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미국, 일방주의 외교 ‘적신호’ 예고
세계 각국 반미주의 확산, 미국 제외한 연합도 활발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의 자산을 동결한다” 벨로루시 정부가 지난 6월 26일 국영TV를 통해 발표한 중대성명의 내용이다. 미국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로루시 대통령의 미국 자산을 동결한 데 반발한 조치다. 부시 대통령이나 라이스 장관이 벨로루시에 자산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는 벨로루시의 의지의 표현이다. 부시 대통령은 6월 19일 루카셴코 대통령과 국영 TV 및 라디오 방송 등 벨로루시의 개인 및 기관 10군데에 대해 자산을 동결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동결되는 자산은 벨로루시 정부기관과 정부 고위인사 등의 미국 자산 또는 미국 금융기관이 압류 중인 자산이다.
1994년부터 벨로루시를 통치해온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 3월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던 대통령선거를 통해 세 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미국은 그동안 벨로루시를 인권탄압과 부정부패 등을 문제 삼아 “유럽의 마지막 독재국가”라고 비판해왔다. 실제로 벨로루시는 국가가 모든 부문을 철저히 통제하는 공산주의식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의회에는 야당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보안위원회(KGB)라는 비밀경찰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3월 대선에서 우크라이나 등 다른 옛 소련 공화국들처럼 ‘색깔 혁명’을 통해 벨로루시에도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 루카셴코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온 민주화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고 조직적인 선거부정을 통해 82.6%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압승했다. 미국은 “선거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각종 제재조치를 동원, 벨로루시를 압박했다.
하지만 미국이 벨로루시 제재에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루카셴코 대통령의 미국 자산을 동결한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 조치에 불과했다. 벨로루시도 이를 알아차린 듯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 벨로루시의 ‘보복’은 일종의 소극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재 세계유일 초강대국이라는 말을 듣는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인구 980만 명밖에 안 되는 벨로루시는 이런 코미디 같은 보복이 아닌 실질적인 위협을 미국에 가할 수도 있다. 바로 “미국의 위협이 계속되면 전술 핵무기를 배치할 수도 있다”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경고다. 만약 벨로루시에 전술핵무기가 배치된다면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략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벨로루시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지만 러시아와의 재통합도 고려하고 있다. 전략요충지에 있는 벨로루시가 전술 핵으로 무장하고 러시아에 다시 편입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타격일 수밖에 없다. 벨로루시라는 소국에 ‘거대한 제국’ 미국이 큰코다칠 수도 있다.
민주주의 확산정책 역풍 맞아
부시 행정부의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 정책이 세계의 독재국가들을 겨냥하고 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이렇듯 역풍을 맞고 있다.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 역시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지난 1월부터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있는 이익대표부 건물에 전광판을 세우고 세계 뉴스와 함께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일부와 쿠바도 서명한 세계인권선언문 문구 등을 내보냈다. 쿠바 정부의 언론과 인권탄압을 비판하면서 쿠바 국민에게 자유와 민주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미국의 조치에 대해 쿠바 정부는 미국 이익대표부 건물 맞은편에 반미 선전문구를 담은 대형 전광판을 설치했다. 이 전광판은 ‘누구도 동의 없이 어떤 사람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연설 문구를 내보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연설을 통해 “그들은 이미 조그만 전광판을 가동했는데 바퀴벌레가 용감한 법”이라고 미국을 비꼬았다. 쿠바 정부는 또 미국 이익대표부 앞에 흰 별이 그려진 138개의 검은 깃발을 게양해 이익대표부의 전광판을 가렸다. 이와 함께 전기와 수돗물 공급도 가끔씩 끊는 등 미국 외교관들을 괴롭히고 있다.
쿠바 정부의 이런 조치는 미국과의 ‘의지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카스트로 의장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반미 시위가 있을 때면 언제나 앞장서서 행진하는 등 결연한 태도를 보여 왔다. 미국과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 의장이 집권한 뒤 긴장관계가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도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태다. 8월에 80세가 되는 카스트로 의장은 말 그대로 반미의 상징적 인물이다. 쿠바 국민도 대부분 카스트로 의장의 투철한 반미 정신을 추종해왔다.
미국은 카스트로 의장 이후의 쿠바 체제를 구상하며 쿠바 민주화 추진 기금 8,000만달러를 조성했다. 이 자금은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2003년 설립된 ‘자유쿠바 지원위원회’가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 체제를 구상하며 마련한 계획 중 하나다. 이 위원회는 이 자금을 카스트로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 야당세력 지원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미국의 이런 시도가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쿠바의 40년 카스트로 체제는 아직도 견고하다.
