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선택은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게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서 이뤄진다
뇌신경과학을 마케팅에 접목시킨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이 미국 등을 중심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뉴로마케팅은 소비자가 특정 제품을 선호하는 근본원인을 신경과학적으로 규명해 기업 마케팅에 활용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일부 과학자들의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뉴로마케팅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뉴로마케팅 경쟁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잠재의식, 소비자의 구매 행동 유발
기업은 로고를 만들어 자사의 브랜드를 알린다. 소비자는 로고를 보고 명품인지 대중용품인지를 구별하는 등 그 제품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구매한다. 따라서 기업에게는 자사 브랜드의 로고에 대해 소비자가 어떤 심리적 반응을 보이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 베일러 의대 리드 몬태그 교수는 한 실험에서 참가자의 눈을 가린 다음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마셔본 후 어떤 맛이 더 좋은지 선택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몬태그 교수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참가자의 뇌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살폈다. 흥미롭게도 코카콜라가 아닌 펩시콜라를 마셨을 때 보상이나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뇌의 부위가 활성화 됐다. 이는 펩시콜라가 더 맛있었다는 결과다.
그런데 왜 소비자들은 펩시콜라보다 코카콜라를 더 많이 선호할까. 이는 코카콜라라는 브랜드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소비자가 제품을 선택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브랜드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상표인지도가 맛 선택도 좌우한다는 새로운 발견이다. 이처럼 소비자의 구매 행동을 유발하는 데에 잠재의식이 작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신경과학과 마케팅을 접목시킨 것이 바로 ‘뉴로마케팅’이다.
국외 유명 기업 소비자 뇌 연구 활발
소비자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겠다는 야심찬 발상에서 시작된 뉴로마케팅 연구는 인간이 특정 제품이나 상표를 선택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반응을 ‘기능별자기공명영상’장치를 통해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영국 런던경영대학원에서도 최근 이 장치로 소비자들의 쇼핑 행동에 대해 연구했다. 여러 가지 상품을 진열해 둔 상황에서 실험 참가자들이 각자 선호하는 브랜드를 선택할 때 뇌에서 기억과 관련된 부위들이 모두 활성화 됐다는 것이다. 연구 책임자인 스티븐 로즈 교수는 “이 반응이야말로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감정적 선택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외국에서는 다임러 크라이슬러, 재너럴 모터스, 캘로그, 프록터 앤 갬블 같은 기업을 중심으로도 제품의 광고나 디자인이 소비자의 뇌에서 어떤 활동이 일어나게 하는지를 분석하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2004년 독일 다임러 크라이스러사는 남성 고객이 선호하는 차종을 파악하기 위해 뇌 사진을 찍기로 했다. 연구팀은 평균 31세의 남성 12명을 대상으로 스포츠카, 세단, 소형차 사진을 보여 주면서 기능성자기공명상 장치로 뇌를 촬영한 결과 스포츠카를 봤을 때 실험 참가자들의 뇌가 강력하게 활성화됐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뉴로마케팅 관심 고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학계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소비신경심리학연구가 일어나고 있다. 고려대 심리학과 성영신 교수가 이끄는 소비자광고심리연구실이 그 선두주자에 속한다. 연구팀은 캐릭터성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브랜드 로고가 명품이냐 아니냐에 따라 소비자의 뇌에서 실제로 다른 반응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아기공룡 둘리’처럼 드라마화 된 캐릭터 45개와 드라마화 되지 않은 캐릭터 45개를 수집했다. 그리고 가상 브랜드의 상표명을 10가지 만들어 캐릭터 사진 아래쪽에 무작위로 하나씩 적었다. 그런 다음 여대생 13명에게 가상 상표명이 적힌 캐릭터 사진들을 순서대로 보여 줬다. 그 동안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가 참가자의 뇌에서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측정했다. 이 장치는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될 때 분비되는 화학물질을 감지해 이미지로 기록한다.
사람의 뇌 중 바깥부분은 논리적·이성적인 능력을 조절하는 한편, 안쪽부분은 감정적·직관적인 능력을 관장한다. 이 실험에서 참가자들의 뇌는 주로 안쪽부분이 활성화 됐다. 그런데 캐릭터의 드라마화 여부에 따라 느낀 감정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드라마화 된 캐릭터를 볼 때 참가자들의 뇌에서는 후대상이랑과 시상이 활성화됐다. 이 곳은 사람들이 가까운 친척이나 오랜 친구의 사진을 봤을 때 그들에 대한 좋은 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활성화되는 곳과 같은 영역이다. 결국 드라마화 된 캐릭터는 참가자들에게 마치 친척이나 친구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며 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회상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성 교수 연구팀은 동일한 실험을 명품과 그렇지 않은 상품에 대비, 연구한 결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확인했다.
