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3일 개성공단입주기업들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개성공단 정상화 촉구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입주기업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이들은 “기업들을 살리고 남북 평화협력을 위해 공단을 다시 열어야 한다”면서 정부 측에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개성공단 제1호 기업’ 에스제이테크의 유창근 대표이사는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간절히 원한다”고 호소했다. 유 대표는 이어 “모든 이들이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이번 사태로 (개성공단이) 폐쇄된다면 역사가 두고두고 그 폐쇄의 책임을 묻고 평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업인들의 간절함 바람과는 달리 남북은 개성공단 폐쇄 책임을 놓고 볼썽사나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설전은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 관련 남북 당국간 회담을 제의하면서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통일부는 5월14일 김형석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정부는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당면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남북간 노력이 시급하다는 인식하에 개성공단 현지에 보관중인 원부자재와 완제품 반출 등 입주기업의 고통 해소를 위한 남북 당국간 실무회담 개최를 북측에 제의한다”고 밝혔다.
이 성명은 이어 “우리 측은 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 등을 포함한 3명의 회담대표가 나갈 것이며, 북측도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장 등의 회담대표가 나올 것을 기대한다”고 한 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심각한 피해와 고통이 계속 누적되고 있다”면서 북한 측에 대화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북측은 하루 만에 대화제의를 일축했다. 북한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은 5월15일 우리 측 대화제의를 “개성공단 사태와 관련한 책임을 모면하고 여론을 오도하기 위한 교활한 술책”이라면서 “우리에 대한 또 하나의 도발적 망발”이라고 비난했다. 대변인은 또 “개성공업지구 전망과 앞으로 북남관계 향방은 전적으로 남측 당국의 태도 여하에 달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며 “통신타발이나 물자반출 문제와 같은 겉발림의 대화 타령이나 할 것이 아니라 근본문제를 푸는 데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자 우리 정부는 북측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통일부는 5월16일 오전 ‘북한총국 대변인 문답 관련 정부 입장’을 통해 “기업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부자재·완제품 반출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라면서 “이러한 정부의 진정성 있는 제안에 대해 북한이 어제 일방적 주장으로 이를 폄훼한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이어 “북한은 근본문제 해결 주장 등 개성공단과 무관한 주장을 반복하기 보다는 기업의 투자와 자산을 보장하기 위한 약속부터 지켜야 한다”면서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북한은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북, 개성공단 폐쇄 책임 둘러싸고 공방만 벌여
남과 북은 누가 먼저 실무회담을 제의했는지를 놓고 또 한 번 진실공방을 벌였다. 북측은 자신들이 먼저 남측에 원·부자재 및 완제품 반출과 입주기업인의 방북 수락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했다. 북한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은 5월15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에서 “우리 측은 지난 3일 남측 잔류 인원들이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에서 전원 철수할 때 공업지구 정상 유지·관리를 위한 관계자의 출입과 입주기업가들의 방문 및 물자 반출을 허용해 줄 의사를 표명하면서 그와 관련한 날짜까지 제시해줬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5월16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날짜를 제시해줬다’는 대목 외엔 전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정부 설명에 따라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5월3일 오후 6시 김호년 개성공단관리위 부위원장은 현금 수송차량과 함께 군사분계선 남측 지역에 도착했다. 6시25분엔 개성공단에 잔류했던 홍양호 개성공단관리위원장과 KT 직원 등 7명 북한 출입사무소를 출발했다. 이어 6시35분 김 부위원장과 현금 수송차량이 개성공단으로 출발했다. 이때 북한 중앙특구개발지도국의 한 관계자가 원·부자재, 완제품 반출 의사 및 입주기업인 방북 허용의사를 전해왔다. 이에 대해 김 부위원장은 “내 권한 밖이다. 공식적으로 입장 전달해 달라”고 대답한 뒤 오후 7시30분 북측에 현금 전달 후 공단을 빠져나왔다. 북측은 이후 아무런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즉각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응해 문제해결의 기회를 놓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정부가 2주 가까이 북측의 제의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점은 거센 반발을 샀다. 뒤이어 북측의 냉담한 입장은 정부의 미숙하고 미온적인 대응의 결과라는 지적도 나왔다. 장용석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개성공단 문제를 선제적으로 리드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의 즉흥적 발상이 사태 꼬이게 해
사실 남북간 벌어지는 진실공방과 거친 설전은 한국 정부의 즉흥적 발상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원·부자재 및 완제품 반출에 대한 대화 제의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박 대통령은 5월14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우리 기업들이 개성공단에 두고 온 완제품이나 원·부자재들이 하루 빨리 반출해 기업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통일부는 북한 측에 이와 관련된 회담을 제의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이어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고 남북한 주민의 번영과 행복한 통일”이라고 강조한 뒤 “개성공단도 단순한 정상화가 아니라 국제화를 위한 혁신적 변화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북한이 국제사회와 한 약속, 개혁을 위해서는 안전장치가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대화제의는 여러모로 의미가 남달랐다. 개성공단이 잠정 폐쇄 수순으로 접어들면서 현지에 남겨 놓은 원부자제와 완제품 반출은 반드시 풀어야 할 현안이었고, 현안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가 먼저 북측에 대화를 제의했기 때문이었다. 또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방미를 마치고 대북 정책에 대한 한미 공조를 재확인한 이후에 이뤄진 제의여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의미를 반감시키는 요인도 많았다.