미국은 ‘라이벌이 없는 최강자’라는 점에서 종종 로마제국에 비유된다. 2000년 전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는 이제 ‘미국에 의한 평화(Pax America)’로 바뀌었다. 로마가 그랬듯이 미국은 누구도 도전하기 어려운 초강대국으로 세계의 질서를 만들고 있다. 소련이 무너지고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이후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서 국제사회에 특별한 권리를 요구해왔다.
군주제로 통치된 로마와는 달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국이 주장해온 가치는 바로 민주주의다. 특히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국의 가치를 강요하는 독선적 정책을 보여 왔다. 하지만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학 케네디 행정대학원 원장의 지적처럼 미국의 일방주의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초래했다.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가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이를 타국에 강요하거나 위협한다면 오히려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기준이 이중적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부시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주의 확산’을 국정의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려면 ‘폭정의 전초기지들(outposts of tyranny)’을 민주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용어는 라이스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인준 청문회(2005년 1월 18일)에서 처음 사용했다. 라이스 장관이 규정한 ‘폭정의 전초기지’는 국민을 억압하는 반 민주국가를 일컫는다. 이에 속하는 국가는 쿠바, 미얀마, 북한, 이란, 벨로루시, 짐바브웨 등 6개국이다. 이들 중 북한과 이란은 부시 대통령이 2002년 연두교서에서 규정한 ‘악의 축’에 포함된다.
중국, 러시아의 미국 견제
부시 행정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세계적 미군 재배치를 추진했다. 해외 주둔 미군의 재배치는 미국이 새로운 동맹국들과 관계를 강화한다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의 창출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미군 재배치에 따른 군사전략은 러시아, 중국, 이란을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흑해, 중앙아시아 및 중국 국경 부근에 이르는 모든 곳에 친미 정권을 들어서게 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하는 등 에너지 통제권을 강화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안보역할 확대와 호주와의 동맹강화를 통한 중국에 대한 견제 전략을 추진했다.
미국의 이같은 거대한 전략은 부시 1기 행정부에서 한동안 차질 없이 진행됐다. 하지만 미국은 이라크라는 늪에 빠짐으로써 유일 초강대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또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고유가를 발판으로 옛 소련의 영화를 부활시키려는 러시아의 야심에 미국은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지역강국으로 떠오른 인도, 이란, 브라질, 남아공 등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미국 견제는 긴장의 폭을 확대시켰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월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양국 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심화시키기로 합의했다. 두 정상은 회담에서 세계의 다극화와 국제관계의 민주화를 위해 양국이 유엔과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국제 및 지역 기구에서 긴밀히 협력키로 했다. 양국이 새 동맹관계를 맺은 까닭은 옛 소련 공화국들의 민주화를 통한 러시아의 영향력 축소와 미·일 군사동맹을 주축으로 한 중국 포위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합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양국은 이미 지난해 7월 ‘21세기 국제질서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양국은 공동성명에서 ‘미국’이란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찬성하지 않으며,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화 모델’ 이외에도 발전 모델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셈이다. 양국은 또 군사와 에너지 등 전략적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등 사실상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양국의 협력은 반미 국가들과의 연대로 확대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보유하고 있는 양국은 북한과 이란 문제에서 보듯이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 양국의 동맹관계가 어느 수준까지 발전할지는 아직 점치기 성급하지만, 현 단계에서도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특히 중국이 미국의 강력한 도전자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과 에너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반미 정서를 틈타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자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국가들의 정치 체제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면서 국제사회에서 반미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화교들이 경제권을 장악한 동남아 각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원심력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도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중국은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현대화를 실현, 명실공히 미국과 맞선다는 전략이다.
미국은 이에 따라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국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 일본, 인도를 중심으로 한 ‘빅4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지구적 연합 체제(global coalition system)’ 구축을 말한다. 이들 4개국은 모두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 아닌 연해(offshore)국가라는 지정학적 공통점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가치적 연대를 구성할 수 있다.
수렁에 빠진 미국 '영향력 약화'
미국이 이라크전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 미국 주도를 벗어난 새 국제 질서 판짜기의 노력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미국이 막대한 전비를 쏟아 붓고 2,000명이 넘는 미군 목숨을 희생했지만 이라크 재건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오히려 미국은 테러예방 명목으로 비밀감옥을 만들고 불법 도청을 감행,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렸다.
