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이 중대 기로에 놓였다. 남북은 6차례에 걸쳐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협의를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양측은 가동 중단 책임과 재발방지 문제에 대해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러자 북한은 판 깨기로 나왔다. 북한이 보인 돌출행동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북한측 단장(수석대표)인 박철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은 6차 실무회담이 열렸던 지난 7월25일 북측인사 20여 명과 함께 남측 기자실에 난입했다. 북측은 이때 남측의 제지를 피하기 위해 프레스센터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4대를 모두 장악했다. 이 광경은 북측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암시했다.
박 부총국장은 단상에 오른 뒤 “개성공업지구 정상화를 위한 북남 당국 실무회담이 오늘까지 6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결렬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북측은 그러면서 지난 3·4·6차 실무회담 당시 북측이 읽은 ‘기본발언(기조발언)’, 합의서 초안, 수정안 전문 등을 공개했다.
정부는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통일부는 이날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한 측이 회담종료 직후, 우리(한국) 측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기자실에 무단으로 난입하여 사전에 준비한 기자회견문을 일방적으로 배포·낭독하고 합의서(안) 등 회담 관련 문건을 공개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이어 “개성공단 실무회담 결과로 인해 개성공단의 존폐가 심각한 기로에 선 것으로 판단한다”며 “북한이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정부로서는 중대한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중대 결심’이 공단폐쇄를 의미하는지 여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통일부 안팎에선 사실상의 공단폐쇄를 시사한 것이라는 시각이 팽배하다.
한편 청와대는 재발방지 보장이 개성공단 정상화의 선결 조건임을 분명히 했다.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26일 기자들에게 “재발방지 보장과 공단의 발전적 정상화가 정부의 입장이고 분명한 원칙”이라면서 “그것은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상식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같은 언급은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7월8일 “잘못된 일들의 재발을 막는 것은 단지 개성공단 문제 해결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데 이어 22일엔 “새로운 남북관계 정립을 위한 원칙과 틀을 짜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측과 협상에 임하는 정부 측 대표단도 이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통일부는 지난 7월10일 열린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남북 당국 실무회담에서 정부 측 대표단은 북측에 “우리(남한)측은 일방적인 조치로 공단이 문을 닫는 일이 다시는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고한 뒤 “북한 측의 일방적인 공단가동 중단조치에 대한 책임 있는 입장표명, 재발방지에 대한 분명한 약속과 가시적인 조치가 있어야 개성공단에 대해 갖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수준에서 협상을 마무리했다. 통일부는 북한이 정부에 “6·15공동선언에 따라 개성공단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남한 측 언론, 군사훈련 등을 언급하면서 개성공단 정상가동에 저촉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고 전했다. 양측은 7월15일 3차 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미국 유력일간지인 뉴욕타임스는 서울발 기사를 통해 “남북간 계속적인 대화는 수 개월간 대치상황을 연출했던 남북이 긴장완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징후”라고 평했다.
재발방지 책임 놓고 평행선 달려
남북은 세 차례에 걸쳐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양측은 좀처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회담장을 맴돌았다. 정부 측 수석대표인 김기웅 통일부 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은 3차 회담 직후 브리핑을 통해 “지금 단계에서 ‘어떤 문제가 좁혀졌다, 어떤 논의가 있었다’라고 말씀드릴 상황은 아니고 발전적 정상화를 위해 양측이 충분히 상호입장을 개진했다”며 “이를 바탕으로 해서 계속 협의를 해 나갈 것이란 점만 말씀 드린다”고 밝혔다. 양측은 후속 회담에서도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남북은 22일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에서 5차 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전체회의 3번, 수석대표 접촉 1번 등 모두 4차례 협상을 갖고 상호입장을 조율했으나 또 다시 합의문을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북한이 정부가 제안한 개성공단 국제화 방안에 동의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북측은 마침내 6차 회담에서 돌출행동을 저질렀다. 이와 관련, 통일부 당국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늘은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될 수 없으니 일단 회담을 접고 차기 회담 일정을 잡자’고 했더니 북측이 ‘회담결렬’이라면서 회담장(개성공단지원센터 13층)을 박차고 나갔다”고 설명했다.
협상이 결렬된 근본적인 이유는 재발방지 책임 소재에 대해 남북이 합의를 이루지 못한데 있었다. 김기웅 수석대표는 25일 “이번 회담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된 부분은 합의서 1조, 재발방지 부분”이라며 “여기서 입장차가 컸다”고 지적했다. 그는 5차 회담 직후에도 “(이번 회담에서) 진전된 부분도 있고 여전히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다”며 “쌍방간 의견차를 보이는 것은 재발방지 보장 부분”이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6차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측이 배포한 합의서 초안과 수정안에 따르면 북한 측은 3차 협상에서 합의서 1항에 “그 어떤 경우에도 개성공업지구의 정상 운영에 저해를 주는 정치적·군사적 행위를 일절 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합의서 초안 1항에 넣을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는 사실상 개성공단 가동 중단의 책임이 남한의 정치적·군사적 행위에 있음을 인정하라는 요구였다. 정부로서는 쉽게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다. 정부 대표단은 가동 중단책임을 남한에 돌리는 것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북한 측은 17일 열린 4차 회담에서는 “남측은 개성공업지구의 안정적 운영에 저해되는 모든 정치적 언동과 군사적 위협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다. 북측은 이상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한 개성공업지구의 정상적 운영을 담보한다”고 명시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이 수정안은 3차 회담에서 제시된 안 보다 표현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공단중단의 근본책임을 정부에 돌리고 있었다. 또 향후 언론 보도가 심기에 거슬리거나 한·미 연합훈련이 실시될 경우 중단 조치가 취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북한 측이 25일 열린 6차 회담에서 제시한 안은 4차 회담에서 제시한 수정안 보다 구체적이었다. 북한 측은 “남측은 공업지구를 겨냥한 불순한 정치적 언동과 군사적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하며 북측인 이상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한 출입차단, 종업원 철수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한다”고 밝힌 재수정안을 제시했다.