국내 브랜드 뉴로마케팅 경쟁시대
날이 갈수록 천차만별로 변해가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는 게 기업이 당면하고 있는 영원한 숙제이다. 특히 15초라는 짧은 영상을 반복적으로 소비자들에 주사함으로써 단시간 내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자 하는 TV 광고의 경우에 있어서 뉴로마케팅은 더욱 중요시 된다. 하나의 상품브랜드를 시장에 내놓기에 앞서, 소비자들의 잠재의식이 그 브랜드의 이미지를 얼마만큼 받아들일지를 미리 과학적으로 알아본다는 것은 기존의 마케팅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발상이다.
“에브리데이 뉴 페이스~” 누구나 다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귀에 익은 태평양 화장품 브랜드 라네즈의 광고 카피. 지난 2005년 3월 태평양 마케팅팀은 고려대 심리학과 소비자광고심리연구실과 함께 20대 여성 10명의 ‘속마음’을 읽기로 했다. 연구팀은 자원 여성들에게 해외 명품 화장품 브랜드 4개, 라네즈 등 태평양 색조화장품 브랜드 3개 등 총 7개 브랜드의 광고와 제품 사진을 보여 주고 자기공명영상장치로 뇌를 알고 있는 지식을 생각해 내는 영역이 동시에 활성화됐다.
고려대 김숙진 연구원은 “라네즈 제품을 써보고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거나, 브랜드를 잘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4개 해외 명품 브랜드 중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것들도 있었다. 국내 소비자들이 해외 명품이라면 무조건 국내 브랜드보다 선호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잘못됐음을 보여 주는 결과다. 태평양 이해선 마케팅 총괄 부사장은 “뇌 실험으로 자신감을 얻었다”며 “라네즈의 브랜드 파워를 활용한 새 제품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LG텔레콤의 TV광고 ‘랄랄라’편에서는 고객이 서비스를 받고 즐거워하는 장명이 나온다. LG의 서비스를 받으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려고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소비자들은 이 광고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작년 11월 고려대 심리연구실은 40명에게 이동통신 회사들의 로고와 광고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기공명영상장치로 뇌영역을 많이 사용했다. 고려대 김보경 연구원은 “광고를 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랄랄라’ 멜로디를 따라 부른 것 같다”며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랄랄라’를 이 회사의 ‘마스코트’로 여긴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LG텔레콤은 “이 실험에서 서비스를 경험하지 않은 고객은 친밀감이 낮았다”며 “친근한 느낌에 그치지 않고 실제 서비스를 이용하게 하는 마케팅 전략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머지않은 뉴로마케팅 경쟁시대
마케팅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으로 제품 기능에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브랜드 이미지가 판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소비지의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뉴로마케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뉴로마케팅을 이용하면 소비자의 뇌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반응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이 소비자들이 ‘생각하면서’ 대답하는 설문조사와 비교된다. 고려대 심리학과 성영신 교수는 “설문조사와 함께 뉴로마케팅을 적절히 활용하면 최적의 마케팅 전략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소비자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설문조사로도 알아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나 감정 변화를 좀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하기 위한 연구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성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장비로 뇌의 생리적 변화를 파악해 소비자 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며 “국내 기업들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기르려면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 자신도 모르는 속마음까지 알아내 판매 전략을 짜야 하는 본격 뉴로마케팅 경쟁시대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반론의 목소리도 높다. 뇌반응의 확인만으로 뇌작용과 소비행동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며, 판매실적은 광고노출 정도에 비례할 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美, 대선 당시 뇌촬영기술을 이용해 유권자의 마음 읽어
미 대선이 워낙 치열해지다 보니 뇌촬영기술을 이용해 유권자의 마음을 읽으려는 시도까지 등장했다.
지난달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UCLA) 의학팀은 민주당원 10명과 공화당원 10명에게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사진을 보여준 뒤 이들의 뇌를 촬영했다. 의학팀이 사용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기법(fMRI)’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병 진단에 쓰이는 뇌촬영기술이다. 분석결과 양측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봤을 때는 뇌 가운데 공감과 연관되는 부분의 활동이 증가했다. 반면 반대편 후보를 봤을 때는 감정을 억제하는 부분의 활동이 증가했다. 이는 상대방 후보를 좋아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뜻이다.
그러나 같은 공감을 느껴도 그 방식은 달랐다. 연구팀의 조슈아 프리드먼 박사는 “케리 후보를 인식한 민주당원의 뇌 활동에는 아름다운 석양을 볼 때와 같은 깊은 유대감이 나타났다면 부시 대통령을 인식한 공화당원의 뇌 활동은 미소를 주고받을 때처럼 좀 더 대인관계적인 것 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독심술’은 선거운동 관계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있다. 설문조사보다 더 효과적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 박사에게 실험을 의뢰한 그의 동생 톰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선거자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