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명성 황후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명성 황후(1851∼1895) 시해 106주기를 맞은 지금, 황후를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그 어느 때 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뮤지컬<명성 황후>나 드라마<명성 황후>, 다큐멘터리<다시 살아오는 국모, 명성 황후>가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 중 KBS 드라마 관계자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무엇보다 민족사관에 기초한 우리 역사의 바로 보기와 역사를 통한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하며 기획의도를 밝혔다.
예전에는 명성 황후가 ‘사악한 암탉’’부끄러운 과거’로 인식되었으나 명성 황후의 죽음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명성 황후는 ‘당대 최고 정치가’ 이자 ‘애국 혼(魂)의 화신’으로 우리 앞에 다시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명성 황후는 어떤 사람일까? 왜 우리는 그녀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고종의 정치적 방파제 역할
명성 황후의 삶에서 가장 먼저 재평가되고 있는 부분이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관계이다. 고종보다 한 살 위인 그녀를 왕비로 간택한 사람이 대원군이었다. 당시 어린 고종을 대신해 강력한 섭정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대원군은 자기 어머니와 아내의 가문이기도 한 여흥 민씨 집안에서 며느리를 들임으로써 지지 기반을 확대하였고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시부모를 공경하며 <춘추좌씨전>을 즐겨 읽던 총명하고 지혜로운 며느리는 시집온 지 10년 만에 시아버지를 권좌에서 내모는 중추 역할을 하게 된다.
기존 역사가들은 황후의 권력욕이 이 같은 사태를 불렀다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이배용 교수는(이화여대, 사학)는 지난 10월 8일 여주대학이 주최한 ‘명성 황후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명성 황후는 그 자신이 권력욕의 화신이라기보다 대원군과 고종 사이에서 대리전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873년 12월 대원군이 밀려난 데에는 사실상 고종의 결심이 크게 작용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서원철폐령을 비롯한 잇단 실정(失政)으로 유림의 거센 반발을 사 실각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갈등은 그로부터 2년 전 고종이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승호 등 황후의 친척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면서부터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교수의 설명이다. 당시 고종의 나이 22세, 성인이 된 왕은 스스로의 정치 노선에 따라 친정(親政)을 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법했다. 당시 고종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한 아버지의 경직된 국정 운영에 이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효의 윤리에 적용해 아버지와 직접 충돌하는 것은 도덕적인 부담이 너무 컸다. 이러한 남편의 욕구를 대신하여 대원군과 정면 충돌한 것이 바로 황후였다. 대원군 처지에서도 임금에게 직접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천륜에도, 유교적 충(忠)의 윤리에도 맞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 또한 화살을 황후에게 돌려 우회적으로 고종의 독자 노선을 견제하려 했다는 것이 이교수의 분석이다.
고종과 명성 황후의 관계에서도 그녀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푸는 하나의 실마리가 나타난다. 그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왜 황후는 각종 변혁 운동이 있을 때마다 왕을 제치고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까’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를 죽이려 든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임오군란(1882)을 일으킨 보수파 군인과 유생에게나,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급진 개화당에게나 그녀는 핵심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이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황후의 개화 정책은 곧 고종의 개화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유교적 충의 때문에 고종에게 직접 대항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우회해서 택한 길도 황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일급 참모, 외교관 명성 황후
이민원 박사(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에 따르면, 황후는 여러 차례 변란을 겪으면서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일급 참모’라는 위치를 다져 갔다. 황후에 대한 고종의 의존도는 날로 높아졌다. 특히 대외 관계에서 명성 황후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외국인의 방문기에 황후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1883년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는, 그녀를 ‘뛰어난 침착성’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황후를 만난 영국의 여행가 비숍 여사는 이렇게 썼다. ‘당시 황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황후를 자주 만났던 언더우드 부인의 기록은 좀더 분석적이다. ‘그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외교관으로서의 황후는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런 문제를 처리할 때면 황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한다(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의 일기).
