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벨루티 가문이 발명한 벨벳은 짧고 부드러운 솜털이 있는 천 실크로 이탈리아에서는 벨루토, 일본에선 비로드로 불리고 우리에겐 우단(羽緞)이란 이름으로 친숙한 섬유소재이다. 종이와 일반 직물이 각각 1·2차 섬유라면 벨벳은 3차 섬유로, 1900년대 독일이 레이온과 아세테이트를, 일본이 재생섬유를 벨벳에 접목시켜 히트를 치면서 점차 대중화되었다. 이후 전량수입에만 의존하던 벨벳을 국산화해 현재 세계 최고·최대의 벨벳 생산 및 수출 1위를 자랑하는 영도벨벳의 류병선 회장을 만나보았다.

직원 모두가 가족인 가족친화형 기업
1995년, 창업주 故 이원화 회장은 제직공정부터, 염색가공, 완제품에 이르는 제대로 된 생산라인을 갖추기 위해 해외 리스를 통해 대규모 시설투자를 했다. 하지만 이내 외환위기란 거대한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1997년 IMF가 닥치자 원화 환율이 폭등하면서 부채가 배로 불어났습니다. 50년 가까이 사업을 하면서 법정소송 등 숱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1997년은 최악의 위기였습니다. 남편과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빈손으로 했기에 잃을 것도 없었고, 이 세상에 나면서 제가 가져온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처음과 같이 시작하자’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가 문제였다. 원금 상환은커녕 높은 이자 갚기에 급급했다. 결국 워크아웃까지 갔다. 은행을 찾아가 “영도벨벳이 무너지면 앞으로 벨벳은 다 수입 해야한다”며 당당히 말했던 류 회장. 우선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대구 공장을 처분하고, 당시 440명되던 직원들의 구조조정을 통해 빚을 줄여나갔다. 그러한 위기에도 세계시장을 다니며 마케팅 투자에 활발히 나섰고, 해외 전시회에 꼭 참가해 최신 트렌드를 살폈다. 또 회사를 살린다는 일념으로 류 회장도 함께 밤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하며, 모두 한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일했다. 그 결과 2004년, 2년 반 만에 워크아웃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2003년 직원들에게 30%의 성과급을 주면서 큰절을 했습니다. 회사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직원들이 저를 믿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섬유업체에서 고부가가치 IT소재 기업으로

LCD 표면 처리에 사용되는 ‘러빙포’는 스마트폰과 TV, 모니터 등에 들어가 LCD 화질을 선명하게 하고 제품 수명을 늘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국내에서는 전량수입에만 의존해 오다 2008년 세계 최초 아세테이트 재질 러빙포를 개발한 영도벨벳이 점차적으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다. 러빙포용 벨벳은 일반 의류용 벨벳보다 2배 이상 밀도가 높아야하기 때문에 개발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영도벨벳의 러빙포는 기존의 일본 제품보다 공정이 간편하고 가격이 저렴한 반면 LCD의 시야각과 명도, 색상구현, 터치감은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디스플레이 러빙포의 직조 및 가공기술 향상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와 반도체 공정에서 이물질을 제거하는 신제품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는 영도벨벳은 53년간 이어온 벨벳분야의 독보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IT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최초 벨벳 전문 전시관 ‘영도다움’


벨벳 우리옷 패션쇼
영도벨벳에서는 벨벳의 고유기능을 살려 벨벳으로 만든 40여종의 한복과 일상복을 선보인 ‘벨벳 우리옷 패션쇼’를 개최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벨벳의 다양한 활용도를 표현한 패션쇼는 고급제품으로 알려진 벨벳이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으며 이번달에도 벨벳의 대중화를 위해 ‘제2회 벨벳 우리옷 패션쇼’를 개최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모았다.
영도벨벳은 특히 가족친화형 기업으로 유명하다. 집이 없는 직원들에게 집을 제공해 주고 자녀 출산·양육비 및 장학금 지원 등 각종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1년부터 매년 대구·경북지역 학생 108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자투리 원단을 활용한 나눔 프로젝트인 ‘어메이징 벨벳’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9년에는 구미시장학재단과 계명대에 각각 1억원씩의 장학기금을 내놓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