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매거진245호=신혜영 기자) 1796년 9월10일 조선 정조(제22대, 재위 1776~1800) 때에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에 쌓은 새로운 성 화성(華城)이 완공되었다.
화성은 정조 18년(1794)부터 20년(1796) 사이에 좌의정 채제공의 주관 하에 축성했는데,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거중기 따위 기계 장치를 활용하는 등, 우리나라 성곽 건축 기술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이다. 당대의 모든 과학 기술과 역량이 동원된 이 성은 다산 정약용이 거중기(擧重機)를 이용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성의 총길이는 4,600보(5,743m)로 서양식 축성법을 채용했고, 재료도 대형벽돌을 사용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에 대해 벽파세력의 압박을 피해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화성 천도설’이 있긴 하지만, 당쟁에 휘말려 비운에 간 아버지 세도세자를 추모하고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자신의 비원을 실현할 목적으로 건설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정조는 화성 건설과 함께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로 옮겼고,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를 용주사로 이름을 바꿔 사도세자의 능사(陵寺)로 삼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함. 정조는 신도시의 번영을 위해 한성부내의 재력 있는 시전도매, 기타 부호들과 개성, 평양, 의주, 동래의 거상들로부터 이주 신청을 받았는가 하면, 장사에 능하고 근면 성실한 자 20인을 골라 계를 짜게 하고 이 계원들에게 관모와 가삼의 국내매매와 대중국 무역을 독점하게 했다. 정조의 강력한 의지는 인가(人家)라야 불과 5~6호에 지나지 않았던 삭막했던 들판을 1900년에는 약 2,000호의 큰 읍으로 발전시켰고, 이 신도시는 2004년 현재 인구 100만여 명인 대도시로 성장했다. 다른 한편 ‘발상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조대왕이 자신의 거창한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하나의 역사적 시발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