황후의 외교 감각은 대단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노골적으로 변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을 시도한 것도 명성 황후였다. 그후 조선·일본간에 곡물 수출을 둘러싸고 이른바 방곡령 사건(1892∼1893)이 터지자 장차 조선 반도에서 청나라보다 일본의 위협이 더 거세질 것을 재빠르게 간파한 것도 황후였다. 당시 러시아 외상은 청일전쟁이 임박할 때까지도 일본의 위협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외교 정책의 실패, 그 후
명성 황후가 주도한 대외 정책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녀가 조선의 독립을 일관되게 추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황후라도 당시의 요동하는 국제적 역학 관계를 꿰뚫기에는 시대적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비판론자들은 명성 황후가 청일전쟁을 전후해 친일 반청 반일로 부나비처럼 ‘널뛰기 외교’를 하는 바람에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황후가 3국 간섭의 틈을 타 시도한 외교술은 황후 자신의 명조차 재촉하고 말았다.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일본에 할양하기로 했던 랴오둥 반도를 되돌려주도록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공동 권고한 사건을 말한다(1895년 4월). 이로써 청일전쟁의 승리에 들떠 있던 일본의 기세는 주춤해졌다. 그러자 황후는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누리던 특권을 러시아에 몰아줌으로써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이른바 ‘인아거일책(引俄巨日策)’ 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황후는 친미(親美)도 추구함으로써 ‘거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황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친절을 러시아 정부의 호의로 착각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 최문형 교수(한양대 명예교수)의 지적이다. 이창훈 한라대 총장(국제정치)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 정부는 조선 문제에 적극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시베리아 철도 완공에 명운을 걸고 있던 러시아는 만주를 침해당하지 않는 한 일본과 충돌할 의사가 없었다. 결국 황후는 제국 열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일본의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다. 서울에 거류하는 일본인 사이에는 이미 1895년 초부터 ‘여우(황후)’를 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이는 명성 황후가 그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의 계속되는 역사 왜곡
명성 황후의 시해 사건은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배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사건 당시부터 일본측은 철저히 사건 은폐 및 왜곡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사건 직후 미우라 공사는 대원군이 이 사건을 주모했으며 황후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위증했다. 또한 사건이 난 이듬해 공정한 재판을 통해 불명예를 씻겠다던 일본 정부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범죄와 관련된 일본인을 모두 무죄 방면했다(1896년 1월). 일본 정부 요원들은 이 사건은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이라며 일본 주재 서양 외교관들에게 주장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황후 시해에 참여했던 기쿠치 겐조·고바야카와 히데오 등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 신문사)의 일본인 기자들이 훗날「대원군」「조선근대사」「조선잡기」「민후조락사건」같은 저작을 통해 19세기 말의 한국사를 대원군과 명성 황후의 갈등 구도로 날조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다수 일본 언론은 일본 정부의 오도된 주장을 선전하는 대변자 노릇을 했는데, 영자 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령 <저팬 데일리 메일>은 명성 황후가 부정 부패의 원흉으로서 이번 사건은 그녀가 국정을 농단하고 망치는 것을 보다 못한 대원군이 일으킨 쿠데타라는 식의 보도를 계속했다. 이런 영자 신문의 보도는 서양인들을 향한 왜곡된 선전이었다.
이 사실은 러시아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시해 사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박종효 전 모스크바 대학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찾아냈으나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문서이다. 당시 조선에서 러시아가 차지했던 비중을 보여주듯 이 문서는 무려 A4 용지 3백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중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시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본국으로 보낸 공문에는 고종·순종을 비롯해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한 7명의 증언록이 첨부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고종은 칼을 들고 왕의 내실에 침입한 일본인 중 3명의 이름을 거명했는데,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 류노스케·스즈키·와타나베가 그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오카모토와 스즈키 두 사람이 왕비를 잡으러 나갔다”라고 진술하다 실신했다고 한다. 그 시간에 왕후의 처소인 옥호루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상궁은 이렇게 증언했다. “왜인들이 왕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중략) 이때 왕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그는 왕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세 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찔렀다.”
