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계자들 “축소 영향 2~3년 뒤부터 나타날 것”
지난 7월 1일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무상영일수는 146일에서 73일로 줄었다. 일각에선 한미 FTA의 허상이 속속 파헤쳐지고 있는 지금, 이제 다시 스크린쿼터 원상회복을 향한 기나긴 싸움이 시작됐다.
스크린쿼터 원상회복 싸움 시작
지난 7월 1일 결국 영화진흥법 시행령이 발효돼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가 연간 146일에서 그 절반인 73일로 축소됐다. 문화관광부가 올해는 상하반기를 각각 계산, 원칙적으로 의무상영일수는 109일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렸지만 현재 영화계가 느끼는 절박한 위기감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지난 7월 1일 오후 5시부터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영화인대책위, 문화예술공대위, 시청각미디어공대위, 교수학술공대위, 금융공대위 등이 주축이 돼 ‘스크린쿼터 원상회복과 한미 FTA 저지를 위한 결의대회 및 문화제’가 열렸고 광화문 시민열린마당까지 행진대회를 가졌다. 또한 지난 7월 1일부터 3일간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소속 60여 개 영화사가 영화촬영을 중단했다.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영화, 문화, 방송, 학술, 금융단위의 연대투쟁이자 FTA 저지 및 모법 개정을 통한 스크린쿼터 원상회복을 위한 선언의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영화배우 최민식, 송강호, 공형진, 김혜수, 박중훈, 설경구, 장진영, 황정민, 이범수, 이준기 등을 비롯한 영화인과 교수,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약 1천여 명이 참석했다. 집회 현장은 유명 배우들을 보려는 시민들이 몰려 큰 혼잡을 빚었다. 특히 정규직화를 요구하다 해고된 KTX 여승무원 50여 명과 미군기지 확장 문제로 정부와 대립하고 있는 경기도 평택 대추리 주민들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문화제에는 권영길, 심상정 민주노동당 국회의원과 문경식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장, 신학림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그리고 종교계를 대표해 불교인권위원회 범상 스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귀현 신부등도 참석해 연대를 약속했다. 또 전국영화영상전공 학생대책위원회 250여 명도 참석했다. 대책위 측은 “연대를 호소하며 모든 당에 초청장을 보냈지만 민노당만 참석했다”고 밝혔다. 권영길 의원은 “한미 FTA가 독약인지 보약인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다. 그렇게 뭐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진행된 이번 FTA가 최소한 보약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고 말했으며, 심상정 의원은 “몇몇 정치인들이 영화, 방송인들을 향해 아드보카트호를 예로 들며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라 말하고 있다. 그럼 노무현 정부처럼 협상 테이블에서 백패스만 하고 수시로 공을 빼앗기면서 하프라인 근처에도 못 가는 정부는 과연 어떤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가”라며 반문했다. 한편, “오늘은 노무현 정권이 조종을 울리는 날”이라는 말로 발언을 시작한 정종권 금융공대위 공동위원장은 “스크린쿼터를 절반으로 축소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영화를 볼 자격이 없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의대회를 마친 5천여 명의 참가자들은 오후 6시 30분부터 1시간 30분 동안 대학로에서 광화문 시민열린마당까지 행진했다. 영화배우와 감독들이 줄을 지어 거리에 나타나자 종로 일대가 크게 들썩였다. 길을 지나던 시민들은 걸음을 멈추고 지나가는 배우들을 구경했으며, 휴일을 맞아 놀러 나왔던 학생들은 행렬을 쫓아다니며 이들의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하지만 종각 부근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예고되고 합법적 절차를 거쳐 진행된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경찰이 어처구니없게도 도로가 아닌 인도로 행진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한 실랑이를 거듭한 끝에 종로일대를 행진한 시위대가 저녁 8시경 열린마당에 도착했다. 당초 저녁 7시부터 30여 분간 기금마련을 위한 팬 사인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저녁 8시 20분경이 돼서야 겨우 사인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편 이날 문화제에는 주최 측이 선정한 ‘한미 FTA 오적’이 발표됐다.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 한덕수 경제부총리, 김현종 통상외교본부장, 정문수 청와대경제보좌관, 보수언론 등이 오적으로 언급됐다.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급박한 상황들
지난 2005년 10월, 스크린쿼터는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다양성협약을 통해 국제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문화다양성협약은 WTO 무역협상 및 기타 지역 간, 양자 간 협상 등에서 문화정책에 가해지는 공격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EU를 비롯한 WTO 회원국들은 문화분야, 특히 시청각 서비스분야 개방에 반대해왔다. 지난 2001년 WTO가 도하라운드협상을 재개하면서 문화다양성 지지국들은 문화상품과 서비스 관련 이슈에 걸맞는 국제협상 근거를 새롭게 마련할 것을 모색하게 되고, 문화다양성협약에 관한 제안이 각국 문화부장관들의 네트워크인 세계문화부장관회의(INCP)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러한 제안은 드디어 지난 2003년 가을 유네스코 총회에서 프랑스와 캐나다를 비롯한 선두 국가들에 의해 상정됐으며, 2005년 10월 3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154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찬성 148, 반대 2(미국, 이스라엘), 기권 4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공식 채택됐다. 