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없는 이 나라, 역사는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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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없는 이 나라, 역사는 이어질 수 있을까?
  • 시사매거진
  • 승인 2003.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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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한심한 기록물관리, 책임회피 위한 의도적 행동인가?
참여연대 한 관계자는 지난해에 씁쓸한 경험을 했다. 행정정보공개청구에 대한 정부의 회신 때문이었다. 지난해 10월 27일 열린 ‘기업지배구조 개선방안 관련 결제장관간담회’등에 대해 행정정보 공개를 청구했으나 되돌아온 것은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아 이미 언론에 공개된 자료 이외에는 공개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이 관계자는 “사실 행정정보공개를 청구할 때 ‘작성을 안 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막상 예상이 들어맞자 정말 씁쓸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결국 주요 정책 결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안 지겠다는 태도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기록에 대한 인식수준
실제 정부의 기록물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국정의 최고 의결기관인 국무회의도 여전히 회의록이 없어 의결 내용을 중심으로 실무적으로 필요한 사항만을 간단히 요약해 놓을 뿐이다. 그러므로 국무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정부여당간 정책협의를 위한 당정협의회도 회의록을 남기지 않는게 관례처럼 굳어져 있다. 당정협의회는 집권당 정책위의장과 관련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사실상 핵심적인 정책결정과정이기 때문에 이 회의 결과에 따라 국가 정책의 향방이 결정되는 상황임에도 회의 내용을 보고서로 만드는게 전부이다. 또한 지난해 12월 26일 열린 경제장관간담회는 최근 구조조종의 후퇴와 현대계열사 특혜 논란을 빚고 있는 산업은행의 부실회사채 인수방침이 결정된 중요한 회의였다. 이날 결정으로 최대 10조원 가량의 부실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떠안게 돼 산업은행의 부실 회사채 인수는 사실상 국민이 부담해야 할 공적 자금이 됐다. 그런데 이 간담회도 회의록은 없다. 재정경제부는 “비정기적이고 비공식적인 간담회 성격이어서 회의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과거 IMF 당시 정책 결정과정을 밝혀 줄 기록물이 없어 책임자 규명을 하지 못했던 역사적 교훈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공개될 경우 폐해가 우려되면 외국처럼 30년 뒤에 공개하도록 한다든지, 비공개로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해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개의 폐해 때문에 기록조차 안 남긴다는 것은 지나친 행정 편의적 발상이다. 현대사 연구가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물이 풍성했던 조선조 연구보다 더 힘들다는 소리가 나돌고 있는 형편이다.

기록한 문서도 없애니…
기록문서의 허술한 관리

정부기관의 기록물 보존관리는 97년 옛 총무처에서 만든 ‘공문서 분류 및 보존에 관한 규칙’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이 규칙은 기록물을 1년, 3년, 5년, 10년, 20년, 준영구, 영구 등 7가지 기준으로 분류해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준영구보존기록물과 영구보존기록물은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된다. 현재 각 행정 기관이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하지 않고 자체 보관하고 있는 기록물은 모두 480만군으로 추산되고 있다. 문제는 각 기관에서 운영하는 문서고가 대부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한 관계자는 문서고 관리가 얼마나 엉망인가를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1992년 발생한 노동운동가 박태순씨의 사망사건과 관련해 서울의 한 구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담당직원에게 ‘행려사망자처리부’를 보여 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기록 본존연한이 5년인 것 같은데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속는 셈치고 문서고를 뒤졌는데 기록을 보관하는 문서고에는 난로, 소파, 폐자재 등이 함께 있었다. 한마디로 창고였다. 문서마다 먼지를 뒤집어쓴 것은 물론이고 연도별 분야별 분류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라며 그 관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문서관리인력 부족 심각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99년 12월 제정된 공공기관기록물 관리법은 기관마다 자료관을 따로 설치해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석사학위 이상의 기록관리 전문요원이 표준화된 문서관리 방식에 따라 기록물을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제 법에 따라 자료관이 설치된 곳은 정국에서 경기도 교육청 단 한 곳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어떤 기록을 공문서로 볼 것이냐’와 관련된 공무원들의 판단 기준이다. 대부분 행정기관은 결재 받은 문서만 공문서이고 따라서 보존대상도 결재 서류에 국한한다. 재경부의 한 서기관은 “통상 업무를 추진할 때 관련 사항에 대해 보고도 하고 내부회의도 몇 차례씩 하게 된다. 이때 보고자료나 회의 자료는 거의 필수다. 그렇지만 이들 자료를 모두 보관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업무추진 내용이 최종 결정되면 그때 공문서를 따로 기안해서 결재받고 문서만 문서등록대장에 기록하고 보관하게 된다.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한다”고 말했다. 결재받은 서류만 공문서라는 개념인 것이다.
정부의 기록물 관련 정책은 후퇴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정부는 지난 1월 공공기관기록물관리법 시행령을 고쳐 애초 전체 발언록을 싣도록 했던 회의록을 요지만 적도록 개정하고 기록물의 전산등록 의무화를 기술적인 이유로 3년 유예해 한국국가기록연구원 등 기록전문기관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다. 한상완 기록관리학회장은 “정부의 정책의지가 의심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정책기관부터 기록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익환 명지대 기록관리학과 교수는 “기록물의 등록시스템 개선이야말로 공공기관기록물 관리법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예한 것은 이 법을 사실상 실시하지 않겠다는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가개혁 차원에서 제정된 공공기관기록관리법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
100년전 유언장까지…
문서보관 역시 선진국
문명선진국의 과거기록에 대한
철저한 보관과 활발한 연구의 현장

