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이 한 나라를 먹여 살린다? 과장된 표현 같지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 역시 상위 그룹들이 나라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면? 그러면 기업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스페인의 인디텍스그룹이 그렇다. 침체에 허우적대는 스페인과 달리 인디텍스그룹은 세계적인 입지를 더욱 다져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 이것이 바로 인디텍스그룹의 현재 모습이다.
스페인의 패스트패션기업인 인디텍스그룹(Inditex Group)이 지난 3월 전년도 성적표를 공개했다. 2012년 2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인디텍스그룹의 매출은 159억 4,600만 유로(약 22조 3,244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보다 16% 성장했다.
한 해 동안 인디텍스그룹은 많은 시도를 했다. 일단 매장 이미지를 바꿨다. ‘인디텍스 지속가능한 계획 2011∼2015’중 하나였던 에코 프로젝트에 따라 매장을 ‘자연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뿐만 아니라 청소, 배치 업무 중에는 전력 소모를 66%로 낮췄고, 매장 입구에는 에어 커튼을 설치해 외부 열기나 추위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범유럽산림인증 목재만 사용해 가구와 중이봉투를 제작하기도 했다. 유통도 강화했다. 4억 5,000만 유로(약 6,300억 원)을 들여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고 유통 헤드 센터를 넓혔다. 특히 인디텍스그룹은 글로벌 매장 수를 확대하면서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64개국에 482개 매장을 새로 오픈했는데, 이 중 아르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에콰도르, 조지아,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에는 처음으로 진출했다.
이 같은 노력을 바탕으로 인디텍스그룹은 침체된 세계 경제, 위기에 빠진 자국 경제에도 불구하고 매년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중개상을 거치지 않는 패스트패션의 효시
세계 최대의 패스트패션업체인 인디텍스그룹은 스페인의 유명 의류업체이자 세계 SPA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절대강자다. 세계 80여 개국에 약 5,600여 개의 매장을 둔 인디텍스그룹은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의 유일한 안전자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인디텍스그룹의 창업주인 아만시오 오르테가(Armancio Ortega)는 가난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옷가게 점원으로 취직해 사회로 뛰어든 오르테가. 그는 옷가게에서 일하며 패션 유통의 생리에 눈을 뜨게 됐다. 원단을 구매하고 옷을 판매하는 과정에 중개상을 거치기 때문에 제작기간은 늘어나고 옷값도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후에 그 점을 개선해 자신의 사업에 반영시킨다.
오르테가는 긴 점원 생활을 청산하고 1963년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제작과정을 줄이고 옷값을 내리기 위해 그는 과감하게 중개상을 거치지 않고 원단업자에게 직접 원단을 구입해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패스트패션의 효시인 셈이다. 그의 가게는 북새통을 이뤘다. 빠른 신제품 출시와 저렴한 가격은 높은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던 그는 1957년 자신의 옷가게 브랜드를 ‘자라(ZARA)’로 바꾸고 매장도 점점 늘려나갔다. 1988년부터는 해외에도 진출했다. 포르투칼, 미국, 프랑스 등에 진출해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2주에 한 번씩 매장 물건의 70% 교체
1990년 인디텍스는 토요타 자동차와의 협력을 통해 일괄생산 물류공장을 세웠다. 이어 물류센터도 개설했으며 자사 완결형 사업 시스템을 확립해 성장 원동력을 마련했다. 생산은 대량으로 비축한 소재와 연사를 POS정보를 통해 아이템 및 가공공정에 따라 자사 계열, 가공 공정을 배치한다. 이러한 시스템 덕에 의사결정에서 점포 투입까지 최단시간이 가능한 것이다.
인디텍스그룹의 시초이자 대표 브랜드인 자라는 평균 2주일에 한 번씩 매장 물건의 70%에 해당하는 물건을 교체한다. 경쟁업체인 미국의 갭(Gap), 스웨덴의 에이치앤엠(H&M)보다 무려 12배나 빠르다. 이렇게 선보이는 연간 옷 종류가 1만 1,000여 종에 이른다. 다른 브랜드들이 계절에 앞서 옷을 미리 만든다면 자라는 그때그때 사람들이 추구하는 유행에 맞춰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방식을 택한다.
