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억도 힘든 세상에 일당 5억 ‘황제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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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1억도 힘든 세상에 일당 5억 ‘황제노역’
  • 이지원 기자
  • 승인 2014.05.0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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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허점 노린 파렴치’ 국민적 공분 일으켜

형법 제67~71조에는 벌금이나 과료를 내지 못하는 범죄자에게 교도소에서 노역으로 대신하도록 하는 ‘환형유치’ 제도가 명시되어 있다. 최대 3년 동안 노역으로 벌금을 대신하는 것인데 노역일당은 보통 5~10만 원 선이지만 법원의 재량으로 정할 수 있어 형평성 논란이 있어 왔다.

대주그룹 허재호(72) 전 회장이 일당 5억 원 ‘황제노역’ 논란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황제노역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 1억 1,000만 원, SK텔레콤 손승길 명예회장 1억 원, 부영 이중근 회장 1,500만 원, 두산그룹 박용오 회장이 1,000만 원의 일당으로 노역임금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허 회장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당 5억 원 노역으로 50여 일만 일하면 벌금 254억 원을 탕감 받을 수 있어 국민적 공분을 샀다. ‘관용을 넘어선 황당무계한 판결’이라며 여론이 들끓었다.

벌금이 반의반으로…

 
검찰은 지난 2008년 9월 허 회장에 대해 500억 원대 탈세와 100억 원대 횡령 혐의로 징역 5년에 벌금 1,000억 원을 구형하고 벌금에 대해서는 ‘기업 부담’ 등을 이유로 선고 유예를 재판부에 요청했다.
1심 재판부는 허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 원을 선고하고 벌금을 납부하지 않을 경우 1일 2억 5,000만 원의 노역일당을 책정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 원을 확정판결하고, 노역 일당을 1일 5억 원으로 결정했다. 즉 일당 5억 원으로 51일(2012년 기준)간 노역장에 유치되면 벌금을 모두 면할 수 있다는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범죄 사실은 인정되지만 피고인이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있고 횡령한 돈 대부분을 계열사의 운영자금 등으로 쓴 점을 감안해 형을 줄여줬다.
허 전 회장은 항소심 직후인 2010년 1월22일 해외로 도피했고, 대주건설은 2010년 10월 최종 부도처리 됐다. 광주, 전남에 본사를 둔 건설업체 가운데서는 금호산업, 남양건설, 금광기업, 우미건설 등에 이어 랭킹 6위이자 시공능력 전국 100대 기업에 포함된 7개 건설사 중 하나였던 대주건설을 건설 불황과 함께 1인 지배 체제의 구심점인 허 전 회장이 탈세와 횡령으로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받으면서 퇴출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부도를 맞았다.
그러나 허 전 회장은 출국 5개월여 만인 2010년 6월 뉴질랜드 영주권을 취득하고 최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며 골프와 요트 등 호화생활을 누렸다. 또 건설 사업 등으로 큰 부동산 재산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비난이 일었다.

5일 노역장 유치, 25억 원 탕감 받아
지난 2월 검찰은 벌금과 세금, 채무 등 634억 원을 내지 않고 도피 중이었던 허 전 회장의 은닉재산 찾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광주지검과 광주지방국세청은 허 전 회장의 자녀와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두 곳을 압수수색해 미술품과 골동품 100여 점을 압수하는 등 전 방위적 수사를 벌였다. 압수한 미술품에는 천경자 화백과 허백련 선생의 작품도 포함됐다. 또 허 전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광주 북구 누문동 토지 등 13건이 압류 조치돼 이중 8건이 공매가 이뤄졌으나 벌금 납부에는 배당되지 않았다. 나머지 5건은 감정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공매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부동산 압류조치에 따라 허 전 회장에 대한 벌금형 3년 조치 시효는 중단된 상태였다.
검찰의 재산 추적이 본격화되자 허 전 회장은 3월22일 뉴질랜드에서 귀국했다. 귀국 즉시 광주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됐지만 50여 일만 노역하면 벌금 254억 원을 모두 탕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여론이 악화되자 광주지검은 3월26일 허 전 회장의 노역을 중단하고 벌금을 강제 집행하기로 했다. 이에 허 회장은 인천공항에서 긴급체포 됐던 1일까지 노역장 유치기간에 포함해, 5일 동안의 환형금 25억 원을 탕감 받게 됐다.
이후 허 전 회장은 남은 벌금 224억 원 가운데 50억 원을 4월3일 광주지검 계좌로 납부했다. 또 나머지 174억 원에 대한 납부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허 전 회장과 주변인을 상대로 전방위 압박을 벌이고 있는 검찰 조사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사실혼 부인, 검찰 조사 후 자살 소동
허 전 회장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부인 황 모 씨가 검찰 조사에서 벌금 납입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4월1일 광주지검은 황 씨가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 허 전 회장의 벌금납부와 관련된 조사를 받았으며 조사 과정에 황 씨가 벌금 납부 의사를 밝혔다고 설명했다.
황 씨는 대주그룹과 연관 있는 레저 및 개발회사, 전남의 한 골프장 등에 상당한 지분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부 보도에 따르면 뉴질랜드에 본인과 법인 명의로 170억 원대의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서 3월28일 검찰조사를 받고 나온 허 전 회장은 “벌금은 어떻게 납부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족들을 설득해 빠른 시일 내 납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황 씨는 4월3일 오후 8시께 서울 강남구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에서 투신을 시도하다 경찰에 구조됐다. 황 씨는 인근을 지나던 한 시민의 “술 취한 여성이 ‘내가 죽어야 모든 게 끝난다’는 말을 하며 강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등에 의해 구조됐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위 관계자들은 황 씨가 검찰과 국세청의 전 방위적 압박에 상당한 심적 부담감을 느낀 것 같다고 전했다.