정부는 북한의 요구에 대해 근본적인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했다. 김기웅 수석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글은 누가 봐도 또 그런 일(개성공단 폐쇄)이 생길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는 (합의)할 수가 없다”며 “누가 봐도 ‘출입차단이나 근로자 철수 같은 문제는 없겠구나’하고 인식할 수 있는 글이 돼야한다”고 밝혔다.
남북의 입장차는 결국 북한의 돌출행동으로 나타났다. 이때 북측 대표단장인 박철수 부총국장은 “남측과의 개성공업지구협력사업이 파탄나게 된다면 공업지구 군사분계선 지역을 우리 군대가 다시 차지하게 될 것이며 서해 육로도 영영 막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이 군의 개성공단 주둔을 경고하고 나선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뉴욕타임스는 “남북관계는 지난 3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냉각되기 시작했다”고 한 뒤 “이후 대화가 재개되긴 했지만 6차 회담장에서 남북이 벌인 가시 돋친 설전은 상호간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북한의 판 깨기, 한미연합 훈련 겨냥한 벼랑끝 전술?
개성공단 재개 협상 결렬은 입주기업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특히 입주기업 가운데 60~70%를 차지하는 섬유·봉제업체들은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 업체들은 통상 6~8개월 전에 주문을 받아 생산에 들어가기 때문에 늦어도 8월까지 정상화가 돼야 경영에 차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기업인들의 우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인들은 무엇보다 실무회담 결렬이 입주기업들의 탈출러시를 부추길 것으로 우려했다. 실제 전기·전자부품 업체 등 일부 입주기업들은 “이제 우리도 중대결심을 할 시기가 왔다”면서 철수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다. 유창근 개성공단 정상화 촉구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대변인은 “결국 회담이 결렬돼 낙담이 크다”면서 “조만간 개성공단에서 철수하겠다고 선언하는 기업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비대위는 6차 실무회담 결렬소식이 전해지자 26일 2차례에 걸려 통일부를 방문해 김남식 통일부 차관과 김기웅 수석대표를 만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정부로부터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러자 정부를 강력히 성토하고 나섰다. 한 입주기업 대표는 “정부는 원칙만 중요하고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맞닥뜨린 현실과 입주기업 및 협력사 가족들의 생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나?”면서 정부에 불만을 드러냈다. 옥성석 개성공단기업협회 부회장도 26일 서울 여의도 개성공단 정상화 촉구 비상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엄동설한에 길거리에 버려진 느낌”이라며 “머릿속이 백지상태다.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문을 닫고 이대로 쓰러져야 하나, 밤새 뒤척였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북한은 지난 6월 남북당국회담 무산 직후 “당국회담에 털끝만한 미련도 가지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향후 남북 대화 전망을 어둡게 했다. 북한은 그럼에도 개성공단 문제에 먼저 접촉을 제의해왔다. 이번 실무회담도 북측이 지난 7월3일 정부에 “장마철 공단 설비·자재 피해와 관련해 기업 관계자들의 긴급대책 수립을 위한 공단 방문을 허용하겠다”고 통지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북한은 일주일 뒤인 11일 입주기업의 물자반출을 허용했다. 북한의 유화 제스처는 계속 이어졌다. 북한은 10일(현지시간)엔 스위스 제네바 주재 UN대표부를 통해 6자 회담 복귀의사를 밝혔다.
소세평 UN 제네바 대표부 대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반도 상황이 화해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고 한 뒤 “6자 회담을 비롯해 한반도 긴장완화와 제반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한 모든 대화에 응할 채비를 갖췄다”고 언급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판을 깨는 모양새를 취한 데에는 8월 예정된 한미연합 해상합동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훈련(UFG)’를 겨냥한 벼랑끝 외교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북한이 미국에 도발적인 메시지를 던진 것도 이 같은 해석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소 대사는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밝히면서 “미국이 우리(북한)에 대한 적대정책과 핵위협 포기, UN 연합사 해체 등의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핵억지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미국이 획책하는 한미합동훈련은 한반도를 전쟁상황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은 일방적으로 판을 깼다. 이에 대해 정부는 ‘중대결심’이라는 낱말까지 사용하며 강경대응 입장을 밝혔다. 이제까지 입주기업들은 공단 재개에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남북이 강 대 강으로 맞서면서 개성공단의 미래엔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어느 한 쪽이 입장을 누그러뜨리지 않는 한 개성공단은 폐쇄 수순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