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열정의 결정체 ‘88서울올림픽’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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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열정의 결정체 ‘88서울올림픽’ 개막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3.09.0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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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의 참가’를 통한 ‘최상의 화합’을 보여주다

[1988년 9월17일] 제24회 올림픽 개막
각국 선수들은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 동안 34개 경기장에서 23개 정식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경기는 정식종목 23개(근대5종·농구·레슬링·배구·복싱·사격·사이클·수영·승마·양궁·역도·요트·유도·육상·조정·체조·축구·카누·탁구·테니스·펜싱·하키·핸드볼), 시범종목 2개(야구·태권도), 시범세부종목 1개(여자유도), 전시종목 2개(배드민턴·볼링), 전시세부종목 1개(장애인휠체어경기)가 치러졌다.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해 1위를 차지하고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거머쥐었다. 우리나라는 유도와 양궁, 탁구 등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해 4위에 올랐다. 특히, 양궁의 김수녕은 우리나라 올림픽 참가사상 최초로 올림픽 2관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공로와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
운동 경기 외에 경축행사, 공연행사, 전시행사, 스포츠 과학학술대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 경기장 34개와 연습장 72개가 이용됐다. 서울시는 송파구 잠실1동에 총면적 54만 5,000㎡의 서울종합운동장을, 6∼24층의 건물로 86동 3,692세대 및 36동 1,848세대를 선수촌 및 기자촌으로 건설했다. 대회운영에 조직위원회 1,435명, 자원봉사요원 2만 7,221명, 지원요원 1만 8,281명, 단기고용요원 2,775명 등이 동원됐다.
‘화합과 전진’이란 기본 인원에 걸맞게 서울올림픽은 16년 만에 동서양 진영 선수단이 모두 참가해 동서의 이념 분쟁,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켰다. 또 한국의 뿌리 깊은 문화와 전통, 한국인의 저력을 통해 세계 속에 한국의 위치를 확고하게 새기게 되었고, ‘최다의 참가’를 통한 ‘최상의 화합’을 실증했다. 운영이 미숙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올림픽 사상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다는 극찬을 들었다.
올림픽기간을 전후해서 관광객 수도 급증했다. 서울을 다녀간 외국관광객은 모두 24만 1,299명으로 1987년 같은 기간의 17만 6,150명보다 37%의 증가율을 보였다.
한편 한국은 1979년 9월에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로 결의하고 1981년 2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정식 제출했다. 같은 해 9월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누르고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됐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2번째, 그리고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 경기대회 개최국이 되었다.

[2000년 9월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 북한으로 송환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2000년 9월2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1993년 3월19일 비전향장기수 이인모가 최초로 북송된 데 이어 두 번째다. 이들은 간첩으로 남파된 후 붙잡혔거나 빨치산, 인민군 등으로 활동하다 검거돼 짧게는 15년부터 길게는 45년까지 장기복역한 사람들로 자유민주체제로의 전향을 거부한 대부분 70살 이상의 고령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일 오전 북악파크호텔을 출발해 통일대교를 지나 유엔 사령부 관할지역에 도착했다.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와 ‘민주화실천 가족운동 협의회’의 관계자 30여 명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통과해 북으로 보내졌다. 북한은 이날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등 500여 명이 나와 이들을 맞이한 데 이어 평양 도착 후에도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4일에는 만수대의사당에서 비전향장기수 63명 전원에게 조국 통일상을 수여했다.
당시 북한은 “력사적인 평양 상봉 후 온 세상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의 조국으로의 송환은 혁명전사들에 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믿음과 사랑이 가져온 고귀한 결실이였고 인덕정치의 위대한 승리였다”며 입장을 밝혔다.
2005년 북한 평양출판사에서 발행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으로 돌아온 비전향장기수들에게 김정일은 “우리를 믿고 감옥에서 30년, 40년 지조를 지킨 그들을 우리가 돌봐주지 않으면 누가 돌봐주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장기수들이 빼앗긴 청춘을 되찾고 여생을 행복하게 보람차게 보내도록 하기 위해 진귀한 약재며 남방과일을 비롯한 사랑의 선물들을 거듭 안겨주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대한 국가연회와 환영모임도 조직해 주었다고 자료는 적고 있다.
비전향장기수들은 김정일의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무한대한 어버이사랑 같은 배려와 은덕에 목 메여 흐느끼며 머리에는 비록 백발이 날려도 청춘의 마음으로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 시작한 통일애국의 길을 경애하는 장군님을 따라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끝까지 걸어갈 굳은 맹세를 다지고 또 다지는 것”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1972년 9월5일] ‘검은 9월단’ 올림픽 선수촌 테러
1972년 9월5일 뮌헨 올림픽 경기가 중반을 넘어서던 즈음, 뮌헨 올림픽을 피로 물들인 ‘검은 9월단’ 사건이 일어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의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의 게릴라들이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에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침입했다. 역도 코치와 레슬링 코치가 게릴라들의 총탄을 맞고 바로 숨졌다. 이들은 9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억류 중인 234여 명의 검은 9월단 단원들과 서독 정부가 체포해 수감 중이던 바더 마인호프 그룹(속칭 서독적군파)의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울리케마인호프(Ulrike Meinhof)의 석방을 요구하고 자신들이 안전한 이집트행을 요구했다. 이들은 납치 과정에서 사살한 레슬링 코치 모세 와인버그(Moshe Weinberg)의 시체를 문밖에 버려 자신들의 의지를 과시했다. 검은 9월단 단원들은 인질들을 끌고 이집트 카이로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 편으로 푸르스텐펠트브루크(Furstenfeldbruck) 공항으로 갔다. 이 공항에서 서독 경찰이 비행장에서 구출작전을 폈지만 검은 9월단 단원 5명과 경찰 1명, 이스라엘 인질 9명 전원이 현장에서 숨졌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텔레비전으로 시종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테러 전담 특수부대’란 개념은 어느 나라에도 없었고 당연히 이런 경우에 대비한 특수 훈련이란 개념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림픽대회가 24시간 동안 중단돼 올림픽 사상 최악의 사태로 기록됐다.