미국이 스스로 인기 없는 나라가 되어가는 동안 반미목소리는 한결 높아졌다. 특히 ‘안마당’ 라틴 아메리카에서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내년까지 콜롬비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좌파 정권이 집권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희망사항과는 정반대다.
미국은 인기가 떨어지자 발언권도 낮아졌다. 핵에너지를 가지려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북핵문제가 해결 실마리를 찾는 듯하더니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핵을 보유하겠다고 나섰다. 심지어 아프리카 짐바브웨까지 핵 보유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 맞설만한 초강대국이 아직 등장하지 못하자 세계 여러 나라들은 주변국과 힘을 합쳐 주도세력 도약을 꿈꾸고 있다.
지역통합에 가장 앞선 곳은 유럽이다. 유럽연합(EU)은 5월 중·동부 유럽 10개국을 새로 회원으로 받아들여 25개국, 4억6,000만 명을 회원으로 가진 공동체로 거듭났다. 교역비중으로는 전세계 40%, 국내총생산(GDP) 비중으로는 25%를 차지한다.
아시아의 발걸음도 바쁘다. 아세안과 한·중·일 3국은 12월,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 논의를 진전시키자고 합의했다. 여기에 인도, 호주, 뉴질랜드까지 가세하면 전세계 인구의 절반(31억명)을 아우르는 지역공동체가 탄생한다.
라틴아메리카도 힘을 뭉쳐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저지했고 아프리카도 아프리카 연합(AU) 등을 통해 제힘으로 내전과 기아에서 벗어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 질서의 모색 움직임이 왕성한 가운데서도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여전히 깊다. 런던과 발리 테러, 프랑스와 호주 소요사태는 모두 이슬람과 관련돼 있다.
런던테러는 범인이 아랍계지만 영국 시민으로 밝혀져 세계를 경악케 했고 선진사회라는 프랑스와 호주의 소요 사태도 이슬람을 이방인으로 방치한 사회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관용과 화합의 새 국면이 열릴지, 일부 국가에서처럼 오히려 우경화 움직임이 강해질지 아직은 불투명한 상태다.
세계 각국 반미주의 확산, 미국 제외한 연합도 활발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의 자산을 동결한다” 벨로루시 정부가 지난 6월 26일 국영TV를 통해 발표한 중대성명의 내용이다. 미국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로루시 대통령의 미국 자산을 동결한 데 반발한 조치다. 부시 대통령이나 라이스 장관이 벨로루시에 자산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는 벨로루시의 의지의 표현이다. 부시 대통령은 6월 19일 루카셴코 대통령과 국영 TV 및 라디오 방송 등 벨로루시의 개인 및 기관 10군데에 대해 자산을 동결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동결되는 자산은 벨로루시 정부기관과 정부 고위인사 등의 미국 자산 또는 미국 금융기관이 압류 중인 자산이다.
1994년부터 벨로루시를 통치해온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 3월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던 대통령선거를 통해 세 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미국은 그동안 벨로루시를 인권탄압과 부정부패 등을 문제 삼아 “유럽의 마지막 독재국가”라고 비판해왔다. 실제로 벨로루시는 국가가 모든 부문을 철저히 통제하는 공산주의식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의회에는 야당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보안위원회(KGB)라는 비밀경찰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3월 대선에서 우크라이나 등 다른 옛 소련 공화국들처럼 ‘색깔 혁명’을 통해 벨로루시에도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 루카셴코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온 민주화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고 조직적인 선거부정을 통해 82.6%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압승했다. 미국은 “선거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각종 제재조치를 동원, 벨로루시를 압박했다.
하지만 미국이 벨로루시 제재에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루카셴코 대통령의 미국 자산을 동결한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 조치에 불과했다. 벨로루시도 이를 알아차린 듯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 벨로루시의 ‘보복’은 일종의 소극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재 세계유일 초강대국이라는 말을 듣는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인구 980만 명밖에 안 되는 벨로루시는 이런 코미디 같은 보복이 아닌 실질적인 위협을 미국에 가할 수도 있다. 바로 “미국의 위협이 계속되면 전술 핵무기를 배치할 수도 있다”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경고다. 만약 벨로루시에 전술핵무기가 배치된다면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략을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벨로루시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지만 러시아와의 재통합도 고려하고 있다. 전략요충지에 있는 벨로루시가 전술 핵으로 무장하고 러시아에 다시 편입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타격일 수밖에 없다. 벨로루시라는 소국에 ‘거대한 제국’ 미국이 큰코다칠 수도 있다.
