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바다, 세월호 삼킨 진도 앞바다의 비극
상태바
통곡의 바다, 세월호 삼킨 진도 앞바다의 비극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4.04.29 15: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총체적 부실이 낳은 인재(人災) “예견된 비극이었다”

지난 4월16일 오전 8시55분,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남서방 1.7마일 해상에서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6,852t급 여객선 세월호가 침수 중이라는 신고가 해경에 접수됐다. 당시 해경은 헬기 1대와 경비정 20척을 현장에 투입해 구조에 나섰다. 하지만 4월23일 현재 476명 가운데 174명 구조라는 쓰디 쓴 결과만을 낳은 채 세월(SEWOL)호는 차디찬 바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지금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 추측이 되니까 마음이 굉장히 아프죠.”

 
전재영(53) 씨는 며칠째 텔레비전 앞을 떠날 수가 없다. 11년 전 겨울 대구에서 발생한 지하철 참사와 너무나도 유사한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 씨는 이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었다. 전 씨는 다른 방송을 보다가도 구조 현황이 궁금해 채널을 계속 돌려보고 있다. 들려오는 소식에 안타까운 한편 화도 난다. 상당한 시간 시간이 지난 지금도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
19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딸을 잃은 신모(62·여) 씨는 요즘 세월호 관련 소식을 접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십수년 전 그 날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신 씨는 되도록이면 나쁜 소식을 접하지 않으려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켜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세월호 관련 얘기를 하니 어쩔 수 없이 듣게 된다.
신 씨는 “옛날 딸 생각이 나서 너무 힘들다”며 “실종자 가족이나 유족을 잘 치유해줄 수 있는 정부 정책이나 제도적 뒷받침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참사로 온 나라가 침통하다. 차가운 바다에 여객선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수일이 지났지만 연이은 비보에 국민들은 슬픔을 채 지울 날이 없다. 더욱이 수백 명의 승객들을 가라앉는 배에 놔둔 채 먼저 배를 탈출한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의 비겁하고 무책임한 행태에 온 나라는 슬픔을 넘어 분노까지 차올랐다.

긴박했던 순간,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쳤다
16일 오전 8시50분께, 인천항에서 제주도로 출발한 6,852t급 여객선 세월호 4층 한 객실에 타고 있던 이란성 쌍둥이 정대진·정복진(17) 형제는 배가 잠시 옆으로 기우는 느낌을 받았다. 3박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에 나선 쌍둥이 형제는 설레는 마음에 ‘파도에 배가 흔들린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10여분 뒤 선내에는 ‘침착하게 구명조끼를 입어라.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게 된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는 방송이 퍼졌다. 그 순간, 배가 순식간에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와장창’하는 굉음과 함께 객실 안에 있던 옷장이나 집기들이 한쪽 방향으로 쓸려 내려갔다. 객실에 비치된 구명조끼를 입고 어렵게 복도로 나온 정 군 형제는 옆으로 기운 선체에 몸을 기댄 채 누웠다. 방송에서 알린 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버텼지만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배 안으로 바닷물이 흘러들어왔다. 바닷물은 1층, 2층, 3층을 차례로 집어 삼키더니 이윽고 정군 형제의 몸까지 덮쳤다. 그때서야 비로소 “움직여야 살겠다”고 느낀 쌍둥이 형제는 배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미 목까지 차버린 바닷물 때문에 유일한 방법은 물속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쌍둥이 형제는 출구가 보이는 곳까지 이동하기 위해 숨을 참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숨이 차면 다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깊게 숨을 들여 마신 뒤 또 다시 잠수했다. 바다는 차갑고 어둡고 무서웠다. 이들 형제는 출구라고 생각되는 곳까지 죽을힘을 다해 헤엄쳤다. 결국 두 형제는 10여 분만에 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들 손을 붙잡아 준 것은 고속 경비정을 타고 구조에 나선 해양 경찰이었다.
정 군은 “순식간에 배 안에 바닷물이 찼다”며 “방송에서 알린 대로 객실에만 있었던 친구들은 차마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 여객선에서 가장 먼저 구조된 허웅(51) 씨는 “현장에 공식 발표된 만큼 구조 인원이 오지 않았다”며 “처음에는 어선들만 잔뜩 있다”며 격분했다.
허 씨는 “갑자기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다”며 “처음에는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순식간에 배가 기울었다”며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던 방송을 믿고 멈춰선 승객들은 배 내부에서 다 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세월호에는 수학여행에 나선 안산 단원고 학생 324명과 교사 14명, 승무원 24명, 일반승객 등 476명이 탑승했다. 승객 대다수였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은 지난 4월15일 오후 8시30분께 인천항에서 3박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나 이날 낮 12시께 제주도 여객터미널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생들은 실종 또는 주검이 되어서 돌아와 추억의 수학여행을 채 마치지 못했다.