[1997년 9월5일] 빈자(貧者)의 성녀 세상에 잠들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헌신한 테레사 수녀가 1997년 9월5일 인도 캘커타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87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테레사 수녀가 타계하자 전 세계는 인류사에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성녀의 영면을 기원했다.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은 엿새 뒤인 9월13일 거행되고 유해는 ‘사랑의 선교회’ 구내 묘지에 묻혔다.
1910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테레사 수녀(본명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18살에 고난의 길로 들어선 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수녀생활을 하며 극빈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928년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간 뒤 인도 국적을 취득하고 캘커타의 빈민가에 살면서 센트메리고등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다.
그녀가 1950년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지구촌 120개 나라에 4,400여 명의 수녀와 평수사 등을 보내 장애인과 고아, 에이즈환자 등을 돌보고 있다. 테레사 수녀가 세운 병원과 구호시설이 인도에만도 168곳이 있으며 전 세계에 517곳에 이른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상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납했고 교황이 선물로 준 차도 팔아서 나환자수용소를 짓는 데 썼다. 테레사 수녀는 선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설립 승인을 받은 뒤 총장을 마더(Mother)로 호칭키로 한 회헌에 따라 그 뒤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그녀는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한 구호,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 여전히 전세계에서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인도 여성 모니카 베스라의 복부 종양이 치유된 것을 테레사 수녀가 일으킨 기적으로 공인하여 故 테레사 수녀는 2003년 10월 시복식에서 성자 바로 아래 단계인 복자로 서품되었다.

[1948년 9월9일] 북한 정권 수립
1948년 9월9일 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내각 수상으로 김일성이 선출되고 부수상에는 박헌영과 김책, 홍명희가 임명됐다.
김일성은 이에 앞서 1947년 2월21일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키고 이듬해인 1948년 4월29일 특별회의를 통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헌법 초안을 승인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25일 제1기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 뒤 같은 해 9월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를 소집하고 마침내 9월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을 승인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북한은 정권수립일을 앞두고 중앙보고대회, 영화상영주간, 미술전람회, 체육경기 등 각종 행사를 진행하고 당일에는 예술공연, 야회, 문화오락행사, 군사 퍼레이드 등을 연다.
이 날은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인 10월10일과 함께 북한의 사회주의 5대 명절 중의 하나로 꼽힌다.

[1796년 9월10일] 최초의 한국 신도시 화성 완공
1796년 9월10일 조선 정조(제22대, 재위 1776~1800) 때에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에 쌓은 새로운 성 화성(華城)이 완공되었다. 성은 정조 18년(1794)부터 20년(1796) 사이에 좌의정 채제공의 주관 하에 축성했는데,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거중기 따위 기계 장치를 활용하는 등 우리나라 성곽 건축 기술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이다. 당대의 모든 과학 기술과 역량이 동원된 이 성은 다산 정약용이 거중기(擧重機)를 이용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성의 총길이는 4,600보(5,743m)로 서양식 축성법을 채용했고, 재료도 대형벽돌을 사용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에 대해 벽파세력의 압박을 피해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화성 천도설’이 있긴 하지만, 당쟁에 휘말려 비운에 간 아버지 세도세자를 추모하고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자신의 비원을 실현할 목적으로 건설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정조는 화성 건설과 함께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로 옮겼고,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를 용주사로 이름을 바꿔 사도세자의 능사(陵寺)로 삼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함. 정조는 신도시의 번영을 위해 한성부내의 재력 있는 시전도매, 기타 부호들과 개성, 평양, 의주, 동래의 거상들로부터 이주 신청을 받았는가 하면, 장사에 능하고 근면 성실한 자 20인을 골라 계를 짜게 하고 이 계원들에게 관모와 가삼의 국내매매와 대중국 무역을 독점하게 했다. 정조의 강력한 의지는 인가(人家)라야 불과 5~6호에 지나지 않았던 삭막했던 들판을 1900년에는 약 2,000호의 큰 읍으로 발전시켰고, 이 신도시는 2004년 현재 인구 100만여 명인 대도시로 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조대왕이 자신의 거창한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하나의 역사적 시발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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