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납치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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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납치된 사람들
  • 글/신혜영 기자
  • 승인 2006.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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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이 낳은 비극의 희생자 ‘납북된 사람들’
北 12개국에서 최소 523명 납치, 국내 민간인 납북 귀환자 단 1명도 없어
조국이 분단된 채 남북한이 서로 다른 체제와 사회 속에서 살아온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동일한 언어와 문화, 혈통을 지닌 우리는 반드시 공존 공영해야 할 동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로 남아있다. 이런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은 바로 휴전이후 지금까지 북한에 의해 억류되어 있는 여러 유형의 납북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수만 명에 달하지만 아직까지 납북자 귀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남북한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지난 4월 11일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남편으로 확인된 북한의 대남간첩교관 김철준이 한국인 납북자 김영남(金英男·45)으로 밝혀지면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실시한 DNA분석결과로 현지 언론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일제히 보도되었다.
사실 그동안 한일 양국에서는 메구미의 남편이 1978년 전북 선유도에서 실종된 김영남 씨라는 설이 줄곧 제기되어 왔었다. 이런 이유엔 김철준, 메구미 부부와 한때 같이 산 적이 있다는 납치피해자 하스이케 가오루(48) 부부가 당시 김철준 씨 본인으로부터 “남한에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으며, 남으로 파견됐다가 적발된 간첩들은 김영남의 일본어가 “매우 유창하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그의 어머니 및 형제의 모발과 혈액을 한국 정부로부터 넘겨받아 김철준, 요코다 부부의 딸인 김혜경(18)의 DNA와 대조하는 분석 작업을 벌여왔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2년 9월 일본 정부는 평양에서 혜경을 면담하면서 그의 DNA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시료를 넘겨받아 김혜경과 부녀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김영남 씨가 북한에 의해 피랍된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28년 만에 아들의 생존소식을 들은 김영남 씨의 어머니 최계월(82·전북 전주시) 씨는 “죽은 줄로만 알고 영혼결혼식까지 시켰다”며 “십수 년이 지난 뒤에야 아들이 납북돼 북한에서 장가도 가고 자식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생사를 확인할 길이 있었어야지”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잊혀져 간 ‘고교생 납북자’
김영남(당시 17세) 씨와 같은 ‘고교생 납북자’들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이명우(17), 홍건표(17), 최승민(17), 이민교(18) 씨 등 4명에 이른다. 김영남 씨와 같은 시기인 1978년 충남 천안상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홍건표 씨와 충남 천안농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명우 씨는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북한 공작원들에게 피랍, 고교 생활의 마지막 여름 방학을 친구와 무전여행으로 장식하기 위해 떠난 여행길이 이제는 더 이상 가족을 볼 수 없는 곳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1년 전인 1977년 8월에는 경기도 평택 태광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승민 씨와 이민교 씨도 홍도 해수욕장에서 납북됐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지금, 납북 일본인 메구미 씨의 남편이 또 다른 고교생 납북자인 김영남으로 밝혀지면서 당시 납북됐던 고교생 납북자에 대한 생존 여부에도 관심이 집중되는 한편 귀순간첩 김광현(68) 씨가 김영남 씨를 납치한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납북자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4월 27일 국가정보원장은 국회 정보위에 출석해 지난 1997년 검거된 부부간첩 최정남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김영남, 이민교, 최승민, 이명우, 홍건표 씨 등 고교생 5명이 북한에서 이남화(以南化) 공작 교관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2000년대 들어 탈북자를 통해서도 추가 확인했다고 밝히며 “이들 중 이민교, 최승민 씨는 2000년대 초까지 교관 활동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고,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측은 이들이 현재까지도 생존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파이 교육 현지화 위한 납북공작
지난 4월 27일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 아프리카, 인권, 국제 활동 소위의 납북자, 탈북자 문제 청문회가 열렸다. 이날 청문회에 참석한 일본의 납북자구조연합의 요이치 시마다 부의장(후쿠이대학 교수)은 북한이 한국전쟁이후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등 전 세계 12개국에서 최소한 523명을 납치해 갔다고 주장했다. 국가별로는 한국인이 485명으로 가장 많은 것을 비롯해 일본인 16명, 레바논인 및 말레이시아인 각 4명, 프랑스인 및 이탈리아인 각 3명, 마카오 출신 중국인 및 네덜란드인 각 2명, 태국인, 루마니아인, 싱가포르인, 요르단인 각각 1명 등이다. 더불어 일본 정부는 일본인 납북자가 16명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자체조사 결과 1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요이치 시마다 부의장은 “탈북자들에 따르면 1976년 김정일이 북한 스파이 활동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더 조직적으로 활용하라는 이른바 ‘스파이 교육의 현지화’를 비밀리에 지시했다”면서 이 지시 이후 북한 납치공작이 활성화 됐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납치 당시 13살이었던 메구미 요코다를 비롯해 최소한 11명의 일본인과 5명의 한국인 고등학생, 4명의 레바논 여성, 2명의 마카오 출신 중국인 여성과 태국 여성 등이 이 지시 직후인 1977~1978년 납치됐다”고 말했다.
