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이명박)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개혁 의지에 점수를 줬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 등으로 가산점이 붙은 만큼 박근혜 대통령은 여느 대통령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기대 밖이라면, 이명박 정부 때 평가를 유보했던 일들까지 다 이어지기 때문에 마치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 때 중간 선거 패배 후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것처럼 될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국내 정치 난제들을 풀기 위한 고심에 빠졌다.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한 북한과 기초노령연금 축소 논란, 거듭된 인사참사 등이 그것. 여기에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과 이석기 사태까지 겹친 복잡한 정국은 박 대통령에게 큰 딜레마다. 이처럼 ‘첩첩산중’인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크게 경제와 비경제로 나눠 분리 대응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선 국정의 중심을 경제 활성화와 민생에 둔다는 원칙 아래 민생 문제인 기초연금 논란은 국민을 설득하는 정면 돌파 전략을 펼칠 공산이 크다. 반면 비경제 문제인 대북과 야당, 종북 논란과 채동욱 사태,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은 해당부처나 정치권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기존의 ‘마이웨이’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사면초가
가장 큰 문제는 최근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제기됐던 의혹보다 강도가 센 새로운 내용이 드러나고, 국군 사이버사령부 일부 요원들이 대선 관련 댓글을 단 것으로 드러나면서 정국이 급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정부 초기 인사실패와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추문 이후 여권이 정국을 주도해 왔지만 국감에서 댓글 관련 악재가 잇따라 터지면서 정국 주도권이 야당으로 반전되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해 야당으로부터 입장 표명을 요구 받을 때마다 ▲대선에서 국정원의 도움을 받은 일이 없고 ▲강도 높은 국정원 내부 개혁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책임자 처벌 문제는 법원의 판결을 보고 할 문제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 댓글수사팀이 국정원 심리전단 트위터에서도 5만 5,689회에 걸쳐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글을 올리거나 리트윗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 댓글 작업에 관련된 국정원 직원 3명을 체포까지 했다가 절차상의 문제로 풀어주고, 윤석렬 팀장이 이 문제로 수사팀에서 배제되면서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팀장이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에게 공소장 변경을 구두 보고했고 4차례나 승인 받았다고 진술하면서 검찰 수뇌부가 여권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댓글 수사를 축소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민주당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들의 댓글 작업은 여당 후보를 지지하고 야당 후보를 폄훼하는 정도가 심해 법원이 윤석렬 팀장의 최후의 작품인 공소장 변경을 승인할 경우 국정원 댓글 재판에 상당한 영향을 치밀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도로 군이 총선과 대선에 개입한 정황도 드러났다. 국군 사이버사령부 일부 요원들이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특정 후보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글을 올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군 차원의 정식 수사가 시작됐다. 군 사이버 사령부 요원들의 댓글의 경우 일부 직원들의 일탈로 치부할 일은 아니어서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메가톤급 파괴력을 예고하고 있다.
국정운영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의 존재감이 미미하고 청와대가 전면에 부각된 상황에서 국정원·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문제는 곧바로 박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진다. 당장 민주당에서는 정세균 의원이 명백한 부정선거라며 고강도 2차 투쟁을 제안하는 등 공세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는 정권 초기 박 대통령이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해 큰 틀에서 사과를 했으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텐데 ‘외통수 관리’가 오늘의 사면초가를 불러왔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현재 청와대 내부적으로는 국정감사 상황과 검찰·법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국정원·군의 댓글 사건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는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악재 또 악재
기초연금안으로 촉발된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항명 파동’도 부담이다. 특히 진 전 장관이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묵살 당했다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박근혜 정부의 불통(不通) 논란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양상이다.