북한을 다룰 때엔 돌발변수가 많아 관련 부처 간 긴밀한 협조가 전제돼야 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대화제의를 지시하면서 관련 부처인 통일부나 외교-국방 등 안보라인과 협의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제의가 이뤄졌던 시점도 부적절했다는 평가다. 당시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문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부의 대화제의가 국면전환용 카드가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야권은 즉각 포문을 열었다.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는 5월15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통일부와 사전 교감 없이 너무 즉흥적으로 일처리를 했다”고 지적했다. 박 전 원대대표는 이어 “북한은 (완제품이나 원·부자재 반출을 개성공단) 철수라고 볼 것이고, 완전 철수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이 대화에 응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 더 좋은 조건으로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측도 한국 정부의 의도를 일정 정도 간파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북한 총국 대변인은 “남조선 중소기업들의 불만과 민심의 비난을 무마해보려는 것과 함께 국제외교사에 일찍이 없는 윤창중 성추행사건으로 죽가마 끓듯 하고 있는 내외여론의 이목을 딴 데로 돌려 개망신당한 체면을 수습하고 ‘국면전환’을 해보려는 간교한 술책이 깔려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면서 강도 높게 비난했다.
한국 정부의 미숙한 처신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개성공단 사태의 직접적 발단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의 발언이었다. 김 국방장관은 지난 4월3일 새누리당 당사에서 열린 북핵안보전략특별위원회 회의에서 “국방부는 국민 신변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대책을 마련 중”이라면서 “만약 사태가 생기면 군사조치와 더불어 만반의 대책도 마련돼 있다”고 밝혔다. 김 장관의 발언은 개성공단에 체류 중인 남측 인원이 북측에 억류됐을 경우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북한의 ‘상시포위심리’ 이해해야
실제 군은 지난 2010년부터 한미 합동훈련인 ‘을지프리덤 가디언(UFG)’ 연습 때마다 유사한 상황을 상정해 놓고 훈련을 실시해왔다. 이 훈련에는 아파치 헬기(AH-64)와 특수작전용 헬기(MH-47, MH-60) 등 미군 장비의 지원을 받아 한미 연합작전을 펴는 경우와 특전사를 중심으로 한국군 단독으로 작전을 펴는 경우가 다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3월22일 한미 양국이 서명해 발효된 ‘한미 공동국지도발 대비계획’ 가운데에도 국지도발 유형으로 개성공단 인질사태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작전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실제 개성공단에 무력을 투입할 경우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또 8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에 대한 인질구출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또 작전의 실효성 여부를 떠나 북한을 타겟으로 한 군사작전이 국방부 장관에 의해 공개적으로 논의된 건 북한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반발 심리는 단순히 수사적인 차원을 뛰어 넘는 본능적인 거부반응임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 유력일간지인 워싱턴포스트지의 한국 특파원을 지낸 바 있는 셀릭 해리슨 국제정책 센터 선임연구원은 그의 저서 ‘코리안 엔드게임’에서 북한이 상시포위심리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시포위심리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핵전력과 주한미군의 존재가 북한으로 하여금 안보위협을 느끼게 하고 그 반작용으로서 군사적 대응을 준비해 왔다”고 말한다. 즉 북한은 미국이 남한에 배치된 지상군과 핵전력으로 북한을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다수의 대북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군사도발을 감행하는 이면엔 상시포위심리가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 정부는 사태의 책임이 북한에 있다는 입장이다. 통일부는 5월19일 김형석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되고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간 협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북한 당국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또 북한이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하며 먼저 대화를 제의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사실과는 전혀 다른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남북 관계는 미묘하고 예측불허의 돌발변수도 많기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 정부의 대화제의와 뒤이은 진실공방은 어설프게 보인다. 무엇보다 정부의 통일-외교-안보라인이 하루빨리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북한에게 이번과 같거나 훨씬 더 높은 수위의 역공을 당할 것이 분명하고 이렇게 되면 개성공단 정상화는 더욱 요원해진다.
박근혜 정부는 “이번 사태로 (개성공단이) 폐쇄된다면 역사가 두고두고 그 폐쇄의 책임을 묻고 평가할 것”이라는 공단 입주기업인들의 눈물겨운 호소를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