 참패한 새누리당도 현행 직선제 대신 임명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일 비대위에 참석한 주 정책위의장은 ‘과도한 선거비용’, ‘끊임없는 비리’, ‘교육감 후보 인지 부족’ 등을 이유로 들며 임명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후보 1인당 평균 4억 6,000만 원의 빚을 지고 있지만 엄청난 선거 비용을 개인이 마련할 방법도 없고 정당이 지원할 수도 없다”면서 “교육감 18명 중 절반 9명이 수사를 받거나 감사원에 적발됐다. 이렇게 비리가 빈발하는 것은 선거비용 조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막강한 인사권에 기인한 것으로도 보인다”고 밝혔다. 주 의장은 또 교육감 선거에 대한 인지 부족으로 ‘로또선거’가 되고 있다면서 “이번에 순환 배열식으로 바꿨지만 여전히 인지도 부족으로 깜깜이 선거가 계속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윤리적이어야 할 교육감 중 무려 3개의 전과를 갖고 있는 분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야당이 교육감 직선제 폐지를 주장하자 여당은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장병완 정책위의장은 10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선거를 폐지하겠다는 주장은 국민을 무시해도 좋다는 오만한 발상”이라며 “이러한 행태는 직선제 대신 체육관 선거를 했던 과거 민정당의 프레임”이라고 맹비판했다. 유은혜 원내대변인도 “지방자치 선거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면 지방자치제도도 폐지하자고 할 것인가”라며 “정치적 중립 운운하면서 직선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교육감 선거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존폐를 거론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자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교육감 선거는 진보 진영의 압승이라는 결과를 받아들고 벌써부터 직선제 폐지 공방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거 방식이 아니라 지금 국민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 가를 헤아리는 것이다. 진짜 진보를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