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는 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로마가 강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또 있었다. 바로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도덕규범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단순히 출신만으로 고귀한 지위를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회적 의무를 실천하는데서 귀족의 특권이 비롯된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 같은 의무 실천에 앞장섰다.
로마 제국 이후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한 사회의 건강성을 재단하는 척도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에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 유력 인사들의 경우는 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를 입증해 주는 지표가운데 하나가 병역의무 이행 여부다.
한 일간지의 조사에 따르면 현 정부의 파워 엘리트 10명 가운데 4명은 병역 면제나 보충역 처분을 받아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의 자제가 현역으로 복무하는 비율 역시 일반 평균치보다 10% 가량 낮은 80%에 그쳤다. 이런 와중에 사회 유력 인사들의 의무의식 부재를 보여주는 사건이 또 하나 불거졌다.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지난 5월22일부터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 취재를 통해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공동취재 1차 결과물을 발표해 오고 있다. 이에 따르면 총 245명의 한국인들이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나 쿡 아일랜드 등 이른바 조세피난처(Tax Haven)에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를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245명의 명단 가운데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와 총수 일가 등 사회 유력 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주가조작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는 인사의 이름마저 눈에 띠었다.
원래 조세피난처는 저개발 국가들이 기업유치 목적으로 과세를 면제하거나 세금부담을 경감해주기 위해 마련한 제도적 장치를 의미했다. 하지만 특정 기업들이 자국에서의 과세를 회피하거나 이따금씩 자금세탁을 위해 이용하면서 본래의 취지는 퇴색해 나갔다. <뉴스타파>의 취재결과는 한국의 사회지도층 인사들 역시 비자금 관리나 세금탈루를 위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회유력인사, 경제위기 피해 자산 해외 도피시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인사들 가운데엔 전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을 역임한 이수영 OCI 회장과 그의 아내인 김경자 OCI 미술관장,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아내인 이영학 씨, 조욱래 DSDL(구 동성개발) 회장과 그의 장남 조현강 씨, 조용민 전 한진해운 홀딩스 대표이사, 최은영 현 한진해운 홀딩스 회장, 조용민 전 한진해운 홀딩스 대표이사, 황용득 현 한화역사 사장, 조민호 전 SK 케미칼 부회장, 이덕규 전 대우 인터네셔널 이사 등 국내 재벌기업 총수, 임직원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내 중견기업의 최고 경영자들 역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성권 현 씨에스윈드 회장은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에보니골드 매니지먼트’라는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 운영했으며 김기홍 노브랜드 회장은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와 채널제도 저지섬에 ‘제이드 크라운 그룹’ 등 총 4개의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 운영했다. 김성권 회장이 경영하는 씨에스윈드는 세계 풍력타워 점유율 1위이며 2012년 3,000억 원 매출액을 기록한 강소기업으로 손꼽힌다. 한편 김기홍 회장의 노브랜드는 DKNY, GAP, ZARA 등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에 의류를 납품하는 중견기업이다.
이들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시기는 1995년에서 2009년까지다. 특히 2007년 이후 페이퍼 컴퍼니가 눈에 띠게 늘어났다. 이 시기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는 물론 한국 경제에도 암운이 드리우던 시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회 유력 인사들이 금융위기를 피해 자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추론이 쉽게 성립한다. 이들의 도덕 불감증을 보여주는 증거는 또 있다.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은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한누리투자증권, 중앙종금 사장에 오르며 금융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이미경 CJ 엔터테인먼트 부회장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1994년 유명 연극배우 윤석화 씨와 재혼하는 등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지난 2002년 검찰의 수사망을 피해 홍콩으로 도피했다. 당시 검찰은 그와 최재영 전 중앙종금 상무 두 사람이 1999년 4월 인터넷 벤처기업 골드뱅크사가 발행한 해외전환사채(CB) 700만 달러어치를 해외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중앙종금의 자금으로 인수하면서 해외 투자자가 CB를 인수한 것처럼 속이고 이를 공시해 주가가 올라가도록 유도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그가 최 전 상무와 챙긴 시세차익은 660억 원에 이른다. 검찰은 그를 수배하는 한편 최 전 상무에 대해선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프리미어 코퍼레이션’, ‘자토 인베스트먼트’, ‘PHK 홀딩스 리미티드’, ‘멀티-럭 인베스트먼트 리미티드’, ‘STV 아시아’, ‘에너지링크 홀딩스 리미티드’ 등 6개의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3곳의 설립시점은 김 전 회장이 홍콩으로 도피한 2000년 이후였다. 결국 김 전 사장은 해외 도피 와중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 운영한 셈이었다. 그는 해외 도피 와중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01년 자신의 페이퍼 컴퍼니인 ‘멀티럭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국내 게임업체인 RNTS미디어에 대한 지배구조를 완성해 놓고 사업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전재국 씨 페이퍼 컴퍼니, 전 전 대통령 비자금 은닉처?