민주당에서는 “복지공약 주무부처 장관의 해명 기회조차 묵살할 정도면 국민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준다는 말인가”라며 ‘불통 청와대’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라는 입장이다. 나아가 해당 언론사에 허위 보도에 대한 정정보도를 청구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히며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가 언론을 상대로 정정보도를 청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근 “진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충분히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며 “한 번도 면담 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사퇴와 관련해 청와대 외압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청와대가 전혀 관여한 일이 없다”며 “검찰총장의 사생활·품위·도덕성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새누리당이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10·30 재보선 경기 화성갑 보궐선거 후보로 친박근혜계 원로인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를 확정했던 것도 박 대통령으로서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청와대가 서 전 대표의 공천을 지시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비공개 의결 절차로 공천이 확정되자 새누리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더해 진 전 장관의 사퇴로 공석이 된 복지부 장관 자리를 비롯해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후임자는 내정됐지만 공공기관장 등의 인선도 시급하다. 현재 관치 논란으로 잠정 중단됐다 재개한 공공기관장 인선 작업은 9월 중 마무리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진행 중이다.
첩첩산중
앞서 박 대통령은 여야 대표 간의 ‘3자 회담’을 통해 어수선한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반전의 기회를 꾀했지만 각종 현안에 대한 여야 간 입장차만 확인했을 뿐 사실상 ‘파행’이란 초라한 결과물만 얻어냈다.
당초 박 대통령은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하반기 최대 국정과제인 일자리 창출과 다자·세일즈 외교에 박차를 가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연휴 기간 중 북한이 돌연 이산가족 상봉 연기를 선언했고, 진영 복지부 장관이 기초노령연금 축소에 책임지고 사퇴했으며,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일부 요원들이 대선 관련 댓글을 단 것으로 드러나면서 난제가 해소되기는커녕 더 꼬이고, 더 쌓이는 꼴이 됐다.
이 같은 여러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박 대통령의 리더십 부활이 시급한 상황이다. 당장 정부의 기초연금 최종안이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부 최종안은 ‘65세 이상 노인의 70% 내지 80%에만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경제적인 형편을 고려해 최고 20만원 한도에서 차등 지급’하는 방안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하지만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후퇴한 것이라는 야당의 비판이 거세 적지 않은 잡음이 예상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내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로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인 데 반해 기초연금을 하위 70%만 지급해서는 노인 빈곤해소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더군다나 지난달 국정감사를 통해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제기됐던 의혹보다 강도가 센 새로운 내용이 드러나고, 국군 사이버사령부 일부 요원들이 대선 관련 댓글을 단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난제는 첩첩산중이다.
인사 난맥
또 그간 수면 아래에 놓여 있던 ‘개각’ 논의도 본격화되고 있다. 앞서 청와대는 8월5일 대통령 비서실장 등 청와대 참모진 개편 때 개각 전망도 잇따르자, “장관 교체는 없다”(이정현 홍보수석비서관)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최근의 인사파동을 계기로 ‘연내 개각’ 쪽에 다시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으로선 가뜩이나 얼어붙은 대야(對野) 관계 속에서 정기국회 회기 중 내년도 정부 예산안과 주요 법안 처리에 힘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국회 인사청문회를 원만히 통과할 새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 부담이 된다.
‘마이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측은 박 대통령이 쌓이는 난제들과 관련, 경제 활성화와 민생에 국정의 중심을 둔다는 기조 아래 분리 대응전략을 구사할 것이라며 ‘호언장담’하고 있다. 이는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경제 활성화와 민생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통해 민심과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기초연금은 이런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정면 돌파’가 점쳐진다.
반면 비경제 문제에 대해선 철저히 거리두기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대북과 야당, 채동욱 문제, 국정원 댓글 사건과 거리를 두고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세우고 있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비경제 문제에 대해 청와대가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취하면 더 헝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해당부처 또는 정치권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놔두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여야 간 날 선 대치도 여전히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다. 민주당이 지난 9월23일 원내 투쟁 강화를 주장하며 국회 전면복귀를 선언했지만, 시민단체와 결합해 국정원 개혁촉구 등 장외투쟁의 강도도 높여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야당의 정기국회 복귀는 결산과 국정감사 등을 통해 국가정보원 개혁과 함께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 논란, 국정원·군 댓글 사건, 복지와 경제민주화 후퇴 등을 쟁점화 하겠다는 복안에 따른 것이어서 정부가 민생입법과 예산심의 과정에서 야당의 협조를 얻어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이 입법과 예산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국정운영은 급격히 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국내 정치 개입 금지 등을 골자로 한 국정원의 자체 개혁안도 그 내용에 따라 정국 상황을 더 큰 ‘혼돈’으로 몰고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