이는 미국문화의 패권주의와 일방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국제적 합의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세계적인 흐름과 순리에도 불구하고 가공할 역주행을 시도하고 있다. 스크린쿼터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더라도 너무나 기본적인 산업지원책이자 산업부양책임을 잊고 매일같이 ‘경쟁력’ 논의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부도 그간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았다. ‘영화발전기금 4000억원 조성’ 방안 중 2000억 원은 국고에서 지원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아직 국회 심의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머지를 영화관람료의 5%를 기금으로 적립해 마련한다는 방안 역시 극장들의 반발로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또 영화 제작, 배급사와 극장간 부율(수익배분 비율)을 형평성에 맞게 조정하겠다던 정부 방침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됐다. <바보선언> <서편제> 등의 영화배우 출신이자 국립극장장을 지내 기대를 모았던 신임 문화관광부장관 김명곤 역시 똑같은 정부의 입장만을 되풀이하며 영화인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은 것도 그 사이의 일이다. 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 것에 대한 질문에 그는 “스크린쿼터제 축소는 정부가 고민 끝에 내린 적절한 결정이었다. 정부 각료로서 개인의 소신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스크린쿼터 축소 재검토를 정부에 요구할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도 그는 “재검토는 정책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고까지 말했다. 이어진 국회의원들의 지적이 더 명언이었다.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은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버린 장관이 어떻게 문화부의 정부 내 위상을 끌어올리겠느냐”고 했고, 열린우리당 정청래 의원은 “소신을 위해 장관직 제의를 고사했으면 더 멋있는 예술인 김명곤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146일간 진행된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1인 시위’는 지난 7월 3일 임권택 감독을 끝으로 종료됐다.
지난 2006년 1월 26일, 한국정부가 미국이 FTA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스크린쿼터 73일 축소를 수용하면서 시작된 영화인들의 분노는 2월 4일부터 146일간의 1인 시위로 시작되고, 이어 8일 수천 명이 참석한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회’를 지나, 3월 7일 스크린쿼터 146일을 73일로 축소하는 ‘영화진흥법 시행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고, 7월 1일을 통과하기까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 하지만 7월 1일부터 시작된 3일간의 시위를 끝으로 스크린쿼터 사수 대책위는 일단 호흡 조절에 들어갔다. 분명 7월 1일은 지났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쿼터 문제가 처음 불거져 나왔던 올 초의 상황과 달리 국민 여론이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 영화인들의 입장으로 많이 돌아섰다는 점이다.
60돌을 맞은 소니 사의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은 “디지털 시대에 콘텐츠를 잡지 못하면 소니의 미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역시 이미 콘텐츠 산업을 군수 산업과 함께 2대 주요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상태다. 미국은 세계 영화시장의 70%를 쥐고 있고, 일본은 ‘포케몬’을 비롯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65%를 차지하고 있고, 영국은 리버풀공항을 리버풀존레논공항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과거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총력을 경주하고 있고, ‘문화의 나라’ 프랑스 역시 콘텐츠 산업 부양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극장을 넘어 DMB 등 신규 매체의 고속도로가 속속 뚫리고 있는 이 마당에 ‘한류’라는 막강한 엔진을 달고서 오히려 어설픈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게 영화계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스크린쿼터 영향 2.65년 뒤 나타날 것
한편, 스크린쿼터가 축소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안정숙·이하 영진위)가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영화산업 종사자의 경기 전망’을 발표했다.
㈜리서치플러스가 대행한 이번 조사는 투자사, 제작사, 배급사, 극장, 홍보ㆍ마케팅사 등 영화산업 종사자 161명을 대상으로 지난 5월12일부터 18일까지 실시됐다.
이에 따르면 스크린쿼터 축소의 효과가 나타나는 시기는 긍정과 부정 모두 합해 전체 평균 2.65년이 걸린다고 답했다.
영진위는 “분야별 차이는 있지만 향후 2~3년 후에 스크린쿼터를 축소한 산업적 결과가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판단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조사 대상자들은 국내 시장에서 한국 영화의 경쟁력이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전반적으로 크게 뒤지지 않으며, 대중성과 소재 면에서는 오히려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78.9%가 이 같은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이 스크린쿼터 덕분이었다고 진단했다.
