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참혹한 노동환경, 잠재적 시한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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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참혹한 노동환경, 잠재적 시한폭탄
  • 이지원 기자
  • 승인 2014.03.0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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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기업의 윤리적 책임’ 목소리 높아져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조금도 쉬지 않으니 정말 죽고 싶다…육체적 고통이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1970년대 참혹한 근로 환경 속에서 노동을 착취당했던 봉제공장 시다들은 하루 15시간의 노동을 견디며 연명했다. 15살 남짓의 봉제공들이 15시간 넘게 일해 번 50원은 당시 커피 한 잔 사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어린 봉제공들의 피땀 어린 희생으로 봉제 산업은 우리나라 기반 산업이자 수출의 일등공신으로 발전했다.

빛도 들지 않는 공장에서 옴짝달싹 못하며 노동착취를 당했던 70년대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결국 거리로 뛰쳐나왔고 노동운동이 시작됐다. 그 후 40여 년, 경제발전과 함께 노동자들의 인권은 나아졌다. 그런데 지난 1월, 새해 벽두부터 어딘지 익숙한 뉴스가 들려왔다.
지난 1월3일 캄보디아 프놈펜, 봉제공장 100여 개가 밀집한 지역에서 수십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캄보디아 노동자들을 경찰과 군대가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이 사고로 노동자 5명이 죽고 2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형행 월 80달러(약 17만 원)인 최저임금을 160달러로 인상해 달라는 것이었다.
캄보디아 전체 노동인구 800만 명 중 35명이 봉제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여성으로 하루 10시간 노동에 6일 근무를 강요하는 단기계약을 맺고 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노동시장에 뛰어든 이들은 한 달 식대나 충당할 수 있는 80달러를 쪼개어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남은 돈으로 겨우 차비나 할 수 있을 정도다. 캄보디아 정부는 월 100달러로 인상안을 제시했으나 ‘캄보디아의류생산자연합회(GMAC)’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지난 1월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캄보디아 노동자들을 경찰과 군대가 무력으로 진압해 노동자 5명이 죽고 2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이 사건이 국내에서 이슈가 된 것은 무력진압의 배후에 한국기업을 포함한 다국적 의류업체들로 구성된 사용자 단체인 캄보디아의류생산자연합회(GMAC)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부터다. GMAC는 지난 1월6일 경찰의 무력 진압에 대해 “경찰의 발포는 정당했다”며 정부를 옹호하고, 캄보디아 정부가 내놓은 최저임금 인상 중재안을 거부했다.
더욱이 시위 진압에 군부대가 투입된 것은 GMAC가 캄보디아 정부에 “노조에 대한 처벌을 포기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다”고 통보한 후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GMAC는 조업 중단에 따른 피해액을 보상받기 위해 일부 시위 노동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으며, 이 시위를 주도한 노동자 및 노조 간부 100여 명이 무더기로 해고된 것으로 드러나 이들을 해고한 다국적 기업의 윤리적 책임 논란이 커지고 있다.

