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공양하고 불도 닦으며 공덕을 쌓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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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공양하고 불도 닦으며 공덕을 쌓는 곳
  • 이성훈 기자
  • 승인 2013.11.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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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에 둘러싸인 복전암, 태초의 역사 감추고 있는 듯 신비로워

절은 수도하는 사람들, 혹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인 공간이 아니다. 종교배척사상이 강하게 나타났던 지난날과 달리 시대가 지날수록 종교적 이해와 포용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세상의 문물이 발달할수록 많은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세상의 번거로운 일과 관계를 끊기 바라며 사회에게 받은 신체적·정신적 상처 치유법으로 종교 활동을 선택한다. 특히 종교적 성향이 다른 점을 활용하여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를 희박하게 줄여나간다. 절은 우리 모두의 공간이며 또 그 속의 문화재는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문화재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대전광역시 보문산 한편에 자리 잡은 사찰 ‘복전암(경순 주지스님)’은 복전선원을 개설한 비구니 스님들이 도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곳으로, 마음의 치유를 비롯하여 심신(心神)과 심신(深信)의 단련을 바라는 불자들의 신앙처이자 마음의 쉼표 공간이다.

경순 주지스님에게 듣는 복전암의 역사

 
현재 복전암이 위치하고 있는 보문산(普門山)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옛날, 무수한 사암(寺庵)이 있었던 곳이라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대전 팔경(八景) 중 하나인 보문산은 예부터 ‘보물이 묻혀 있는 산’이라 하여 ‘보물산’으로도 불리었고, 혹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성지’라 하여 ‘보문산(普文山)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름에 대해 전해지는 수많은 이야기는 보문산이 그만큼 유서 깊은 산임을 말해준다. 한편 문화재인 산 동쪽의 ‘범바위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은 자연 상태의 바위에 새겨진 불상으로, 오랜 풍파 속에 본래의 모습이 많이 변화하였지만 불상 자체에서 새어나오는 은근하고 자비로운 미소는 성스런 상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범바위 마애여래좌상은 1990년도에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철저한 보호 속에 불상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복전암 주지스님 이경순(李景順) 큰스님은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대에 전쟁을 피해 몸을 숨기고자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을 떠났다. 이후 스님은 “살기 좋고 경치 좋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비탈지에 산세가 우거져 난리를 피하고 수행하기에 좋을 것이다”는 고봉선사(古峰禪師)의 종용의 말씀을 받들어 복전암으로 수행의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고, 이후 스님은 1954년 갑오년에 원통선원(圓通禪院)을 지어 고봉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비구니 선원(禪院)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복전암은 조악한 산비탈에 토막집 두어 칸이 전부였던 곳으로 의식주 해결조차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나, 원주 홍재운 스님과 함께 대중을 거느리며 선원 증축과 운영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 결과 식수 개발과 전기 개설은 물론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고 현재 대웅전, 삼성각, 요사, 취사실, 일주문, 종각 등을 신착하여 도량을 일신한다. 주지스님은 어려운 시기에 물심양면으로 힘을 다해 도움을 준 청신사 정세영, 김헌석, 권중한, 김근용, 김만기 외 16명과 청신녀 김영숙, 연고경월 외 6명을 비롯해 칠성회원과 관음회원, 문수회원 등의 보시 공덕이 있었기에 현세에 이뤄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성과라며 모든 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복전암은 1981년에 모든 건물과 임야, 대지 등을 ‘재단법인 선학원’에 등록하였고, 이어 8년이 지난 1989년도에 전통사찰로 지정받게 된다.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금년 2월22일에는 대웅전에 모신 목조 ‘대세지보살상’이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받으며 사찰의 역사와 명예로 지역 사회의 좋은 이미지를 전국 각지에 드높이게 되었다.
▲ 대전시 유형문화재 19호로 지정된 ‘범바위 마애여래좌상’은 자연상태의 바위에 새겨진 불상으로, 오랜 풍파 속에서도 자비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사진협조_박융)
1925년 4월22일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어미의 태(胎)로부터 세상을 향해 나온 경순 주지스님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삼남매가 함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내왔다. 어려운 나날에도 행복한 일가를 가꾸고자 소매를 걷어붙였던 큰스님의 어머니는 가정 내 두루 평안을 위해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뜻 깊은 가르침을 얻고자 절을 찾곤 했다. 그러던 중 “아이를 출가시켜라”는 스님의 한 마디 말씀에 아직은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경순 스님은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법주사의 말사인 여적암에서 삭발을 감행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스님의 나이는 고작 6세. 보통의 아이라면 코흘리개 철부지였을 이른 나이 때부터 승려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80여 년째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불도를 닦는데 여념이 없다.

다음은 경순 주지스님이 청년 시절에 들었던 큰스님
좌담 법문 중 한 내용이다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금생에 이 몸을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
“마음의 심월(心月)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즉, 본래 있는 것이다. 칠팔월 장마에 운무가 잠시 흩어진 사이에 보이는 빛이 여우빛이니라. 그것이 심월인데 심월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여래의 빛이다. 어린 아이는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달, 달’하고 말하면 하늘에 떠있는 달 대신 제 아이의 손가락 끝을 본다. 여래를 찾아라. 그것이 극락이고 도솔천이다. ‘인신난득 불법난봉’이라 했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너의 마음을 찾아라.”
경순 주지스님은 큰스님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품고 부처님의 제자로서 불도의 실천으로 어린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 고행의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올해로 89세를 맞이한 복전암 경순 주지스님은, 허리를 빳빳이 펴고서 자신의 생이 다할 때까지 모든 중생의 공생과 부처의 공덕을 기리며 법문을 하고 참선 정진할 것이다. 자비와 평등과 보시와 지계, 그리고 인욕을 위해….
 

▲ 대전광역시 보문산에 위치한 복전암은 경순 주지스님의 큰 가르침 아래 비구니 스님들이 불도를 닦는 사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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