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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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녀 논란
  • 글_김정숙 기자
  • 승인 2006.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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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잃은 허영의 대명사 ‘된장녀’의 실체는?
스타벅스와 명품 앞세워 소비지향 추구, 성대결 양상으로…
요즘 인터넷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단어는 ‘된장녀’다. 소비 지향적이고 유행에 휩쓸리는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된장녀’는 실제 존재 여부를 놓고 한바탕 논쟁을 벌이더니 이제는 남녀 갈등의 양상마저 띠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유명 여배우가 광고하는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연예인이 된 기분이다. 화장은 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다. 최신 유행 원피스에 명품 토드백을 들고 전공서적 한 권을 겨드랑이에 끼고 집을 나선다. 큰 가방은 여대생답지 않다. 버스를 기다리며 자가용을 몰고 다니던 옛 남친을 그리워한다. 학교 앞에서 유명 상표의 커피와 도넛을 사먹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마치 뉴요커라도 된 듯하다. 복학생 선배를 꼬여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다. 품위 유지를 위해 싸이월드에 올릴 음식 사진을 디카로 찍어둔다. 시간이 남아 백화점 명품관에서 아이쇼핑을 한다. 친구들과 결혼 상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3천cc 이상 차를 몰고 키 크고 옷 잘 입는 의사면 충분하다. 지금 사귀는 남친은 ‘엔조이’일 뿐.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한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처럼 멋지게 느껴진다.
최근 한창 뜨는 이른바 ‘된장녀의 하루’다. 스타벅스 커피 값을 놓고 왈가왈부하던 사이버 논쟁이 “스타벅스에 집착하는 여성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남성 누리꾼들의 의견으로 모아지면서 된장녀는 유명세를 탔다.


명품에 집착하고 뉴요커의 삶 지향
인터넷상에서 정의되고 있는 된장녀는 ‘전통적인 관습 중 여성에게 이로운 점은 당연시 여기고, 불리한 점은 불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말한다. 신데렐라 드라마에 빠져 명품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극단적 페미니즘을 신봉하여 남성을 혐오하면서도 남자들에 붙어 이득을 챙기려는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단순히 ‘개념 없는 여성들’을 지칭하면서 ‘X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설이 있다.
최근 이 된장녀 논쟁이 불붙게 된 데는 한국의 스타벅스 커피값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높다는 것에서 촉발됐다. 일부 네티즌들이 ‘스타벅스 커피가 비싸도 한국에서 잘 팔리는 것은 된장녀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마셔야 세련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가치보다는 브랜드를 따지는 사고방식 자체를 비난하고 있다.
‘된장녀’는 어디서 온 말일까? 그동안 ‘된장’은 한국적 정서와 꾸미지 않는 질박함의 대명사이다시피 했는데, 최근 인터넷에서 쓰이는 이 말의 의미는 전혀 딴판이다. ‘된장녀’가 뜻하는 것이 오히려 기존의 전통적 의미의 ‘된장’과는 반대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원’을 살펴봐야 한다. 어원에 관해선 ‘설’이 많지만, 그중에서 ‘젠장녀 → 덴장녀 → 된장녀’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스타벅스와 패밀리 레스토랑, 명품에 집착하고 뉴요커의 삶을 지향하며 남성을 수단으로 여기는 미혼여성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카툰도 인기다. 대체로 된장녀를 만난 남성이 겪는 난감함과 어이없음을 담고 있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성을 못마땅해하는 된장녀가 외제차 열쇠고리를 발견하곤 곧장 태도를 바꾸는 카툰이 최고의 클릭 수를 얻고 있다.
된장녀에 맞서 ‘된장남’도 등장했다. 된장녀를 삐딱하게 보는 된장남은 좀 코믹하다. “유명 브랜드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다보니 같은 가방이 세 개나 보인다. G마켓 공구니 어쩔 수 없다.” 뒤따라 조삼모사도 등장했다.
네티즌들 반응은 된장녀를 향한 비난이 대부분이다. 반면 상품가치도 잘 모르는 남성이 만든 한심한 작품이라는 의견도 있다. 값비싼 테이크아웃 커피 논쟁에서 비롯했지만, ‘된장녀’ 논란은 이름과 꾸밈이 실재를 대체하는 현실에 대한 네티즌다운 반발로 읽힌다.


게임으로까지 확산된 된장녀
한편 ‘된장녀’가 플래시 게임으로 등장해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플래시 게임으로 제작된 ‘된장녀 키우기’ 게임은 ‘된장녀의 하루’와 내용이 동일하다.
게임을 시작하면 “집단주의와 명품선호주의의 대한민국에서 된장녀가 되지 않는 것이 목표다.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정상인에 어울리는 행동방침을 선택해 주면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막상 정상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할 경우 게임은 종료되어 버린다. 어떻게 하든 된장녀가 되고 마는 게 이 게임의 아이러니한 설정인 것.
전날 아는 오빠들과 과음을 했다는 주인공 여성이 등장하면서 게임이 시작된다. 여성은 유명 샴푸로 머리를 감은 후 미니스커트를 입고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는 ‘오빠 호출’이라는 스킬을 사용, 복학생 남자 선배를 불러 고급 레스토랑이나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신다. 이 후 아르바이트를 간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할 리는 없는 것. 창문을 닦으라는 사장을 성희롱으로 고소한 후 합의금으로 200만원을 받아 명품 가방을 구입하고 집에 돌아오면 ‘순도 100% 된장녀’가 되어 게임이 끝난다.