한 사학자의 증언을 통해 본
미국의 기록물 관리

1982년. 갑신정변 실패 뒤 미국에 망명한 변수와 서광범의 사적을 추적하고 있던 방선주씨는 서광범씨가 1897년 8월 13일 워싱턴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할 당시 ‘구두유언’이 있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찾아 막연한 기대감으로 낯선 시청건물을 찾아갔다. 그 케케묵은 방에 들어가 원하는 이의 이름을 써 주었더니 빛바랜 봉투 하나를 내 놓으며 복사해 줄것이가를 물었다. 번잡한 수속없이, 신분증 제시도 요구치 않고 원하는 정보를 주는 것이 한국과는 참 대조적이었다고 설명하였다. 100년 전의 문서관리도 잘 되어 있는 것, 이것이 미국문서관리의 참 모습이다.

국가 기밀과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 일부문서 공개금지도…

미국정부의 각 부처는 일정기한이 지나면 그 보유문서를 기록보존소에 예탁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다. 메릴랜드주 스트랜드라는 고장에 가면 국립기록보존소 본부가 있고 여기에 국무부, 내무부 등 각부처가 자기들의 문서를 쌓아놓는다. 국립기록보존소에서부터 국립고문서관이 문서를 입수했어도 연구자가 곧바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곳의 문서연구관들이 다시 일반 연구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엄격히 구별하기 때문이다. 일반 연구자들에게 보여줘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문서들 사이에도 간간히 여기서부터 어디까지는 열람금지 돼 보류되었다는 쪽지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모두가 개개인의 사생활 침해 조항에 저촉하여 빼놓은 것들이다. 즉 북쪽 어느 마을의 밀고자 명단, 전쟁 중에 남쪽에서 북으로 피난간 인사들이 명단 같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것은 검열한 사람이 일을 했다는 증거를 남겨놓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어찌하든 개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자세가 돼 있어 과연 미국이로구나 하는 호감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미국의 문서비공개의 2대 원칙은 국가기밀 유지와 개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차원이다. 국가기밀 유지는 당연히 국익계산이 그 밑에 깔려 있겠다. 한국관계 국무부 문서나 육군문서안에는 ‘ACCESS RESTRICT ED’라는 카드가 무수히 삽입되어 있고 정보자유법에 의해 기밀해제신청을 하여 될 것이 있고 되지 않을 것이 있다. 될 것은 프라이버시 당사자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이미 고인이 된 경우였다.


<조선실록>
역사기록의 모범답안, ‘조선왕조실록’
공정한 기록으로 꼼꼼히 집필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분량과 풍부한 내용 그리고 가장 긴 시기의 기록을 빠짐없이 담았다는 점에서 세계 기록문화의 꽃이다. 실록은 완성된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기록이자 자료이다. 실록편찬은 춘추관이 맡았다. 실무자인 사관은 여러 부서에서 고루 뽑았다. 사관을 여러 부서에서 뽑은 것은 국정을 고루 반영하려는 취지였다. 사관으로 뽑히면 대단한 영광으로 여겼는데 대개 20대의 젊고 지식과 기개가 있는 청년들이었다. 사관은 임금의 비서인 승지와 함께 순번을 갈라 궁중에서 숙직하였다. 사관은 언제 어디서나 붓을 귀에 꽂고 먹물통을 차고 종이를 들고서 임금이 나다니는 곳은 어디고 따라다녔다. 임금 잠자리에도 필요하면 가서 적었다. 사관과 승지는 그때 그때 듣고 본 사실을 기록하여 보관하였다가 월별로 작성하여 춘추관에 넘겨준다. 이를 ‘사초’라 한다.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었다. 상급 관리자도 보아서는 안 되며 임금도 볼 수 없었다. 사관이 사초의 내용을 누설하면 엄한 벌을 받는데 때로는 벌금을 물거나 쫓겨나기도 하였다. 실록이 완성되기 전의 사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사관의 공정한 직필을 보장하려는 뜻에서였다.

소실을 대비한 분산 보관

편찬기간은 최소 1-2년에서 최고 10여년까지 걸린다. 실록이 완성되면 네부를 등사하여 춘추관에 한부, 충주, 성주, 전주사고에 각각 한부를 보관하였다. 전쟁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각지에 분산해 보관하였던 것이다. 이런 우려대로 임진왜란 때에 사고가 소실되었을 때 전주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복원할 수 있었다.

