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역사
![]() | ||
▲ 사망자 191(무연고자 12기 포함)명, 행불자 64명, 상이·연행, 구금자가 3,642명 등 총 4,362명(피해자별 총괄집계 기준)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통계일 뿐 그 희생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을 곤고히 하고 반대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일환으로 계엄령을 선포·확대하기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광주소요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구속하였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군부 집권 만행에 시민들은 분노하였으며, 5월 18일 우리나라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피 토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계엄사의 진압부대 투입명령에 따라 7공수여단은 18일 새벽 1시 경 33대대를 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각 배치했다. 각 대학에 배치된 계엄군들은 학내에서 횃불시위를 한 후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잔류학생들을 체포했다.
18일 오전 10시 전남대와 조선대 정문 앞에는 휴교령을 예상했던 학생회의 결정에 응하여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김대중 씨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금남로와 도청 앞 분수대는 서울의 중앙청 앞과 같이 상징적인 장소였다. 지리적으로 광주의 중심지이며, 무엇보다 지방행정의 심장부인 은행, 관공서, 사무실, YWCA, YMCA, 카톨릭센터, 전일방송 등 주요 기관과 시설이 집약되어 있었고, 모든 시내버스와 차량이 이곳을 지나야 함으로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삽시간에 광주시에 파급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까지 행진한 시위대열에 대해 경찰은 16일까지의 시위진압 때와는 달리 흩어지는 학생들을 골목까지 쫓아가 곤봉으로 구타하는 등 극단의 폭력을 행사하며 분위기는 살벌한 분위기로 반전되어갔다. 대학생들은 충장로, 한일은행 앞, 광주공원 곳곳에서 계엄군의 만행과 폭력을 알리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학생시위 과잉진압이 도화선이 되어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함으로써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피로 얼룩진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살육과 폭력이 난무한 잔혹한 5월
계엄사령부는 광주 통행금지 시간이 9시로 당겨졌다고 발표하고 11여 단의 병력을 증파하였다. 시민들은 투입된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항의하여 임동, 누문동 경찰서에 방화를 하며 저항운동을 펼쳐 나갔다. 5월 19일 시위대가 5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시민·학생들의 시위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거세지자 그 진압형태가 더욱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변해갔다. 카톨릭센타 앞에서 30여 명의 남녀들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은 이어져 갔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 여 명이 사망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고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계엄군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시민들이 쓰러져갔고 시민군은 각 지에서 획득한 무기들로 시가전을 지속해 갔다. 5월 22일 도청과 금남로에 시민들은 집결하였고,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은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7개 항의 수습 안을 전달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는 “광주지역은 치안 부재상태”라며 광주 시민들의 항거를 폭도들이 국가안전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매도 방송했다.
분노한 시민들과 광기어린 계엄군들의 총격전과 희생은 27일 마지막 항거가 있기까지 계속되었으며, 탱크까지 동원한 계엄군은 시민군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계엄군이 광주 전 지역을 폐쇄하고 총, 칼을 앞세워 도청과 시내전역을 장악한 후에야 마침내 피로 물든 역사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었다. 살육과 폭력이 난무했던 참으로 참혹한 5월이었다.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망자 191(무연고자 12기 포함)명, 행불자 64명, 상이·연행, 구금자가 3,642명 등 총 4,362명(피해자별 총괄집계 기준)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통계일 뿐 수사기간 중의 불법연행자 및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까지 생각한다면 그 희생은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
![]() | ||
▲ 광기어린 계엄군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시민들이 쓰러져갔고,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 속에 죽어간 생명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를 잃은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으며, 피로 얼룩진 빛고을 광주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
다시 부르는 5월의 노래
광주민주화운동은 당시엔 패배한 항쟁이었으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다.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 속에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민주주의 부활의 영웅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 | ||
▲ 자유민주주의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군부 집권 만행에 시민들은 분노하였으며, 5월 18일 우리나라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피 토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
많은 희생의 피를 흘려야 했던 80년 5월 광주.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앞당기고 민주화의 발전에 금자탑을 세운 많은 이들의 숭고한 죽음이 있었던 빛고을 광주의 그 날을 아로새겨 인류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올해로 28주년을 맞는 5월의 함성과 정신은 국민의 가슴에 남아 흐르며, 사회전반에서 건강한 힘으로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