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버지는 가내수공업으로 운영하던 재봉점을 두 아들에게 물려줬다. 총 자산은 9,000엔 안팎, 직원도 기술을 배우던 도제들 8~9명이 전부일 정도로 영세한 재봉점이었지만 아버지는 두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으려면 일찍부터 실전에 나서야 한다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이에 큰 아들에게는 회사 밖의 업무를, 둘째에게는 내부 업무를 맡겼다.

세계적인 타이어 기업 브리지스톤(Bridgestone)은 1906년 이시바시 쇼지로가 형과 함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봉점 ‘시마야’라는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다.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무엇을 하든 전국적으로 발전시킬 만한 사업으로 세상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큰 포부를 갖고 있던 쇼지로는 형 시게타로가 군대에 가자 버선, 셔츠, 바지 밑단 등 잡다한 물품을 만드는 재봉업 대신 버선에만 집중하기로 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봉급 없이 일을 배우던 도제들을 정규직원으로 대우했고 근무시간도 단축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생산량이 점차 늘어 1906년 하루 280켤레이던 생산량이 1909년에 700켤레까지 늘었다.
버선 기업, 미래를 생각하다
1914년 쇼지로는 모든 버선을 치수에 상관없이 20전에 균일가로 판매했다. 균일가인 데다 헐값이나 다름없는 가격에 업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쇼지로는 생산성은 높이고 원가를 최소로 해 균일가를 가능하게 했다. 이에 맞춰 브랜드도 바꿨다. 할아버지대부터 써오던 시마야 대신 ‘아사히’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았다.
쇼지로는 1922년 또 한 번의 도전을 감행했다. 밑창이 떨어지지 않는 신발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숙련된 고무 기술자를 스카우트했고, 두 달 동안 밤을 새운 끝에 고무밑창신발 ‘아사히 지하버선(작업화)’ 개발에 성공했다. 쇼지로는 이듬해 지하버선의 보다 완벽한 품질을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제품을 개량했고, 근로자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찍어내기 무섭게 팔려나가 납기를 맞추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연초에 하루 1,000켤레 팔리던 작업화는 연말에 1만 켤레로 늘어날 정도로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고무신 양산체제가 갖춰진 1920년대 말, 쇼지로는 미래를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미래는 ‘국산 자동차 타이어’였다.
당시 미국은 연간 50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타이어 생산량은 56만 5,000톤이었지만 일본은 8만 대가 채 되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 수입차였다. 쇼지로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언젠가 일본에도 본격적으로 자동차가 대량 보급되고 그에 따라 타이어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 그는 타이어 국산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고무밑창과 고무신으로 번 돈을 투자해 새로운 산업을 개척해야 하는 것은 혁신의 행보를 걸어온 그에게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하지만 동업자인 형은 반대했다. 충분히 돈을 벌고 있는데 왜 위험에 뛰어드느냐는 것이었다. 엔지니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성공 여부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쇼지로는 자신의 야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1929년 쇼지로는 비밀리에 미국 아크론에 타이어 설비를 발주했다. 하루에 자동차 타이어를 300개 찍어낼 수 있는 규모였다. 타이어 설비 구축이 한창이던 이듬해 형을 대신해 사장에 취임한 쇼지로는 “사실 지금 짓고 있는 대실험실은 자동차 타이어 제조를 위한 것”이라는 깜짝 발표를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는 연 3,000만 엔 규모의 자동차 타이어 대금은 모두 외국에 지불되고 있다. 앞으로 5,000만 엔, 1억 엔에 달하는 대량 수요가 생길 자동차 타이어 산업을 전부 외국 기업에 내주는 것은 국가 존립상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타이어는 우리의 야심작이자 고무공업자인 우리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반드시 성공할 각오다. 나는 우리 회사의 창업정신을 ‘공업보국’으로 정하고 이런 신념을 구현하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쇼지로는 타이어부를 신설하고 타이어 시범제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930년 4월9일, 드디어 자동차 타이어 시범제작에 성공했다. 첫 번째 브리지스톤 타이어였다. 이후 반년간의 시범제작과 시장조사, 테스트 판매를 거쳐 그해 10월 본격적으로 타이어를 판매했다.
철저한 품질책임보증제