초기 대처 늦어 안타까운 상황 자초
세월호 침몰사고가 처음 목포해경 상황실에 접수된 것은 16일 오전 8시48분. 전남도소방본부에 신고가 접수된 이후 6분만이다. 해양경찰청 구조본부가 가동한 것은 그로부터 22분 후이고 해양선박사고 위기대응 매뉴얼의 ‘심각’ 단계가 발령된 것은 1시간여가 지난 뒤다. 더구나 사고 초기 수학여행 고교생 전원을 구조했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전체 구조자의 숫자도 200여 명이나 많게 집계하는 등 정부의 안이한 대처가 더해졌다. 실제 위험 상황보다 소홀히 여겨 초기 대응에 차질을 빚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뒤늦게 헬기와 경비정, 어선까지 총동원돼 구조작업에 나섰지만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배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로 뛰어들거나 난간에 매달린 탑승객 일부를 구해냈을 뿐 선체 내부에 갇힌 어린 학생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선원들의 대처도 문제다. 선장을 비롯해 상당수 선원들은 탑승객들이 탈출하기 이전에 이미 세월호를 빠져 나와 1차 구조인원에 포함됐다. 현행 선원법에는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선장은 인명·선박·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외면했다.
바닷물이 들어차는데도 ‘가만히 있어라’라고 10여 차례 되풀이 된 선내 안내방송도 화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통곡의 바다, 진도 앞바다에 잠겨 있는 세월호의 침몰은 결국 정부당국과 선사의 안이한 초기 대처가 큰 몫을 했다는 게 중론이다.