민주주의 확산정책 역풍 맞아
부시 행정부의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 정책이 세계의 독재국가들을 겨냥하고 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이렇듯 역풍을 맞고 있다.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 역시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지난 1월부터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있는 이익대표부 건물에 전광판을 세우고 세계 뉴스와 함께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일부와 쿠바도 서명한 세계인권선언문 문구 등을 내보냈다. 쿠바 정부의 언론과 인권탄압을 비판하면서 쿠바 국민에게 자유와 민주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미국의 조치에 대해 쿠바 정부는 미국 이익대표부 건물 맞은편에 반미 선전문구를 담은 대형 전광판을 설치했다. 이 전광판은 ‘누구도 동의 없이 어떤 사람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연설 문구를 내보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연설을 통해 “그들은 이미 조그만 전광판을 가동했는데 바퀴벌레가 용감한 법”이라고 미국을 비꼬았다. 쿠바 정부는 또 미국 이익대표부 앞에 흰 별이 그려진 138개의 검은 깃발을 게양해 이익대표부의 전광판을 가렸다. 이와 함께 전기와 수돗물 공급도 가끔씩 끊는 등 미국 외교관들을 괴롭히고 있다.
쿠바 정부의 이런 조치는 미국과의 ‘의지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카스트로 의장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반미 시위가 있을 때면 언제나 앞장서서 행진하는 등 결연한 태도를 보여 왔다. 미국과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 의장이 집권한 뒤 긴장관계가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도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태다. 8월에 80세가 되는 카스트로 의장은 말 그대로 반미의 상징적 인물이다. 쿠바 국민도 대부분 카스트로 의장의 투철한 반미 정신을 추종해왔다.
미국은 카스트로 의장 이후의 쿠바 체제를 구상하며 쿠바 민주화 추진 기금 8,000만달러를 조성했다. 이 자금은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2003년 설립된 ‘자유쿠바 지원위원회’가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 체제를 구상하며 마련한 계획 중 하나다. 이 위원회는 이 자금을 카스트로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 야당세력 지원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미국의 이런 시도가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쿠바의 40년 카스트로 체제는 아직도 견고하다.
미국은 ‘라이벌이 없는 최강자’라는 점에서 종종 로마제국에 비유된다. 2000년 전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는 이제 ‘미국에 의한 평화(Pax America)’로 바뀌었다. 로마가 그랬듯이 미국은 누구도 도전하기 어려운 초강대국으로 세계의 질서를 만들고 있다. 소련이 무너지고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이후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서 국제사회에 특별한 권리를 요구해왔다.
군주제로 통치된 로마와는 달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국이 주장해온 가치는 바로 민주주의다. 특히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국의 가치를 강요하는 독선적 정책을 보여 왔다. 하지만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학 케네디 행정대학원 원장의 지적처럼 미국의 일방주의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초래했다.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가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이를 타국에 강요하거나 위협한다면 오히려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기준이 이중적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부시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주의 확산’을 국정의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려면 ‘폭정의 전초기지들(outposts of tyranny)’을 민주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용어는 라이스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인준 청문회(2005년 1월 18일)에서 처음 사용했다. 라이스 장관이 규정한 ‘폭정의 전초기지’는 국민을 억압하는 반 민주국가를 일컫는다. 이에 속하는 국가는 쿠바, 미얀마, 북한, 이란, 벨로루시, 짐바브웨 등 6개국이다. 이들 중 북한과 이란은 부시 대통령이 2002년 연두교서에서 규정한 ‘악의 축’에 포함된다.
중국, 러시아의 미국 견제
부시 행정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세계적 미군 재배치를 추진했다. 해외 주둔 미군의 재배치는 미국이 새로운 동맹국들과 관계를 강화한다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의 창출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미군 재배치에 따른 군사전략은 러시아, 중국, 이란을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흑해, 중앙아시아 및 중국 국경 부근에 이르는 모든 곳에 친미 정권을 들어서게 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하는 등 에너지 통제권을 강화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안보역할 확대와 호주와의 동맹강화를 통한 중국에 대한 견제 전략을 추진했다.