법정서 약속한 ‘기부’도 안 지켜
지난 4월2일 허 전 회장이 ‘자신의 골프장과 신문사 운영을 공익 재단에 맡긴다’는 공약을 지키지 않은 것이 뒤늦게 드러났다. 허 전 회장은 지난 2008년 12월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에 “선처해준다면 500억 원의 자산 가치를 가진 함평다이너스티 골프장과 광주일보를 지역사회에 헌납하겠다”며 “이곡문화재단에 지분을 모두 기부하겠다는 약정서를 제출했다”고 밝혔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다.
앞서 지난 2006년에는 천주교 광주교구의 가톨릭 성지조성 사업에 300억 원을 기부하기로 했다가 기부금을 돌려받기도 했다. 허 전 회장은 기증서를 전달하고 두 차례에 걸쳐 150억 원을 기부해 항소심에서 감형 등 정상 참작혜택을 받았으나 2010년 기부의사를 철회하고 이미 투입된 설계비용 22억 원을 제외한 128억 원을 돌려받았다. 광주대교구는 대주건설이 재정상 어려움에 봉착해 기부금을 돌려줬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허 전 회장이 기부금을 돌려받은 지 1년도 더 지난 2010년 1월 판결을 내리면서 허 전 회장이 횡령한 돈 대부분을 개인이 사용하지 않고 천주교 성당에 건축비용으로 기부한 점이나 사회복지 활동을 펼친 점을 참작해 황제노역 논란이 된 일당 5억 원 노역형을 선고했다.

교도소 나가는 길도 황제
허 전 회장은 3월26일 귀국 후 처음으로 광주지검에서 소환조사를 받았다. 5시간30분여 동안의 조사를 마친 허 전 회장은 교도소로 돌아가, 간단한 출소 절차를 마친 뒤 귀가했다. 이 과정에서 유치 당시 맡겼던 영치금과 신분증, 복용하던 약 등을 다시 찾아갔다고 교도소 측은 설명했다. 귀가에는 가족 1명과 운전기사가 동행했는데 가족은 인계서를 작성한 뒤 교도소 내까지 타고 온 SUV 차량에 허 전 회장을 승차시켰으며 해당 차량은 오후 10시쯤 취재진을 피해 교도소 문을 빠져 나갔다.
당시 수십여 명의 취재진이 교도소를 나오는 허 전 회장을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으나 허 전 회장이 빠져나간 지 10여 분이 지나서야 교도소 관계자로부터 출소 사실을 전달받았다. 이에 가족 차량을 구내에 입장시킨 것은 특혜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고, 광주교도소 측은 “통상적인 일”이라며 해명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가족 차량을 출입시켜 허 전 회장을 출소시킨 것은 부적절한 업무처리로 판단, 4월2일 광주교도소장, 부소장 등 3명을 경고조치 했다.

대법원 ‘황제노역’ 제도 개선 착수
허 전 회장에게 항소심에서 ‘황제노역’ 판결을 내린 장병우 광주지법원장이 “저의 불찰로 인한 국민 여러분의 질책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장 지법원장의 사표가 받아들여진 가운데 대법원이 지역법관(향판) 제도를 전면 개선하기로 했다.
장 지법원장은 1985년 광주지법에 부임한 후 198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순천지원에서 근무한 것을 빼면 대부분 광주 지역에서 근무한 전통적인 ‘향판’에 속한다. 대법원은 법관 인력수급 상황 등을 고려해 지역법관 제도를 폐지하기보다는 기존 제도를 유지하면서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개선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4월2일 밝혔다.
이에 따라 ▲상위 보직으로 보임되는 경우에 다른 지역으로 전보하는 방안 ▲지역법관의 임기를 7~8년으로 정하고 임기 만료 시에는 갱신 신청에 따라 허가를 갱신하는 방안 ▲지역법관 중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기 적절하지 않은 법관에 대해서는 허가를 취소하고 다른 지역으로 전보하는 방안 등을 검토한 뒤 구체적 개선안을 내놓을 전망이다.
또 환형유치제도(유치장 노역제도)와 관련해서는 1억 원 이상의 고액벌금을 선고할 때는 노역 일당을 원칙적으로 1,000분의 1로 정하고 유치기간은 단계별로 하한선을 정하는 내용의 개선안을 내놓은 바 있다. 개선안에 따르면 벌금 1억 원을 기준으로 그 이하일 때는 노역 일당 10만 원으로 통일하고 그 이상일 땐 벌금의 1,000분의 1로 정하게 된다. 또한 고액벌금의 유치기간 하한 기준은 벌금 1억 원~5억 원 미만 300일, 5억 원~50억 원 미만 500일, 50억 원~100억 원 700일, 100억 원 이상 900일로 정했다. 현행 형법은 벌금의 경우 노역장 유치 기간을 3년 이하로만 규정하고 있다.
조세포탈은 국가 경제 기반을 뒤흔드는 위중한 범죄다. 그럼에도 법의 허점을 노려 벌금을 탕감 받고 호화생활을 누린 허 전 회장은 물론 탈세에 대해 일벌백계해야할 검찰마저 유례없는 봐주기 판결로 국민적 분노를 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냐’는 비난이 빗발치는 가운데 결국 허 전 회장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광주 시민을 비롯한 전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 통렬히 반성한다”며 “나와 가족들 모두는 가진 재산 중 현금화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서 벌금 미납을 해결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허 전 회장의 벌금 일부 납부와 대국민 사과가 그의 은닉재산 찾기에 주력하고 있는 검찰 조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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