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항쟁 구속자 동지회 박남선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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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항쟁 구속자 동지회 박남선 상임대표
  • 주성진 기자
  • 승인 2018.03.0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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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아픔의 역사 다시는 없기를

[시사매거진 239호=주성진 기자] 영화 ‘화려한 휴가’ ‘택시’의 무대 5.18 민주주의를 향한 광주시민들의 항쟁. 광주항쟁의 중심의 선 당시 민주항쟁 시민군 상황실장으로 있었던 박남선 518항쟁 구속자동지회 상임대표를 만나 당시 회상과 이야기를 들었다.

박남선 상임대표님 현재 근황

3. 7. 11 공수 3개여단과 20전투사단 31사단 상무대 병력을 동원한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에 의해 도청이 진압되면서 보안사 지하실에서 살이 찢기고 손톱이 빠져나가는 고문을 받고 1. 2심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3년 여만에 석방 된 이후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 두환 일당의 퇴진과 처벌,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 소위 전문 데모꾼이 되어 살아오다 지금은 고문의 후유증을 치료를 받으며 평범한 민주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때의 회상

1593년 7월 임진왜란때 조선은 왜국에 호남을 제외하고는 점령당해 있을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사헌부 지평 현 덕승 에게 보낸 편지 구절 중에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라는 뜻이며 1592년 행주산성 진주성에서 앞장서 싸운 사람들이나 패배한 관군을 대신해 나라를 지키고자 나선 의병 대부분이 (기록상 45%) 호남 출신 인 점이고 또 한 가지로는 나라가 전쟁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군량미 인데 이 군량 공급기지로서의 호남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고 이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호남의 선조들은 항상 개개인의 이익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희생해왔음을 장군께서 아시고 그러한 말씀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두환의 12.12 군사쿠데타 이후 광주에서는 광주시민 모두가 분연히 일어나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전 두환 일당에게 저항한 것이 광주 민중항쟁 이었습니다. 결국 전 두환 일당의 쿠데타 세력에 의해 그 만행을 그리고 독재정권을 저지하지 못했던 불행한 역사였지만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과 대한민국이 민주화로 가는 動力(동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현재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은 마무리 되었는지

5.18광주민중항쟁이 시작한지 38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진행형이지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로 이어지는 극우 보수 세력들은 숭고한 5.18민중항쟁을 폄훼 하려고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내려와 민중항쟁에 참여하여 광주시민들을 선동하고 계엄 공수부대원들에게 항거토록 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광주시민들을 보호하기위해 강제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저를 비롯한 항쟁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을 북한정권의 핵심인사들 사진과 대조하며 북한 특수군 이라고 언론을 통해 가짜뉴스를 생산. 보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와 광주 시민들은 명예 훼손 으로 민. 형사 소송을 제기하여 현재 서울지검에서 조사하고 있으며 민사소송 1심에서는 저희들이 승소를 했습니다. 저를 북한의 황 장엽 이라고 지칭했고요. 이번 국방부 조사결과 밝혀졌지만 이제야 헬기기총사격과 광주폭격 진상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완전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때 어떻게 상황실장을 하게 되셨는지

지금껏 알려진 대로 비무장 비폭력의 광주시민들을 계엄공수부대원들은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지시 에 의해 무차별 학살 했습니다. 당시 저는 골재사업을 하면서 중흥1동 예비군 부중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의 평범한 소시민으로 일반청년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오고 있었지요.

계엄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한 폭력과 학살을 목격하고 그들의 계속되는 만행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서 선. 후배 친구들과 함께 참여 하게 되었고 결국 무장시민들과 함께 시민군을 결성 하게 되었고 시민 학생 투쟁위원회에서 무장 시민들을 지휘하는 상황실장(무장시민군대장)으로 선출이 되어 계엄군과 전투를 하면서 계엄군의 재 진입을 막고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3개 공수여단과 2개 전투사단 .1전투비행단등 약 2만여 계엄공수부대원들을 상대로 1980년 5월 2일 치열한 시가전을 치루 게 된 것이지요.

5.18 민주화운동이 광주에 미친 영향

글쎄요! 위대한 광주시민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 할 줄 아는 시민들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979년 미국 뉴욕에서 10분간 정전이 되었을 때 약 12.000여건의 강. 절도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광주에는 수천정의 무기와 탄약들이 널려 있었지만 단 한건의 강.절도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 내내 이승만. 박 정희 전 두환 최근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우익 정권들로부터 광주는 차별과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으로 광주에 어떤 특별한 영향을 받았다 기 보다는 80년 5.18 민주화운동 이전부터 항상 깨어있는 시민들이 살아오고. 살아가는 도시가 빛 고을 광주가 아닐까요?

현 정부를 평가를 하신다면

처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때 현 정부가 민주화를 완성해 가는데 과연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 했지만 역대 어느 정부, 김 대중 노무현 정권보다도 훨씬 국민을 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훌륭한 정부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노력 하시는 모습에 박수와 찬사를 보내며 큰 足炙(족적) 남기시기를 기원 합니다

시사매거진 독자에게 한 말씀

어제는 過去(과거) 오늘은 現實(현실) 그리고 내일은 未來(미래)라고 말하지만 어제가 없는 오늘과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불행했던 어제의 광주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어제를 잊고 내일로 나아가자는 의견도 없지 않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지난 역사의 진실규명과 정리만이 광주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사 매거진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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