그 위대한 역사기록에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간간히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다.
<태조실록>이 완성되고 나서 내용이 번잡하고 중복된다고하여 고치자는 실록 참여자들의 주장이 있었다. 세종은 이를 허락하여 태조, 정종, 태종의 실록에 빠진 내용과 바로 잡을 사실을 고쳤다. 비록 뜻은 온당했을지라도 이 일은 하나의 관례가 되어 뒷날 정치적 이해에 따라 수정실록이 나오는 폐단을 만들어 냈다. 실례로 통치기간에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선조실록>은 1616년 북인들 주도로 완성되었는데 서인들이 집권한 뒤인 1643년 내용을 달리한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선조 통치기간의 실록은 두 종류가 있게 됐다.
실록의 내용에도 한계를 들어낸 경우도 많다. 태종의 무지막지한 살육과 임금자리를 두고 왕자들끼리 싸운 사실을 얼버무리기도 하고 때로는 정당화하는 기록을 슬쩍 접어넣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세조가 사육신과 단종을 죽인 일과 관련해 어정쩡한 기록이 많다. 이는 제도적 모순이라기 보다는 사관의 잘못이었다. 사관 역시 전변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를 후세에 전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실록에는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다. 임금과 벼슬아치의 치적과 동정만이 아니라 천무, 지리, 이변, 재변, 등의 자연 현상과 풍속, 놀이 ,간통, 범죄, 그리고 민중봉기 등 인간의 이야기, 무수한 동식물의 이름도 수록되어 있다. 정치적 사건 이외의 다른 내용에는 거의 오류가 없이 정확하다. 다만 상대적으로 국가제도에 따른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민중생활이 소홀히 취급한 한계를 지니고 있을 뿐

<기록의 대가들>
기록하는 순간, 내 작은 일상도 역사가 된다.

꼼꼼한 기록의 대가들과
다양한 기록들

오용현(78)씨는 1987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최하는 노인대학 강의를 듣고 강의필 기록을 책으로 만들어냈다. 책은 강의를 등록할 때 받은 접수증 복사본에서부터 동기생들의 주소록, 동창회장의 인사말 요약, 강의요약에 이르기까지 강의와 관련한 모든 내용이 기록돼 있다. 20편 남짓한 그의 집 지하에는 한국전쟁 전후부터의 국내 일간지들을 빼곡이 모아 놓았다.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려운 <인민일보>까지 있을 정도이다.
서울 남산초등학교 특기적성교육 글짓기반 강사인 전태수(61)씨는 20년 동안의 담임교사 생활을 ‘학급운영일지’를 통해 기록했다. 또 그동안 제자들, 학부모들과 주고 받은 편지 2천여통도 보관중이다. 2월 23일 오후 4시 학교에서 만난 전씨는 기자에게 명함을 주며 명함 위에 ‘010223 금 16시’라고 적었다. 2001년 2월23일 오후 4시에 건넸다는 표시를 한 것으로 몸에 밴 기록습관을 엿볼 수 있었다. 전씨는 “내가 기록에 힘쓴 것은 완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며 “마흔이라는 나이에 뒤늦게 교직에 뛰어들었는데 이 직업으로 식구밥벌이나 하면서 단순한 봉급생활자로서 살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결심은 교사생활 전체를 기록해 1년에 한 권씩의 책을 반드시 내겠다는 것이었다. 결심대로 그는 지금까지 14권의 책을 냈고 앞으로 계획한 6권의 책을 마저 더 낼 생각이다. 결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기록 덕분이었다.

'한국시민기록문화’를 통해 만나본 숨은 기록 매니아들

지난해 12월 ‘한국국가기록연구원’(www. rikar.org)에서 주최한 ‘한국시민기록문화전’은 숨겨져 있던 생활 속의 다양한 기록문화가 빛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그날의 적은 메모외에 신문기사와 영수증, 버스표, 은행 무통장 입급표까지 빼곡이 붙인 ‘달력일기’를 선보인 임대규(66)씨와 기록을 통해 생활의 질서를 잡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는 김안제 서울대 교수,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과정과 해외여행기를 담은 비디오 기록을 포함해 2500여편의 작품 공연비디오 기록물을 선보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김채현교수까지… 역시 기록의 대가들이었다.

기록문화의 비약적 발전에 정부의 호흥을 기대해 본다

한남대 기록관리학과 대학원생 차창민(31)씨는 이전세대에 비해 전자기록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젊은이들의 기록문화세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CD안에는 성장과정을 담은 사진과 목소리를 담은 음성기록까지 들어 있는게 보통입니다.”
최근에는 아예 생애 전체를 한권의 책으로 기록할 수 있도록 ‘기록용 책’이 나오는 등 기록문화가 상업적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의 한 관계자는 “개인 문화의 발전과 함께 최근 몇년 동안 대학원에 생겨난 ‘기록관리학과’와 기록관리 전문가들인 ‘아키비스트’의 존재로 인해 우리사회에서도 기록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할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에서도 기록문화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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