신고 접수 1시간 전 이상 징후 감지

 
4월16일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는 신고 1시간여 전 통신이 두절되는 등 이상 징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작업도 관계 당국이 이상 기미를 감지한지 1시간여 만에 이뤄졌다.
수학여행 길에 오른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 등을 실은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북쪽 20㎞ 해상에서 침몰하고 있다는 최초 신고는 전남소방본부로 이날 오전 8시52분께 접수됐다.
하지만 신고자나 내용이 불명확해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다가 6분 뒤인 오전 8시58분께 목포해경 상황실로 정식 신고가 들어왔다. 해경은 신고 접수를 받고 이날 오전 9시10분께 구조본부를 가동했다. 그러나 이 시각보다 1시간여 전에 이미 관계당국과 연락이 끊긴 것으로 전해졌다. 제주해경은 이날 오전 8시10분께 안산단원고교로 전화해 “오전 8시 입항 예정인 여객선이 도착하지 않고 있다. 여객선과의 연락도 두절됐다”고 했다는 게 단원고 측의 설명이다.
해경과 통화한 이 학교 교사는 “단순히 선박과 연락이 안 되는 것으로만 판단했다”며 인솔 교사의 전화번호만 해경에 넘겼다. 이후 어떤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여객선의 침몰 사실은 여객선에 탑승한 이 학교 강민규 교감이 이날 오전 8시50분과 55분께 두 차례 학교로 전화하면서 전해졌다. 강 교감은 “배가 침수되고 있다”고 했다. 강 교감이 학교에 있던 김진명 교장에게 직접 보고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분 뒤인 이날 오전 9시16분께. 김 교장이 이런 상황을 14분 뒤인 이날 오전 9시30분에서야 교육청에 보고했다. 이 때문에 선박의 신고와 학교 등의 대응이 빨랐더라면 구조작업이 좀 더 일찍 이뤄질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월호, 처음부터 문제 많은 배였다
‘청해진 해운 특혜, 불법개조 등 선박 내부 문제 의혹’도 연이어 드러나고 있다.
청해진 해운이 침몰 여객선 세월호를 국내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산업은행으로부터 특혜성 대출을 받았다는 의혹과 함께 이 회사는 이미 일본에서 18년 동안 운항된 노후선박을 몇 개월만에 수리해 수명을 10년까지 늘린 것이 드러났다.
2년 전 일본에서 들여온 세월호는 배의 굴뚝인 연돌 부분 뒤쪽을 개조하며 무리하게 객실을 증축해 무게가 239t 가량 늘었고 정원도 116명이 함께 증가해 당초 840명에서 956명이 돼 사고 직후 급속도로 침몰이 진행된데 일부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수사기관은 추측하고 있다. 세월호의 출항 당시 배의 무게는 3,031t으로 선사 측에서 밝힌 화물과 승객 무게 3,638t을 합치면 모두 6,669t으로 제한 중량인 6,825t을 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배의 연료와 평형수 등의 무게가 포함돼 있지 않아 세월호 연료인 벙커C유와 내부 발전용 경유만 해도 약 160t으로 평형수를 제하더라도 6,829t의 제한 중량을 초과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도 배가 회전할 때 균형을 잡아주는 배양 옆의 스태빌라이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를 들며 제한 중량을 초과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배양 옆에 조그맣게 날개 모양으로 붙어있는 스태빌라이저는 선박이 회전할 때 작동을 하지 않아 배가 기울어 넘어갔다는 추측에 무게가 실리면서 오작동의 원인에는 화물의 과적이나 급회전이 포함돼 있어 이로 인해 배가 기울어 침몰한 것이 아니냐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 상태다.
선박회사 측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어 해결의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사건의 규모가 큰 만큼 많은 의혹과 루머도 온라인을 뒤덮고 있다.
‘정부와 정보기관 자작극 의혹’, ‘세월호, 잠수함과 충돌했다’, ‘실종자 수색 당시 작업 방해했다’, ‘한미 연합훈련으로 세월호 항로 변경됐다’는 등 유언비어가 쏟아져 국민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세월호는 국내 최대 크루즈 선박이다. 길이 146m, 폭 22m의 6,835t급으로 국내 최대 크루즈 선박 중 하나로 최대 승선인원은 921명이며, 차량 220대를 실을 수 있다. 21노트의 속도로 인천과 제주 간 265마일을 운항한다. 13시간30분이 소요된다. 세월호는 인천~제주간 항로로 작년 1월15일 취항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6시30분 인천항을 출발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제주에서 출항한다. 기존 오하마나호와 더불어 수도권에서 배를 이용해 제주도로 가는 유이한 배편이다. 세월호는 20t 컨테이너 152개를 동시 적재할 수 있어 관광객 수송 외에도 제주산 농산물도 운송도 담당했다.

총체적 부실이 낳은 인재(人災)

