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남북관계 新패러다임 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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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남북관계 新패러다임 여나
  • 최승호 기자
  • 승인 2013.08.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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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신뢰 첫 출발 ‘개성공단’ 합의… 비핵화 위한 6자·북미에도 긍정 역할 기대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동안 달래도 보고 얼러도 봤지만 효과가 신통치 않았던 남북관계가 박근혜 정부 들어 든든한 안보의 바탕위에서 교류·협력을 이끌어 간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원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
박 대통령은 그동안 핵심 담론인 ‘신뢰’를 바탕으로 외교안보 정책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이란 기조 속에 펼쳐나가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지난 4월8일 개성공단 가동 잠정 중단 선언 등 북한의 일방적인 조치로 폐쇄의 위기까지 갔던 개성공단 사업이 133일만에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2010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이산가족상봉의 재개도 눈앞에 와 있고, 2008년부터 중단된 금강산관광 재개도 희망이 보인다. 이와 함께 박근혜대통령의 대선공약임과 동시에 미 상·하 양원 연설에서 공식 천명했던 ‘DMZ세계평화공원’의 추진도 가시화 되고 있다. 미의회 연설 직후 북한은 모독적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 그들 스스로 DMZ 세계평화공원에 대한 언급을 할 정도다.
물론 이런 성과를 내기까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큰 기대를 모았던 장관급회담은 회담 직전에 무산되어 버렸고 실무회담은 7차례나 했다. 결국 남·북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5개항의 대원칙에 합의하고 세부적인 사항은 남북공동위를 구성하여 추가로 협의하기로 했다.

핵심 담론 ‘신뢰’, 빛 발하나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국민행복 시대를 기치로 내걸고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박 대통령은 인사파동과 정부조직법 지연 등으로 임기 초반 어느 대통령 못지않은 시련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원칙과 신뢰’의 기조로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를 끌어내는 등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초 인사파동과 정부조직법 처리 지연이라는 ‘초대형 악재’에도 불구하고 치명적 위기에 직면하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변수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취임도 하기 전에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이라는 ‘악재’를 접했다. 북한은 이후 정전협정 백지화·전시상황 돌입·개성공단 폐쇄 그리고 미사일 발사 등 긴장 수위를 단계적으로 고조시켜 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차분한 대응’ 대응 기조를 견지했다. “북한의 도발에는 초전에 강력 대응해야 한다”고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는 동시에,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가동해 대북 인도적 지원과 낮은 수준의 경제협력은 물론 국제적 지원까지도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사태가 악화하는 것을 막는 ‘내공’을 과시했다. 특히 북한의 일방적인 폐쇄 조치에도 타협 없이 원칙을 고수하면서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를 끌어낸 것은 최대의 성과로 평가된다. 개성공단 사태 발생 이후 견지해온 ‘원칙·신뢰·국제스탠더드·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기조가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지난 5월초 미국 방문과 6월말 중국 국빈방문을 통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고, 특히 중국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합의한 것도 외교적 소득으로 꼽힌다. 이러한 성과를 계기로 우리 정부는 안보 위주의 현재 대북정책을 ‘평화 실현’이라는 틀로 변화·발전시킬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단기적 정책에서 중장기적 정책으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평가된다.
박근혜 대통령도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를 지키는 데는 억지력이 필요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것은 상호신뢰가 쌓여야 가능하다”고 말해 ‘평화 지키기’에서 ‘평화 만들기’로 국면을 전환해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대북 억지보다는 상생 발전, 화해 협력 등을 강조하며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대북정책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통일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어젠다”
박근혜 정부는 취임 초부터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4대 국정 기조로 설정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68주년 광복절 경축사의 적잖은 부분을 ‘통일’에 할애했다. ‘북한’ 또는 ‘남북한’을 십여차례 언급하면서 ‘통일’이란 단어를 4번 사용했다. 내용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광복과 건국은 남북한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룰 때 완성된다”면서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취임 1년차에 ‘통일’을 제1 어젠다(의제)로 들고 나온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새 정부의 국정 기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통일이란 뜻인 셈”이라며 “대통령은 경제·복지·문화 등 내치(內治)에서의 성공이 곧 ‘평화통일 기반 구축’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은 ‘100%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통일 한국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100% 대한민국의 완성”이라고 한 바 있다. 지난 6월 방중(訪中)에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서는 “평화적 남북통일이 중국에도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지난번 경축사에선 ‘통일’을 “건국의 완성”이라고 했으니 더 큰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박 대통령은 통일의 단계를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이른바 ‘작은 통일’과 ‘큰 통일’이 그것이다. 한 참모는 “‘작은 통일’은 기업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투자하는 수준의 경제공동체를 의미하고, ‘큰 통일’은 정치적·법적·제도적 통일을 의미한다”고 했다. 2007년 대선 경선후보 시절부터 박 대통령은 “경제 협력 등 작은 통일에서 시작해 궁극적으로 큰 통일을 지향하겠다”고 했었고, 이는 2012년 대선 공약에도 반영됐다.
개성공단 문제도 이런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남북이 ‘경제공동체’로 가려면 북한의 안전보장이나 북한 경제의 국제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그런데 북한이 올 초에 3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박 대통령으로선 개성공단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고 했다.
현재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통일 문제와 관련된 구체적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기반 조성이 먼저이고, 그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은 따라온다고 본다는 것이다. 정부와 청와대 관계자들도 “서두르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관계자는 “어제 개성공단 합의가 딱 좋은 사례”라며 “박 대통령은 다른 현안에 대해서도 ‘신뢰와 국제적 기준 적용’이란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려 할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도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식과 국제적 규범이 통하는 남북 관계를 정립”하고 “진정한 평화와 신뢰를 구축해 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일관되게 추진해 가겠다”라고 했다.