지난 6월3일 오전 프레스센터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날은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1차 결과물 네 번째 명단 발표가 예정돼 있었다. 이날 발표될 명단은 프레스센터에 모인 취재진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뉴스타파>는 한 명의 이름만 발표했다.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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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에 드러난 전재국 씨의 페이퍼 컴퍼니(뉴스타파 화면 캡쳐) |
전 씨는 2004년 7월28일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블루 아도니스 코퍼레이션’이란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다. <뉴스타파>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 회사가 자본금 5만 달러 상당의 회사로 등록했지만 실제로는 1달러어치 주식 한 주만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 컴퍼니라고 밝혔다. 이날 발표는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현재 시공사 대표인 전 씨는 1989년 계간 오디오 잡지인 ‘스테레오 사운드’를 발간하면서 출판업계에 입문했다. 다음 해인 1990년 8월 (주)시공사로 법인 전환한 후 ‘아랍과 이스라엘’이라는 단행본을 첫 출간하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공사가 출판한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최단 기간 100만 부 판매를 돌파하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기도 했다. 전 씨는 (주)리브로, (주)북플러스, 도서출판 음악세계, 한국미술연구소, 허브빌리지, 파머스 테이블 등의 계열사를 운영하며 출판업계의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시공사는 2012년 매출 442억 7,700만 원을 기록했으며 30억 900만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항간에서는 뚜렷한 직장 경력도 없는 전 씨가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는데 대해 의혹의 눈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인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전 씨에게 흘러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설득력을 얻었다. <뉴스타파>의 발표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줬다.
전 씨의 페이퍼 컴퍼니인 블루 아도니스의 설립 시기는 2004년 7월이었다. 마침 이 시기는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가 활발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당시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 가운데 73억이 차남 전재용 씨에게 흘러갔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이로 인해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씨는 2004년 5월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고 전재용 씨는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전 씨는 2004년 9월22일까지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에 페이퍼 컴퍼니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려 했다. 그런데 계좌 개설에 필요한 공증서류가 페이퍼 컴퍼니 소재지인 버진 아일랜드에서 싱가포르로 배송되는 과정에서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 씨의 페이퍼 컴퍼니 설립 대행을 맡았던 PTN 본사와 버진 아일랜드 사이에 오간 이메일 가운데엔 “계좌 개설이 늦어져 고객인 전재국 씨의 은행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 모두 잠겨 있다. 이 때문에 전 씨가 몹시 화가 나 있다”는 대목이 적혀 있었다. 이 대목은 전 씨가 페이퍼 컴퍼니 설립이 여의치 않아 다급해 했음을 암시했다. 또한 “전 씨의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란 문구는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일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아들인 전 씨를 시켜 역외 유령회사를 세우고 그곳에 비자금을 은닉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는 정황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1995년 12·12, 5·18 사건과 관련해 내란수괴 및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1997년 특별사면 됐다. 한편 법원은 1996년 그에 대해 추징금 2,205억 원을 부과했다. 현재 전체 추징금 가운데 1/4만 납부됐을 뿐 나머지 추징금 1,672억 원은 여전히 미납상태이다. 더구나 이마저도 오는 10월11일 시효 만료 예정이어서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그의 비자금은 추적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2003년 이후 줄곧 “자신의 재산은 29만 1,000원”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이런 와중에 드러난 전 씨의 페이퍼 컴퍼니는 조세 정의는 물론 대한민국 헌정질서 전반에 대한 정의의 문제를 제기했다.
조세 정의는 사법 정의와 함께 한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동일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에겐 동일한 세금을, 더 큰 경제력을 가진 사람에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조세 정의의 요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경제력은 권력으로 직결된다. 따라서 더 큰 경제력을 가졌고 이를 통해 권력을 움켜줬다면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베푸는 것이 도리다. 하지만 잇달아 드러난 역외 페이퍼 컴퍼니는 한국의 사회지도층이 최소한의 윤리의식 마저 결여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제 공은 조세 당국과 사법 당국으로 넘어갔다. 조세 당국과 사법 당국이 결연한 의지를 갖고 조세 정의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무너진 조세정의의 회복은 사회 정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단초이기 때문이다.
사회 유력인사들의 역외 페이퍼 컴퍼니 설립은 <뉴스타파>의 특종 보도로 알려지게 됐다. <뉴스타파>가 ICIJ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김용진 대표(사진)의 역할이 컸다. 그는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ICIJ측에 참여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때 <뉴스타파>가 비영리 탐사보도매체라는 점, 그리고 조세피난처 관련 보도에 조직의 모든 자원을 투입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ICIJ측도 이 점을 감안해 <뉴스타파>를 취재파트너로 선정했다. 아래는 김용진 대표와의 일문일답 문 : 누구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씨의 페이퍼 컴퍼니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양상이다. 전 씨에 대해 국세청이나 검찰 등이 얼마만큼의 수사의지를 보이고 있는가? 문 : ‘조세피난처의 한국인들’ 프로젝트를 통해 느낀 소감이 있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