 
이번 참사를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16일 진도해역 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긴박했던 현장 구조상황이 생존자들에 의해 전해지면서 초기 대처능력이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이번 참사는 재해(災害)가 아닌 인재(人災)인 만큼 초기 수습 과정에서의 잘못된 대처로 많은 희생자를 낸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수백 명의 탑승객을 태운 여객선이 눈앞에서 가라앉고 있는데도 손을 쓸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진데 대해 재난대응시스템이나 위기대응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한 것인지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숱한 의혹들이 속속 베일을 벗으면서 ‘세월호 침몰=예견된 인재’로 압축되고 있다.
해경이 새정치민주연합 김영록 의원에게 제출한 ‘농무기 대비 여객선 특별점검 결과’ 자료에 따르면 세월호는 총 5건의 불량사실이 적발됐다. 점검은 지난 2월에 실시됐고 구명뗏목 비상조명등 관리 불량, 화재 경보기 작동법 숙지 불량, 비상발전기 연료유 레벨게이지 불량, 객실 내 방화문 작동 불량 등이 지적됐다. 또 이번 참사 당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구명뗏목에 대해 평소 안전관리가 부실했으며 특히 화재경보기 작동법 숙지 상태는 ‘출항 전 점검사항’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분야여서 평소 세월호 선사의 안전불감증을 여실히 드러냈다.
신참 항해사가 위험 항로에서 첫 운항지휘를 한 것을 비롯해 대타 선장, 선체 결함, 노후선박 증축, 선원들의 도덕적 해이, 형식적인 입·출항과 안전교육, 허술한 초동 대처 등이 속속 밝혀지면서 예견된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
풀리지 않는 의혹도 적잖다. 왜 무리한 항로변경, 즉 과잉회전으로 급선회를 했는지, 해경의 대피 지시를 무시하고 “객실에 머물라”고 방송했는지, 6,000t급 대형 여객선이 어떻게 순식간에 뒤집혔는지 등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 있다. 여객선이 출항할 당시 인천항과 앞바다에는 안개가 심한 상태였으며 이 때문에 여객선 출항 시간이 연기되기도 했다.

선사관계자 등 30∼40명 출국금지
검·경도 관련자 수십 명을 출국금지 시키고 또 다른 키(key)를 쥐고 있는 원래 선장을 소환키로 하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검·경 합수부는 이날 선장 이준석(69)씨 등 구속된 피의자 3명을 포함, 승무원과 선사관계자 등 10여 명을 소환조사하는 한편, 선주 등 중요 참고인 30∼40명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했다. 또 핵심 관계자들의 휴대폰 통화기록을 확인하는 한편 사고 당시 승무원들의 행적이 담겨있을 가능성이 있는 카카오톡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있다.
생존한 일부 승무원들은 비상상황에 대비한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10일마다 소화 훈련과 인명 구조, 퇴선, 방수 등을, 3개월마다 비상 조타훈련을, 6개월마다 충돌, 좌초, 추진기관 고장, 악천후 대비 등 선체손상 대처 훈련과 함께 해상 추락 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합수부는 변침 원인과 항로 결정 등의 여러 의혹을 해소하는데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원래 선장 신모(47) 씨에게도 출석을 통보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일 체육관 바닥에서 밤을 지샌 실종자 가족들은 이날 “정부의 갈지(之)자 행보와 무기력한 대응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거리로 나섰고, 해외 언론은 한국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과 인재(人災) 가능성을 앞다퉈 지적하고 나섰다.
정부 재난관리에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 “우리 아이를 살려 달라”며 서울로 향했다가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항의의 뜻으로 국무총리와 3시간동안 대치하기도 했다.
미국 CNN, 영국 BBC, 뉴욕타임즈, 중국 CCTV 등 유력 해외 언론도 한국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과 인재 가능성을 앞다퉈 타전했다.

오열과 탄식 속에 치러진 학생 희생자 첫 장례
이런 가운데 경기도 안산에서는 단원고에서 학생 희생자 첫 장례가 치러졌다. 학생과 스승 6명의 장례가 오열 속에 치러졌다. 오전 5시 희생 학생 중 처음으로 장모(17)군의 발인식이 있었고 1시간 뒤에는 같은 반 친구인 안모(17)군이 뒤따라 이별을 고했다.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구하고 끝내 변을 당했던 남모(35) 교사도 제자들과 함께 떠났다. 2학년9반 담임 김모(26·여) 교사의 아버지는 사고 당일(16일)이 생일이었던 딸을 차마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운구 차량을 부여잡고 딸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동안산병원과 온누리병원 장례식장에서도 유족과 친치, 친구들의 눈물 속에 2학년3반 전모(17)양과 2학년4반 김모(17) 군의 장례식이 진행됐다.
지난 4월16일 바다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는 이미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바다 위에 열기구처럼 떠 있는 2개의 부표만이 그 날의 비극을 알리고 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실종자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조금씩 사라지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도 점차 지쳐가고 있다. 차가운 바다 속에 떨고 있을 자식 생각에 그저 멍하니 바다만 바라 볼 뿐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