북한이 외국인을 납치하는 이유로 ▲북한 요원의 불법 활동을 목격한 증인을 없애기 위해 ▲북한 비밀요원이 외국 침투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북한 요원들에 대한 언어 및 관습 교육을 위해 ▲세뇌를 통해 비밀요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납치된 사람의 전문성이나 특별한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기존 납북 외국인의 배우자로 삼기위해 등으로 분석했다.
납북자는 국군포로 약 5만여명, 한국전쟁중 납북된 민간인 약 2만여명, 납북어민 400여명, 외국에서 강제 납치된 민간인 약10여명, 항공기 피랍자 약 20여명, 북송재일교포 약 93,000여명에 달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납북자
사실 그동안 납북자 문제는 남북한 양쪽 모두에게는 기피 대상이었다. 납북자 문제는 국군포로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간헐적으로 열린 남북대화에서 직접적인 의제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지난 1994년 최초로 살아 돌아온 국군포로 조창호를 비롯해 최초로 살아 돌아온 납북어부 이재근 등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기까지는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으며 납북문제에 대해서는 늘 미온적 태도를 취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1975년 납북됐다가 지난 2005년 7월 탈북한 고명섭 씨는 “나는 정부가 아니라 납북자 가족 단체의 도움으로 북한을 탈출했다”면서 “정부가 북한에 생존해 있는 납북어부들과 다른 납북자들이 송환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 한다”고 말했다.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됐던 이재근 씨는 1998년 북한을 탈출해 2년간 중국에서 숨어 지내며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왜 자꾸 국가에 부담을 주려고 해”라는 대답뿐 2000년 9월 납북자 가족모임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특히 고등학생 시절 남파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어 이남화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억류중인 것으로 확인된 바 있지만 미귀한 납북자 문제는 그동안 정부와 여론의 무관심속에서 그 실태조차 파악이 안 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왔다.
1978년 납북된 홍건표 씨의 동생 홍광표(39) 씨는 “통일부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해보라고 권유해 ‘과연 형을 만날 수 있느냐’고 문의하면 ‘만나는 것은 힘들다. 신청만 하라’고 이야기한다”며 “통일부에서는 납북자 가족이 이산가족 찾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대외 홍보용 이미지를 얻기 위해 신청만 하라고 하지 가족의 만남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홍씨는 “정부가 납치범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전향했다는 이유만으로 풀어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중죄를 저지른 죄인을 피해자 가족에게 얼굴 한번 보이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놔둔 것 자체가 역설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납북자 문제의 거론 자체를 금기시 하는 북한의 태도와 국군포로와 달리 탈북 귀환자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는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민간인 납북 억류자 중에는 귀환자가 단 1명도 없다는 데서 납북 억류자의 존재가 북한에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북한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납북자 문제에 대해 “이미 끝난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처럼 납북자 문제의 거론 자체를 금기시하는 북한의 태도와 국군포로와 달리 탈북 귀환자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는 측면이 크다.


납북자 문제, 국제사회 동참 절실해
북한자유연대와 디펜스포럼 등 미국 내 북한인권 단체들은 4월 22일부터 30일까지를 북한자유화주간으로 선포하고 22일 백악관 앞 라파예트 공원에서 ‘납북자 송환 촉구행사 및 콘서트’를 열었다. 한국 피랍탈북연대와 일본 피랍구출희망센터도 참여한 이날 행사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납북자 관계자들이 공동으로 납북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인 배재현 장로는 “납북자 문제는 더 이상 한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며 “지난 수년간 우리 정부와 일본의 지속적인 촉구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이젠 동남아지역 사람들까지 납북하고 있다. 납북문제는 한 나라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전 세계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북한자유연대와 디펜스포럼의 수잔 솔티 회장은 “납북자 문제는 국제사회의 문제이며 더 많은 국가가 참여할 때 영향력 또한 커질 것”이라 밝혔다.
