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년 11년 만에 유골발견, 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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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년 11년 만에 유골발견, 왜 사라졌나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8.09.05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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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금 4200만 원 수사 인력 35만 명 투입

둔기나 흉기에 살해된 명백한 타살 결론

(시사매거진245호=신혜영 기자) 1991년 3월 26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힌 사건이 발생한다. 5명의 초등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5만 명의 수사 인력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1년 후인 2002년 9월 26일, 그토록 찾아 헤매던 개구리 소년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사진출처_뉴시스>

[2002년 9월 26일]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1991년 3월 26일 당시 대구성서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우철원(당시 13세) 군을 비롯한 조호연(당시 12세), 김영규(당시 11세), 박찬인(당시 10세), 김종식(당시 9세) 등 다섯 어린이가 집 뒷편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사건 발생일인 이 날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하여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군·구의회 의원 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다. 5명의 아이들은 와룡산에 오르기 전 인근 마을에 사는 학교 친구와 마을주민들에게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명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정식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실종사건’으로 당시 정부는 경찰과 군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현장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전국적으로 수배 전단이 배포되었다. 전국 새마을중앙회 등 각종 사회단체들은 700여 만 장의 전단을 전국에 뿌렸고 한국담배인삼공사와 기업체들도 담배갑과 상품에 실종 어린이들 사진을 인쇄, 수색 작업에 동참했다.

하지만 현상금 4200만 원에 연 수사 인력만도 35만 명이란 어마어마한 인력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사건이 장기화되자 한때 ‘외계인 납치설’', ‘북한공작원 유괴설’, ‘불치병 치료용 희생설’ 등 갖가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2002년 9월 26일, 사건 발생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랐던 한 등산객에 의해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됐다.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4구의 유골과 신발 5켤레가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길을 잃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지만 부검을 맡았던 법의학팀은 감정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명백한 타살로 결론 내렸다.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경찰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곳에서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밝힌바 있다.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끝내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2006년 3월 25일 24시에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이형호 유괴 사건과 함께 3대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아이들’의 한 장면. 지난 2002년 9월 26일, 사건 발생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랐던 한 등산객에 의해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됐고 부검을 맡았던 법의학팀은 감정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명백한 타살로 결론 내렸다. [사진출처_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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