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에 대한 산문집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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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에 대한 산문집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 김민수 기자
  • 승인 2018.11.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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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김민수 기자]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하며 창의적이고 뛰어난 미술 세계를 인정받았던 화가 황주리에게는 또 하나의 특출난 소질이 있다. 바로 문재文才다. 감각을 한눈에 알아본 눈밝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내성적인 소녀는 일찍이 미술에 두각을 드러내었고, 출판사를 운영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책에 둘러싸여 자라며 글을 가까이 접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글에 대한 갈증을 느껴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여러 권의 에세이를 펴내며 두 권의 소설도 쓰는 분주하고 열정적인 과정을 한평생 이어가고 있다. 그의 글에는 읽는 재미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유머, 순간순간 사라져가는 시대의 얼굴이 있고, 간결한 문장의 아름다움까지 더해져 수필가 피천득의 뒤를 잇는 우리나라 정통 에세이의 드문 줄기로 평가받는다. 그림의 소질을 어머니가 발견했다면, 글의 소질은 저자 스스로가 계발하고 독자가 발견한 셈이다.

『산책주의자의 사생활』은 이런 열정의 산물이다. 중견 서양화가 황주리가 오늘의 자신을 이룬 많은 것들, 그 가운데 가족과 사람 그리고 여행에 대해서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그림 에세이로, 10년 만에 출간하는 다섯 번째 산문집이다.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딸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업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늘 중심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한창 일할 나이에 “내가 우려하던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는 글을 남기고 황망히 세상을 떠난 남동생, 사랑이란 느낌을 주었던 강아지 베티까지. 이 세상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가족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저자를 바라보면 어디에서나 당당한 화가라는 수식어를 벗어든 한 명의 사람이 서있다. 기운을 내어 내딛는 씩씩한 걸음걸이, 주변까지 환해지는 화사한 웃음소리, 화려한 원색과 열린 상상력의 화가 황주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여행할 때 항상 밝은 날만 있진 않다. 밝은 날은 밝아서, 흐린 날은 흐려서 추억이 된다. 인생의 길도 걱정이 쌓여 내공이 되고, 상처가 쌓여 용기가 된다는 것을 60의 고개에서 저자는 담담히 들려준다. 『산책주의자의 사생활』에서 그는 높고 낮은 인생의 요철들마저 당시에는 크고 어려웠지만 결국 가벼운 산책과 같았다고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시크하고 당당한 화가의 모습 뒤에 가려진 짙은 인간성을 느낄 수 있는 뭉클하고 따뜻한 58편의 짧은 글들과 26컷의 영혼이 담긴 그림들을 보다보면 저자와 함께 어떤 낯선 골목길이라도 좋으니 저녁 산책을 함께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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