순수 인도적 지원 우선 추진
지난 2월 대통령직 인수위는 ‘단기적으로 억지와 안보를 강화하되, 중장기적으로 남북관계 정상화 및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 실현’을 국정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3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잠정 중단 등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 정부는 억지와 안보에 집중하는 단기적 정책을 썼으나 앞으로는 관계 정상화 및 평화 실현을 위한 중장기적인 정책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맞춰 정부는 추석맞이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 해결을 우선 추진할 방침이다. 박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먼저 남북한 이산가족들의 고통부터 덜어드렸으면 한다”며 “이번 추석을 전후로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할 수 있도록 북한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우리는 한반도 한쪽에서 굶주림과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며 “새 정부는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인도적 지원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혀 순수 인도적 지원도 확대해 나갈 것임을 밝힌 바도 있다.
이와 관련해 남북은 지난달 23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적십자 실무 접촉을 갖고 2010년 10월 이후 약 3년만에 다시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남북한은 9월25일부터 30일까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금강산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상봉 규모는 남북 양쪽이 각각 100가족씩 하기로 했다. 또 남과 북은 고령이나 질병 등으로 인해 대면(對面) 상봉이 어려운 이산가족들을 위해 10월22일부터 23일까지 화상(畵像) 상봉도 실시키로 합의했다. 화상 상봉 규모는 남북 쌍방이 40가족씩, 화상 상봉은 남북 각지에 설치된 면회소를 통해 이뤄진다.
남북은 11월 내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한 차례 더 연다는 데에도 원칙적으로 합의한 상태다. 양측은 이를 위해 9월 상봉이 끝난 직후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다시 열기로 한 상태다. 남북은 이 밖에도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생사 확인, 서신 교환 실시 등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남북이 개성공단에 이어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도 잇따라 합의함에 따라 금강산 관광 재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9월25일 금강산에서 회담을 갖자고 제안한 상태. 이산가족 상봉이 최근까지 금강산에서 이뤄졌던 만큼 이번 상봉 행사를 계기로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도 물꼬를 틀 것으로 전망된다.

남북한 신뢰구축, 아직 갈 길 멀다
이번 합의로 남북 관계 개선에 청신호가 켜졌지만, 남북이 신뢰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풀어야 할 난관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당장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가 핵심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북측이 우리 정부가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을 금강산 관광 재개 등과 연계시킬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 정부가 요구하는 재발 방지 등을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또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신뢰의 진전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교류를 추진해 더 높은 단계의 신뢰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신뢰수준에 맞지 않는 높은 수준의 교류 협력은 하지 않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문제가 갈린다. 개성공단은 남북한 양쪽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재가동에 합의했지만 금강산의 경우는 북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호응하기 힘들다.
개성공단은 우리 중소기업에 저비용의 공장을 제공한다는 이점이 있고 5만 명이 넘는 북한 주민과 직접 만나 남쪽의 분위기를 전할 수 있다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은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면도 넓지 않을뿐더러 금강산 입장료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기조와도 맞지 않다.
한편으로는 비핵화 논의를 시작할 단계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부는 우선 남북간 신뢰 쌓기에 주력하고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확실하게 쥔 후에 6자회담 등 비핵화 논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조태용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연내에 6자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이 낮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 본부장은 지난달 러시아 측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만난 뒤 “현재로선 공이 북한에 넘어가 있는 만큼 북한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에 따라 6자회담 재개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며 “우리 정부의 입장은 북한 측이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회담을 재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북한과 신뢰를 쌓아가며 더 높은 단계의 협력으로 나아가겠다는 접근은 상식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핵과 연계하지 않는 1, 2단계에서 핵과 연계하는 3단계로의 발전 과정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남북한 신뢰 구축을 바탕으로 결국 한반도 비핵화 실현으로 나아가는 구상이어서 아직 갈 길은 멀다. 바로 지금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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