‘된장녀 키우기’ 게임은 자칭 ‘꼴페처리위원회’라는 사이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꼴페’는 꼴통 페미니스트를 줄인 말.
게임을 접한 네티즌들은 대체로 “지나치다”는 반응이다. 일부 여성의 꼴불견을 게임으로 만들어 남녀간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네티즌은 “남녀 감정싸움만 부추기는 된장녀 논쟁이 하루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성숙한 네티즌들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인터넷 문화
이른바 된장녀 논쟁을 촉발시킨 주역 중 한 사람이 대학생 임종효씨(20)이다. 아마추어 만화가인 임씨는 7월 22일 디씨인사이드(dcinside.com)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단편 만화를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게재를 시작한 지 2주일도 안 된 8월 4일 현재 만화 조회 수가 8만 건을 돌파했다. 그런데 막상 임씨는 자기 주변에서 된장녀로 볼 수 있는 여자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미니홈피 방문자 수를 올려보려고 화제가 될 만한 그림을 그렸다”라는 임씨는, 예상 외로 ‘낚인’ 네티즌이 많아 자신도 놀랐다고 했다.
‘된장녀’라는 표현을 임씨가 처음 쓴 것은 아니다. 일부 네티즌은 이미 ‘된장들의 저녁식사(cafe.daum.net/ihatedwhenjang)’와 ‘백인 여인과의 만남(cafe.daum.net/meetwhite)’ 같은 인터넷 카페에서 1~2년 전부터 ‘된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서양 문화를 추종하고 서양 남자라면 맥을 못 추는 한국 여성들을 성토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이들 카페는, 오늘날 성격이 확 달라졌다. 실망스러운 한국 여성 대신 서양 여성과 교제하거나 결혼하기 위한 정보를 교환하는 카페로 변모한 것이다. 이들 카페에서 활동하는 직장인 박종현씨(27)는 특정 생활 행태만 놓고 된장녀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된장녀는 본질적으로 “남성의 불리한 점을 파고들어 이용하면서 자신의 허영만을 추구하고, 윗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여성”을 뜻한다는 것이다.
일부 네티즌이 ‘된장녀=극렬 페미니스트’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지어 된장녀를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자’로 진단한 네티즌도 있다. 문제는 이런 논쟁을 불러일으킨 된장녀의 실체 자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남성 네티즌 일부가 연합 전선을 펴고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이들을 접촉해보면 된장녀를 이해하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곧 허영에 빠진 여자도 된장녀요, 드센 여자나 버릇없는 여자도 된장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문화 평론가는 “실체가 불분명하기에 더 소모적일 수밖에 없는 이번 논쟁의 밑바닥에 한국 남성의 보수성과 질투심·열등감 따위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된장녀’는 인터넷상에서 집단의 희생양을 찾는 과정에서 개념화된 용어다. ‘된장남’이란 말은 크게 유행하지 않는 반면 궁핍한 생활을 하는 ‘고추장남’이라는 말이 호응을 얻는 것이나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비싼 저녁을 사준 뒤 할인카드를 찾는 남자를 보면 분위기가 깨진다”고 발언한 김옥빈을 하루아침에 ‘된장녀’로 몰아버리고, 재벌가의 며느리가 될 노현정 아나운서를 ‘된장녀의 선두주자’ ‘된장녀의 우상’이라고 표현하는 네티즌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젊은 남자들의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게 읽혀진다. 군대와 청년실업 등의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자 대학생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된장녀’라는 기사나 글에 댓글(악플)을 주렁주렁 다는 것이다.
여가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모 교수는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못하면 적개심에 가득차게 되고 가상의 적을 설정해 공격하게 된다”면서 “사회의 모순관계가 계급이나 민족 등 비교적 단순한 데서 중층적 구조로 옮겨가면 가상의 적을 찾는 작업은 더욱 활성화 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복잡한 모순에서 비롯된 ‘된장녀’의 출몰을 막는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오히려 제2, 제3의 ‘된장녀’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된장녀’는 ‘○○녀’ 홍수시대의 연장선에서 나온 측면도 있다. ‘개똥녀’ ‘엘프녀’ ‘시청녀’ ‘치우녀’ 등 자고 나면 하나씩 등장하는 ‘○○녀’는 속도 위주의 문화를 반영한다. 요즘은 ‘간석동녀’가 네티즌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해서 뭔가 봤더니 피서 관련 뉴스에 수영복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한 귀여운 여자의 거주지가 인천 간석동이라 붙여진 별명이었다.
획일성을 가지고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된장녀’의 본질을 찾기도 전에 새로운 ‘○○녀’에게 관심의 자리를 물려주게 만들 것이다.
된장녀 논쟁이 계속되면서 논쟁은 점차 소모적으로 돼가고 있다. 일부 네티즌들은 마치 전체 여성 혹은 전체 남성이 그러한 것처럼 싸잡아 열을 올리기도 한다. 심지어 “된장녀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몸도 판다”거나 “된장녀들을 비판하는 남성들은 대개 고졸지방출신”이라는 등 인신 비하적인 글들도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논쟁을 그만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네티즌들은 특정 잘못된 행동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고칠 것을 고쳐야 발전적인 논의가 이뤄진다며 ‘차이’를 인정하고 ‘성차별적인 논쟁’은 그만둬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거 군대 문제와 여성 흡연 등의 이슈에 대해서도 익명성을 이용해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있어왔다”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의 토론인 만큼 불필요한 논쟁보다는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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