1950년대 브리지스톤은 일본 타이어업계의 정상에 섰다. 글로벌 기업으로의 기반을 다진 것도 이 즈음이다. 본격적으로 수출에 나선 브리지스톤은 1954년에 12%였던 수출 비중을 3년 후에 22%까지 늘였다. 특히 중동지역은 26%까지 상승했다. 이란 테헤란에 주재원 사무소를 설치해 첫해에 1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이를 시작으로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수출기지로 삼아 사우디아라비아와 북동아프리카 시장까지 개척했다.
미국을 다녀온 쇼지로는 폼러버(거품고무)도 개발했다. 솜처럼 모양을 잡아줄 필요가 없고 내구성도 좋은 브리지스톤의 ‘에버소프트’는 자동차시트, 침구용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953년 180톤이던 에버소프트는 1960년대에 7,000톤까지 증가했다. 브리지스톤은 이 외에도 벨트, 호스, 방진고무 등 공업용품 생산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일본 최초의 컨베이어벨트를 개발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시베리아 개발에 나선 러시아로의 수출량이 크게 늘었다.
쇼지로의 시대가 저물다
1960년대 브리지스톤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1961년 5월1일 도쿄와 오사카 증권시장에 기업공개를 했으며 1963년에는 장남에게 사장 자리를 내주고 쇼지로 자신은 회장에 취임했다. 쇼지로는 이후 10년을 더 회장직을 수행했지만 1973년 5월15일 42년 간 머물던 자리에서 내려왔다.
“나는 사장으로 32년, 회장으로 10년간 오직 사업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브리지스톤이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여러분의 근면과 협력으로 오늘날의 성장을 이루게 됐다. 최고책임자가 바뀌어도 회사의 경영방침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주주에게는 적정 이윤을 보상하고, 경영진에게는 항상 독창적인 기술을 갖도록 만족스런 대우를 제공하고, 직원에게는 애사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한다. 모두가 이러한 브리지스톤의 전통을 지키며 더욱 발전하고 사회에 공헌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
파킨슨병을 앓아 치료를 받던 쇼지로는 1976년 9월11일 생을 마감했다. 회사장으로 치러진 장례식날 오후 1시, 종소리가 울리자 전 사업장 직원들이 1분간 묵도를 올리며 조의를 표했고 쿠루메 공장 취주악단이 베토벤의 ‘영웅’을 연주했다.
모터스포츠 이미지를 전면에
브리지스톤은 1977년에 플라스틱과 유사한 딱딱함과 고무의 탄력성을 지니는 초경질 고무 ‘슈퍼필러’를 개발했다. 이를 비드부에 채용해 사이드를 대폭 부드럽게 한 구조를 ‘슈퍼필러 구조’라 명명하고 이 구조를 적용한 ‘RD-207 STEEL’을 출시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서키드 주행을 목적으로 한 ‘RE47’을 출시해 각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 타이어를 토대로 일반 도로용이면서 레이싱 타이어에 가까운 구조와 성능을 지닌 고성능 타이어 ‘포텐자RE47’도 출시했다. 슈퍼필러 구조, 트레드 콤팩트, 스트레이트 홈을 주체로 한 트레드 패턴 등을 채용한 타이어는 큰 인기를 얻었고 이에 브리지스톤은 구매층을 카 마니아로 집중시켜 모터스포츠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세웠다.
1980년 파이어스톤 CEO였던 존 네빈은 브리지스톤에 내슈빌 공장을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당시 북미에 자체 생산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브리지스톤은 5,300달러에 내슈빌 공장을 인수했다. 브리시스톤 미국법인을 맡고 있던 이시구레 사장은 파이어스톤을 3년 안에 흑자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오늘의 품질은 내일의 규모를 가져온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최고의 품질을 생산하기 위해 곳곳을 손봤다. 원재료도 브리지스톤이 승인한 것만 사용하도록 했고, 본사 수준의 시험 장비를 설치해 엄격하게 테스트를 실시했다. 그 결과 미국법인은 3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가장 이상적인 성능 실현

브리지스톤은 그동안 고성능 타이어를 개발하며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1980년대 초 펑크 난 상태에서도 시속 90㎞로 80㎞를 더 달릴 수 있는 ‘런플랫’을 개발해 수백만 개를 팔았고, 타이어 표면에 수백만 개의 미세한 구멍을 뚫어 재빨리 노면의 물을 흡수·배출하는 타이어도 개발했다. 2000년 초에는 ‘포텐자 S-30’으로 수막을 차단했고, ‘아드레날린’으로 좌우는 물론 중앙에까지 다른 홈을 파서 가장 이상적인 성능을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1997년부터 F1에 진출해 수회 우승하는 쾌거를 올린 브리지스톤이다.
세계 25개국 180여 곳에서 연구개발과 생산 활동을 벌이고 있는 브리지스톤은 지난해 37조 2,8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 대비 17% 증가한 규모로, 영업이익과 경상수익은 53%, 순이익은 18% 증가한 기록이다. 이처럼 브리지스톤은 쉼 없는 성장으로 업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