미국의 이같은 거대한 전략은 부시 1기 행정부에서 한동안 차질 없이 진행됐다. 하지만 미국은 이라크라는 늪에 빠짐으로써 유일 초강대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또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고유가를 발판으로 옛 소련의 영화를 부활시키려는 러시아의 야심에 미국은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지역강국으로 떠오른 인도, 이란, 브라질, 남아공 등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미국 견제는 긴장의 폭을 확대시켰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월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양국 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심화시키기로 합의했다. 두 정상은 회담에서 세계의 다극화와 국제관계의 민주화를 위해 양국이 유엔과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국제 및 지역 기구에서 긴밀히 협력키로 했다. 양국이 새 동맹관계를 맺은 까닭은 옛 소련 공화국들의 민주화를 통한 러시아의 영향력 축소와 미·일 군사동맹을 주축으로 한 중국 포위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합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양국은 이미 지난해 7월 ‘21세기 국제질서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양국은 공동성명에서 ‘미국’이란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찬성하지 않으며,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화 모델’ 이외에도 발전 모델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셈이다. 양국은 또 군사와 에너지 등 전략적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등 사실상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양국의 협력은 반미 국가들과의 연대로 확대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보유하고 있는 양국은 북한과 이란 문제에서 보듯이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 양국의 동맹관계가 어느 수준까지 발전할지는 아직 점치기 성급하지만, 현 단계에서도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특히 중국이 미국의 강력한 도전자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과 에너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반미 정서를 틈타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자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국가들의 정치 체제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면서 국제사회에서 반미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화교들이 경제권을 장악한 동남아 각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원심력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도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중국은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현대화를 실현, 명실공히 미국과 맞선다는 전략이다.
미국은 이에 따라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국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 일본, 인도를 중심으로 한 ‘빅4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지구적 연합 체제(global coalition system)’ 구축을 말한다. 이들 4개국은 모두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 아닌 연해(offshore)국가라는 지정학적 공통점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가치적 연대를 구성할 수 있다.
수렁에 빠진 미국 '영향력 약화'
미국이 이라크전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 미국 주도를 벗어난 새 국제 질서 판짜기의 노력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미국이 막대한 전비를 쏟아 붓고 2,000명이 넘는 미군 목숨을 희생했지만 이라크 재건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오히려 미국은 테러예방 명목으로 비밀감옥을 만들고 불법 도청을 감행,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렸다.
미국이 스스로 인기 없는 나라가 되어가는 동안 반미목소리는 한결 높아졌다. 특히 ‘안마당’ 라틴 아메리카에서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내년까지 콜롬비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좌파 정권이 집권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희망사항과는 정반대다.
미국은 인기가 떨어지자 발언권도 낮아졌다. 핵에너지를 가지려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북핵문제가 해결 실마리를 찾는 듯하더니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핵을 보유하겠다고 나섰다. 심지어 아프리카 짐바브웨까지 핵 보유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 맞설만한 초강대국이 아직 등장하지 못하자 세계 여러 나라들은 주변국과 힘을 합쳐 주도세력 도약을 꿈꾸고 있다.
지역통합에 가장 앞선 곳은 유럽이다. 유럽연합(EU)은 5월 중·동부 유럽 10개국을 새로 회원으로 받아들여 25개국, 4억6,000만 명을 회원으로 가진 공동체로 거듭났다. 교역비중으로는 전세계 40%, 국내총생산(GDP) 비중으로는 25%를 차지한다.
아시아의 발걸음도 바쁘다. 아세안과 한·중·일 3국은 12월,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 논의를 진전시키자고 합의했다. 여기에 인도, 호주, 뉴질랜드까지 가세하면 전세계 인구의 절반(31억명)을 아우르는 지역공동체가 탄생한다.
라틴아메리카도 힘을 뭉쳐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저지했고 아프리카도 아프리카 연합(AU) 등을 통해 제힘으로 내전과 기아에서 벗어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 질서의 모색 움직임이 왕성한 가운데서도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여전히 깊다. 런던과 발리 테러, 프랑스와 호주 소요사태는 모두 이슬람과 관련돼 있다.
런던테러는 범인이 아랍계지만 영국 시민으로 밝혀져 세계를 경악케 했고 선진사회라는 프랑스와 호주의 소요 사태도 이슬람을 이방인으로 방치한 사회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관용과 화합의 새 국면이 열릴지, 일부 국가에서처럼 오히려 우경화 움직임이 강해질지 아직은 불투명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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