또한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의 영화산업 전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이 65.2%로 나타났다. 하지만 종사 분야에 따라 큰 차이를 보여, 제작 분야의 경우는 부정적인 의견이 95%에 달했지만, 외화배급은 43.8%, 극장은 37%로 견해차를 보였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돼도 국내 영화시장의 규모는 “크게 줄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쪽이 59%, “줄어들 것”이라는 쪽은 32.3%로 나타났다.
영진위는 “영화인들의 주체적인 노력과 적절한 지원정책이 뒷받침된다면 향후 한국영화가 위축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한편 향후 영화산업 발전을 위한 지원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은 ‘투자 활성화를 위한 세제 지원 확대’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영진위는 “영화계가 스크린쿼터 축소로 인한 기획ㆍ투자 위축에 대해 가장 큰 우려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세제 지원을 통해 끊임없는 외부자본의 유입과 수익성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 앞으로 중요한 사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극장가 벌써부터 한국영화 외면
스크린쿼터 축소 시행이 현실화됨에 따라 한국 영화계에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영화계는 ‘왕의 남자’ 같은 ‘대박’ 영화 한 편이면 극장들은 쉽게 스크린쿼터 상영일수를 채울 것이고, 이후 한국영화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내 최대 영화제작사 싸이더스FNH의 관계자는 “정부가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밝힌 직후부터 국내 극장가는 한국영화를 외면하고 있다”며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평단과 관객의 호평뿐 아니라 스크린당 객석 점유율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5일만에 스크린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고 주장했다. 스크린쿼터 축소 시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극장들 입장에서 봐줄 이유가 없었다는 것. 그는 이어 “1999년 전국 260만 명을 모은 ‘주유소 습격사건’은 당시 A급 배우가 하나도 없었고, 개봉 첫날 반응이 안 좋았지만, 스크린쿼터를 채워야하는 극장들이 며칠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바로 극장에서 내렸을 영화지만, 개봉 2주째부터 관객이 몰렸다”며 “스크린쿼터는 한국영화에 바로 그런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투자·배급사 쇼이스트 관계자는 “창투사나 주요 투자자들이 스크린쿼터 축소가 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상당히 주시하고 있다”며 “투자자들이 스크린쿼터 축소로 인해 한국영화의 수익성이 낮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투자 대비 수익성이 감소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할리우드 직배사들은 스크린쿼터 축소로 직배사가 직접 덕을 보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작품의 운명은 ‘시장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 한 직배사 간부는 “외화는 아무리 잘 돼도 500만이 최고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1000만 관객이 나온다”며 “한국영화의 힘을 믿는다”고 밝혔다.
충무로와 할리우드 간의 시각 차이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결국 현실로 다가왔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낙관론이 사실이길 믿어보고 싶지만, 결과는 과연 낙관적일지 지켜볼 일이다.
재경부 ‘스크린쿼터 축소는 갈등해결 우수사례?’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개시하기도 전에 미국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비판과 함께 영화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스크린쿼터 축소'를 재정경제부가 자체적으로 부처간 갈등해결 우수사례에 포함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7월 13일 재경부의 정부 업무평가 상반기 실적보고에 따르면 스크린쿼터 축소는 공적보증 역모기지제도 도입, 중소기업 의무대출비율 완화, 골프장 건설 입지제한 개선 등 10건과 함께 부처간 갈등해결 우수사례로 명시됐다.
재경부는 스크린쿼터 유지와 축소를 놓고 벌어졌던 관계부처 간의 이견을 해결해 지난 1월 26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는 것을 결정, 그 결과 한미FTA 협상의 공식 출범이 가능해졌다고 자체 평가했다.
보고서는 또 “지난 1월 관계장관 회의에서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는 것을 결정하고, 이를 (경제) 부총리가 발표했다”며 영화인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총대’를 멨다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재경부의 이런 평가에 대해 영화계는 반발하고 있다. 우선 지난 1월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은 ‘갈등의 해결점’이 아니라 거꾸로 ‘갈등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인들이 삭발을 하고, 1인 시위와 단식농성을 벌인 데 이어 해외원정 시위까지 나선 것은 스크린쿼터 축소가 사전에 충분한 대화 없이 ‘일방통행식’으로 이뤄진 데 원인이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보고서 내용은 영화인들과의 갈등이 아니라 부처간 갈등을 원만히 해결했다는 의미”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정작 문화관광부의 실무자는 “재경부의 ‘오버’에 더이상 코멘트하고 싶지 않다”며 쌓인 앙금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