인디텍스그룹이 자체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객들이 자라 매장에 들르는 횟수는 평균 1년에 17번이었다. 경쟁사에 비해 무려 6배가 넘는 수치다. 빠른 변화로 고객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이야 말로 자라의 생존전략이자 이유인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여타 SPA들이 인건비가 싸다는 이유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인디텍스그룹은 스페인 내에서의 생산을 고집해왔다. 스페인과 인접국가인 모로코에 공장을 두고 제품을 생산한다. 스페인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 비중은 65%. 공정을 통합하고, 유통과정을 단순화하며, 효율적으로 재고를 관리하는 오르테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여느 패션브랜드와 달리 인디텍스그룹은 광고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점포의 위치 선정, 디스플레이에만 신경을 쓸 뿐 별도의 광고는 하지 않는다. 광고비 때문에 제품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제품의 광고를 찍는 일도 없고 패션 잡지회사에 옷 샘플을 보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다보니 인디텍스그룹이 마케팅 비용으로 투자하는 것은 총 비용의 0.4%에 불과하다.
장애인 고용, 해안 안전과 산림 육성에 참여
오르테가는 자라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꾸준히 다른 콘셉트의 브랜드를 내놓았다. ‘풀앤베어’는 10, 20대 남성을 위한 브랜드이며 ‘버쉬카’는 젊은 여성층을 타깃으로 한다. 이너웨어 전문 브랜드 ‘오이쇼’, 액세서리 전문 브랜드 ‘우테르퀘’도 있다. 브랜드 인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라보다 한층 고급스러운 컬렉션을 선보이는 마시모 두티와 영캐주얼 브랜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인수해 다양한 연령층의 수요와 라이프스타일에 대응하고 있다. 패션브랜드의 역할과 패스트패션을 선도하는 역할에 걸맞은 행보다.
인디텍스그룹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경영으로도 유명하다. 이 기업은 납품업체와의 불공정한 거래를 통해 단기 이익을 취하는 꼼수 대신 장기적으로 스페인의 의류산업 전체를 키울 수 있는 비즈니스 자세를 선택했다.
인디텍스그룹은 ‘For and From’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새로 오픈하는 브랜드 매장에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직원을 고용하는 것으로 2002년 바르셀로나에서 오픈한 마시모 두티에서 처음 시행됐다. 현재는 6개의 매장으로 범위를 넓혔다.
이에 앞서 오르테가는 1986년 비영리 기관인 ‘파이데이아’ 파운데이션을 설립해 장애인이나 사회 소외계층을 돕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이밖에도 인디텍스그룹은 본사가 있는 라코루냐의 해안 안전과 산림 육성에 힘을 쓰는 ‘세이프 투 씨(Safe to Sea)’, ‘테라(Terra)’ 같은 프로젝트도 지방정부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세계적인 부호
세계적인 부호이자 세계적인 SPA브랜드를 만든 창업주지만 오르테가지만 그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2001년 기업 상장을 앞으로 처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냈을 정도다. 또, 부호답지 않게 검소한 생활로도 화제를 모았다. 세계 최대의 패션업체의 주인이지만 넥타이를 매는 것조차 싫어해 평소 청바지를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르테가는 2011년 7월,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성격 탓에 이임식도 치르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의 지근에서 경영을 함께 하던 파블로 이슬라 사장에게 전권을 물려주고 그렇게 인디텍스의 역사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평소 “모두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나도 그 중 한 명일 뿐이다”라고 말해왔던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얼마 전 흥미로운 기사가 보도됐다. 오르테가의 딸인 산드라 오르테가가 유럽 여성 중 가장 어린 부호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지난 8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 호살리아 메라의 자산 90% 이상을 물려받아 최고의 여성 부호로 올라섰다.
호살리아 메라는 아만시오 오르테가의 첫 번째 부인이자 인디텍스의 공동 창업주다. 11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13살 때부터 재봉사로 일했으며, 오르테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인디텍스를 세웠다. 이후 오르테가와 이혼하고 2004 년 인디텍스 이사회를 떠났지만 그룹 지분의 5.05%를 보유하고 있던 그녀는 지난 3월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호 순위에서 195위를 기록한 바 있다. 자수성가해서 모은 재산이 총 61억 달러(약 6조 7,900억 원)로 스페인 여성 중에서는 가장 부자였다. 그런 그녀가 지중해에 있는 스페인 메노르카섬에서 딸과 여름휴가를 보내던 메라는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오르테가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파블로 이슬라가 후계자로 지목되기 전까지 누가 오르테가의 뒤를 잇게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2007년부터 경영 공부를 하고 있지만 1983년생인 그녀가 경영을 맡기에는 아직 무리수였던 것. 이에 오르테가는 급성장의 주역인 파블로 이슬라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동안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탓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산드라 오르테가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어머니의 지분을 물려받은 그녀가 과연 인디텍스의 직접적인 경영에 참여하게 될지 아직은 불투명한 이야기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닌 탓에 사람들은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