이는 도망가는 조선군 사이에 섞여 옥호루 인근까지 밀려갔다가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사건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기자 사바틴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이 했던 증언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본국에 우송되었기 때문에, 구미권 연구자에게는 널리 알려진 자료였다. 그러나 이번에 박교수가 발굴한 증언록은, 사건이 일어난 3주 뒤 중국 치푸로 이동한 사바틴이 다시 기억을 더듬어 정리한 것으로, 사건 직후 증언록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왕후의 처소 앞에서 목격한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내가 뜰에 서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0∼12명 가량 되는 여인들의 머리채를 끌고 와 창문 너머 마당으로 이들을 내던졌다.(중략) 마당에 나뒹구는 여인들은 아무도 신음 소리나 고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 외에도 사바틴의 보고서는 일본군이 치밀하게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 후 제물포 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함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고도 보고하고 있다. 그는 분명 일본 정부가 시해 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결론짓고 있다. 또한 사건의 주요 무력 기반이 일본군이었음도 한국사 연구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해 밝혀졌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이 사건의 배후 구도가 어떠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 사건을 왜곡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 이처럼 왜곡되기만 한 한국사가 오늘날 서양의 역사 교과서에 일본이 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명성 황후를 둘러싼 논란은 끝나지 않고 계속 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치열하고 해묵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바로 명성 황후 사진의 진위를 둘러싼 것이다. 이 중 가장 많은 시비를 불러일으킨 사진은 이탈리아 영사 카를로 로제티가 「한국 한국인」(1905년)에 실은 사진이었다(이 사진은 한 때 중학교 국정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 사진이 진짜라고 주장해 온 이태진 교수(서울대 국사학)는 최근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증거 자료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인 아장 박사가 「르 투르 뒤 몽드」(1904년)에 실은 사진이 그것이다. 배경만 서로 다를 뿐, 이 사진과 로제티의 사진에 찍힌 인물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수는 아장 박사의 사진에 ‘명성 황후’라는 설명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진짜 황후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진이 진짜일까? 먼저 역사적 맥락을 돌아보자. 문제의 사진은 1945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일본의 기록 모두에서 궁녀로 알려졌던 것이다. 1905년 도쿄에서 발간된 「한국 사진첩」에 ‘궁중의 여관(女官)’이라고 소개된 이 사진은 1911년 도쿄에서 출판된 「한국 병합 기념첩」에 ‘궁중 노관녀’라고 설명되어 있다. 어의였던 미국의 언더우드 여사는 수기에서 이 사진을 ‘정장한 한국 여인(a Korean lady in full custome)’이라고 해설했다. 그리고 <조선일보> 1935년 1월 1일자에 이 사진과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이 밝혀졌다. 기사는 이 사진을 소개하며 ‘이것은 큰 머리에 큰 옷을 입은 육십 년 전의 부인네올씨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자료들로 볼 때 로제티의 사진은 명성 황후가 아니라 조선의 풍속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인 기록 사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광복 이후 일본에서 발간된 자료에는 이 사진이 명성 황후로 설명된다. 시해 가담자 오하야가야 히데오의 수기를 실은 제계논픽션전집 37권「민후 암살」편과, 1981년 편찬된 일·한 외교사료 제 5권「한국 왕비 살해 사건」에서 이 사진은 명성 황후라는 설명과 함께 실렸다.
이처럼 궁녀 사진이 명성 황후 사진으로 둔갑하자 일부에서는 ‘황후를 모독하기 위해서 일부러 궁녀 사진을 썼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태진 교수는 항일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이 황후 사진을 궁녀 사진으로 조작했다는 ‘역음모론’을 폈다. 그렇지만 이는 외국에 명성 황후로 잘못 알려진 궁녀 사진을 일본인들이 사용하고, 이를 다시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가져다 쓴 데서 생긴 착오일 가능성이 있다.
신국주 동국대명예교수는 공식적인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도 이 사진이 국정 교과서에서까지 실렸던 것은 국내 역사학계의 책임 방기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만행을 왜곡시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때를 잘못 만난 비운의 여성’ 민족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여성사적으로나 지금 역사는 그녀가 복권되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