노동집약적 산업의 저임금 국가로 이동 심화
캄보디아의 봉제 산업이 발전한 것은 지난 1990년대부터다. 산업기반이 없는 캄보디아는 봉제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해 왔으며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했다.
저임금·무역혜택이라는 매력에 전 세계 수많은 기업들이 모여들었고 봉제 산업을 통해 캄보디아는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때문에 캄보디아 봉제산업은 대부분 외국 자본으로 이뤄져 있다. 2008년 조사결과 캄보디아 의류 기업의 투자 국가는 타이완(25%), 홍콩(20%), 중국(15%), 한국(12%) 등이다. 세계 기업들이 캄보디아에 모여든 것은 캄보디아가 월등히 유리한 조건을 갖춰서가 아니다. 노동력에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특성상, 노동임금이 싼 국가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노동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개방이 덜되고 노동임금이 낮은 국가에 모여든 것이다. 노동집약적 제조 산업의 저임금 국가로의 이동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 패스트패션이 패션 트렌드의 주류를 이루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패스트패션이란 패스트푸드처럼 상품 회전율이 빠르고, 다품종 소량생산을 통해 저렴한 가격에 최신 유행상품을 공급하는 ‘자가상표부착제 유통방식(SPA: speciality retailable of labelappearel)’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패션기업이 1년에 4~5번의 계절별 신상품을 내놓는 것과 달리, SPA 브랜드들은 시시때때로 트렌드가 될 만한 아이템들을 선보인다. 소수의 스타 디자이너가 아닌 수백 명의 디자이너를 고용해 수많은 양의 디자인이 가능한 체제를 갖추고, 동남아시아의 저임금 국가에 공장을 세우고 제품을 생산한다. 기획에서 생산, 유통에 걸리는 시간은 1~2주. 상품을 자주, 저렴한 가격에 유통시키는 만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노동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노동착취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치솟는 물가 못 따라가는 저임금

▲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노동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노동집약적 제조 산업의 저임금 국가로의 이동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의류산업의 안전 및 노동환경 문제는 캄보디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2012년 11월 방글라데시의 타즈린 의류공장에 화재사고가 발생해 110여 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가 발생한 공장은 불법 증축된 8층 건물로 무리하게 전기를 끌어다 써 화재 및 붕괴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당시 공장에는 1,150여 명의 노동자가 주문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철야 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화재가 발생하고 화재 경보가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공장 매니저들은 “심각한 일이 아니다. 화재 경보는 소방훈련 때문이다”라며 노동자들에게 일을 강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불이 공장 전체로 번졌지만 노동자들은 공장 유리창의 쇠창살 때문에 대피도 못한 채 대부분 질식해 숨졌다. 해당 의류업체의 공장주는 사고 14개월 만인 지난 1월31일에서야 법정에 출두했다. 또 지난해 4월에는 방글라데시의 한 의류공장 건물이 무너져 1,100명 이상이 숨지면서 열악한 근무환경이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방글라데시는 국가 전체 수출율의 80%가 의류로 대표적인 SPA 브랜드인 H&M, 자라가 방글라데시의 최대 원청업체다. 이에 의류산업이 방글라데시의 주요 산업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정부가 의류산업을 비호한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한편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해 11월 약 3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50%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했다. 지난해 9월 말에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5만 명이 최저 임금을 요구하며 6일간 파업을 진행하고, 1만 명이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은 치솟는 물가인상이 주요 원인이다. 지난 2008년 대비 2013년 물가인상률이 방글라데시 37.1%, 인도네시아 21.1%, 캄보디아 12.1%에 달했다. 한국의 2014년 물가상승률이 2%대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이렇게 치솟는 물가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이 이뤄지지 않아 노동자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

다국적 기업 사회적 책임론 대두
동남아시아 국가의 저임금 문제는 꽤 오래 전부터 국제적 문제로 대두돼왔다. 이에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는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타국에서 영업하는 다국적기업들이 고용, 환경, 조세 등과 관련해 주재국의 정책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노동자와 그 가족이 기본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적정임금을 주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권고사항이라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캄보디아 사태와 같이 노동자들에 대한 유혈진압의 주체가 정부였다 하더라도 해외 진출기업과 모국 정부가 책임을 면할 수 없다”며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포함한 일련의 국제 기준을 통해 다국적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연이은 참사로 인한 노동 문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의류산업 환경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패션의 주기가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노동집약적인 의류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낮은 임금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누군가의 비인간적인 삶과 희생을 필요로 하기에 지속되기 어렵다. 기업에게 있어서 단순히 저임금 생산의 이점을 노려 동남아시아 국가에 진출하는 것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올해 초 코트라(KOTRA)는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사업 환경 변화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현지에 진출한 우리기업이 높이 보고 오래 쓰고 멀리 가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최근 잇따른 참사로 소비자와 국제 노동기구의 뭇매를 맞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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