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엑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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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엑기스
  • 오병주 칼럼위원
  • 승인 2018.05.0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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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변호사

(시사매거진241호=오병주 칼럼위원) 조선시대 여주지역에 만석꾼의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5대 독자 아들이 있었는데 그 귀한 아들의 건강을 지키는 비법을 당대의 명의를 찾아가 지문을 한 결과, 식사 때마다 약간의 반주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식사 때마다 반주를 했고 세월이 흘러 그가 환갑에 이를 무렵, 비록 그동안 술로서 살아왔지만 비교적 건강했던 그가 무섭게 앓기 시작해 드러눕게 되었다. 오랜 투병생활 후 그의 임종을 지키던 가족들 앞에서 그가 갑자기 일어나 무언가를 토해내고 다시 의식을 회복하더니 다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자손들은 아버지가 토해낸 비릿한 명태꽂이 비슷한 더러운 물건을 버리려 하다가 그래도 자신들을 낳아준 부모의 것이라 대청 추녀 밑에 매달아 놓았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중국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고자 압록강을 넘는데 남쪽 하늘에서 푸른 서기가 비추는 것을 보았다. 이 중국의 사신은 천하의 기보를 보는 특이한 안목을 지녔다. 그는 한양 땅에 도착해서도 곧바로 궁전으로 가지 아니하고 남쪽 하늘에 비추이는 서기를 따라 경기도 여주로 내려갔다. 만석꾼의 집에 당도한 중국의 사신은 다짜고짜 이 집에 천하의 보물이 있음을 알고 찾아 왔으니 보물을 보여 달라고 보챘다. 만석꾼의 아들은 중국에서 온 이 귀빈에게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던 고려 상감청자 등 모든 보물을 꺼내어 구경을 시켰으나 중국의 사신은 모두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었다. 이 사신은 벌떡 일어나 대청마루에 걸려 있던 만석꾼의 아들이 토해낸 명태꽂이 비슷한 물건을 내려 바로 이 물건이 자신이 찾던 물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짜고짜 이 물건을 팔라고 하며 중국의 금화 2냥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만석꾼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술 먹고 토해낸 더러운 물건이나 자식 된 도리로 버리지 못한 것일 뿐이므로 두 손을 가로 저으며 그냥 가져가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중국 사신은 오인하고 다시 손가락을 네 개를 펴 보이며 금하 4냥을 주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이렇게 수차례 오인을 반복하다 결국은 금화 10만 냥, 지금 돈으로 하면 수십억 원이라는 큰돈으로 이 물건을 팔게 되었다.

중국 사신은 금하 10만 냥이라는 거금에 낙착 되었음에도 싱글벙글 하면서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하여 이 매매계약은 해제가 불가하다는 취지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만석꾼의 아들이 왜 이 같은 물건을 이렇게 비싸게 사가느냐고 물어보자, 중국 사신은 빙그레 웃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들은 이러저러한 보물들을 대자 중국 사신은 바로 사람의 목숨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사신은 신하를 시켜 압록강의 물을 한 동이 떠 오도록 하고는 그 물에 명태꽂이를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그 물은 막걸리와 비슷한 술로 변했고 다시 한 번 휘젓자 소주 비슷한 도수의 술로 변했다. 또 다시 휘젓자 이번에는 양주 정도의 독한 술로 변했고 다시 여러 번 휘젓자 그 물은 완전한 독주로 변한 것이었다. 중국 사신은 이 명태꽂이는 어느 한 사람의 일평생의 생명의 정기가 들어가 만들어진 술의 엑기스이므로 이것이 바로 천하의 기보라고 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러 중국 사신은 이 보물을 국가에 헌납했고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의 원병 요청을 접한 명나라의 휘종 황제는 이여송 장군에게 5만 병력을 주어 조선을 돕게 하면서 보급품 중 술은 이 천하의 기보를 대여 하면서 병사들에게 술이 필요할 때마다 이 보물로 술을 만들어 보급하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평양 벽제관 전투에서 이 술의 엑기스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결국 찾지 못했다. 이 땅 어느 곳에 어떻게 묻혀 있는지 알 길이 없게 된 것이다. 이 술의 엑기스 때문에 지금도 비 오는 날의 하수구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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