납북됐다 30년 만에 귀환한 이재근 씨는 “납북자들은 지금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다”며 “납북 후 1년이 지나면 식량 배급도 되지 않아 배고픔에 허덕여야 한다. 또 99%에 가까운 납북자들이 모두 탄광에 배치돼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남한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는다”고 전했다.
한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02년 탈북한 김한미(6) 양과 부모, 그리고 일본인 납치 피해자의 어머니와 지난 4월 28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32분가량 만났다. 부시 대통령이 납치 피해자 가족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부시 대통령은 한미 양의 아버지 김광철 씨, 어머니 이귀옥 씨에게 “북한의 인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용기 있는 일”이라며 “북한이 국제사회의 존중을 원한다면 인권을 지켜야 하며, 자국민과 바깥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딕 체니 부통령, 제이 레프코위츠 북한 인권담당특사와 프리덤하우스 등 미 단체 관계자, 가토 료조(加藤良三) 주미 일본대사 등이 배석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사키에 씨에게 “외국인 납치는 용서할 수 없는 인권 침해인 만큼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미국 정부가 노력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를 두고 북한 인권문제가 미 대북정책의 전면으로 떠오르는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납북문제는 그동안 북한과 일본 간의 공방 차원을 넘어 국제 이슈로 부상하는 계기를 맞았다.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될 것
우리는 현 시점에서 남북분단의 비극이 낳은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 비극을 어떻게 극복을 해야 하는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될 것이다.
이에 지난 4월 27일 국정원은 앞으로 명분을 내세워 시끄럽게 함으로써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조용하게 납북자들의 송환을 설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지난 4월 21일부터 3일간 평양에서 열린 제18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해결에 대해 합의 하는 등의 남북간 최고위급 회담인 장관급회담에서 공식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최소한 물꼬는 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강제 납북자들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납북자들을 외면해 왔고, 남아있는 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일삼으며 인권을 유린해 왔다. 이들의 아픔을 계속 외면한다면 분단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제18차 남북장관급회담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해결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6월 방북 합의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할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의욕을 보여 왔다. 최근 터져 나온 일본인 납북자 요코다 메구미와 그 남편 김영남 씨 사건으로 촉발된 국내 여론과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문제 제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번 합의는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이산가족의 범주에서 분리해냈다. 그동안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는 우리측이 2000년 6월 제1차 적십자회담에서 처음 북측에 제안할 때부터 늘 이산가족 범주에서 논의됐다.
북측이 납북자를 처음으로 인정한 지난 2월 제7차 적십자회담 합의문에도 ‘이산가족 문제에 (포함해서)’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따라서 기존의 접근법과는 달리 납북자·국군포로의 해결 의지를 대외적으로 나타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게다가 남북간 최고위급 회담인 장관급회담에서 공식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최소한 물꼬는 텄다는 평가다.
통일부와 납북자단체 등에 따르면 전쟁시기 이후의 납북자는 모두 3,790명으로 집계된다. 대부분 어부들이다. 이 중 3,305명은 남측으로 돌아왔고 미귀환 납북자는 485명으로 추산된다. 국군포로는 현재 500여명이 북측에 생존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방부가 귀환 국군포로와 탈북자 등의 증언을 토대로 집계한 것이다.
하지만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현재로선 표현이 상징적이고 모호한 측면이 적지 않다.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과정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봤던 북측이 얼마나 추후 조치에 협력할지가 관건이다. 이 문제는 제19차 장관급회담에 앞서 6월로 잡혀 있는 제8차 적십자회담에서 공론화될 전망이어서 주목된다.
이 밖에 정치·군사 문제에 비해 경제 분야가 상대적으로 부각됐다. 남측이 제안한 한강하구 공동이용안과 민족공동의 자원개발안 등이 그것이다. 구체성은 떨어지나 일단 공감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실질적 논의는 5월 경제협력추진위원회로 미룸으로써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철도·도로 개통 문제 등도 마찬가지로 미뤄졌다. 역시 남측이 제안한 홍수나 산불 등에 공동대처하기 위한 공동방재 협의체 구성과 보건 의료, 문화유적 보전 등 기타 협력사업도 전기는 마련했으나 구체적 실천은 숙제로 남겼다. 독도 문제와 관련한 대일(對日) 공동대응 주장은 막판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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