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이 올해로 꼭 60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환갑이라고 해서 60년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 왔다. 한미 양국정상은 이 같은 의미를 제대로 인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에서 60주년은 지혜와 성숙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주기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한국말로 ‘환갑’이라고 하면서 “한국에서 60번째 생일을 생명과 장수를 기념하는 환갑으로 특별히 축하한다고 들었다”고 화답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5월8일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이하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지난 60년 동안 한미동맹은 한반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그리고 점차 전세계의 안정, 안보 및 번영의 초석이 되어왔다”고 전제한 뒤 “지난 60년간 지켜온 한반도의 안정을 바탕으로 우리는 한미 동맹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정의 핵심축으로 기능하고 21세기 새로운 안보 도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동맹을 계속 강화시키고 조정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한미 양국은 이번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와와 안정을 구축하는 한편 비핵화,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또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키기 위해 지속 노력해 나갈 것을 선언했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선 “북한이 고립에서 탈피하고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북한의 도발로부터 양국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의 대응노력과 함께 정보·감시·정찰 체계 연동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상호 운용가능한 연합방위력을 지속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번 선언은 남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위협이 날로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미 양국이 공고한 공조와 연대를 과시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특히 미국은 선언을 통해 “확장 억지와 재래식 및 핵전력을 포함하는 모든 범주의 군사적 능력 사용을 포함한 확고한 대한(對韓)방위 공약을 재확인한다”고 명시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미 양국은 이번 선언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정의 핵심축(linchpin)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명시함으로서 한미동맹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한미 동맹의 근간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60년 전과 비교해볼 때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한미 동맹, 이 대통령 외교노력의 결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빼놓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 대통령은 건국 초기부터 공산주의의 위협이 상존하는 한국이 생존과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선 초강대국 미국과 법적·도덕적 의무를 짊어지는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에 이 대통령은 미국에 줄기차게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전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든 1953년 6월17일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미국에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는 브릭스 대사와 회동한 자리에서 “한국에는 ‘오늘’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그리고 ‘내일’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눈에 띠는 대목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절실하다는 이 대통령의 언급이다.
당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반소·반공의 보루’가 돼야 한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미국에 대한(對韓) 안보공약을 요구한 것도 이 같은 신념의 발로였다. 동시에 일본의 팽창주의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또 미국이 일본을 중요시한 나머지 한국을 버리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재건 정책을 본격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더욱 강력한 어조로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고 나섰다.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이 대통령의 요구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미국은 1905년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병탄을 용인한 바 있었다. 미국은 또 한반도 분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국은 1945년 8월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자탄 피격에 당황한 일본은 화평조약 체결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소련은 이 같은 사태전개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8월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침공한데 이어 8월10일엔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바로 이날 저녁 미국은 황급히 회의를 소집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핸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딘 러스크 대령과 찰스 본스틸 중령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지도를 근거로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38도선을 기준 삼아 미군은 이남을, 소련은 이북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제안했다. 미국의 한반도 분단 제안은 졸속정책의 산물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1953년 7월 초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한한 로버트슨 미 국무부차관보에게 미국의 일본 재건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미국에 대한 한국 국민의 확고부동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910년 일어난 일본의 한국합병과 1945년 한반도 분단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두 번 씩이나 미국에 배신당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슨 차관보가 방한한 시점은 휴전협정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를 의식해 “지금 진전되는 사태(휴전협정)는 또 다른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시사하고 있다”면서 미국을 압박하기도 했다.
미국은 이 대통령의 요구에 미온적으로 대응해 왔다. 오히려 1950년 1월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하고 일본을 포함한 알류산 열도로부터 일본-오키나와-필리핀까지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이라는 이른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군마저 철수시켰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데다 한반도의 군사적 가치가 낮다고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태도는 한국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트루먼 행정부는 1951년 5월 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에 대해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휴전협정 체결을 추진했다. 트루먼에 이어 집권한 아이젠하워는 휴전협정 준수라는 전제조건을 달아 한국군을 1개 해병여단을 포함해 20개 사단 규모로 증강한다는 구상을 마련했다. 한편 이 대통령에게 휴전협정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군사·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대통령은 끝내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한국 내와 그 부근에’ 미군이 주둔할 것이며 방위조약을 ‘신속하게’ 비준하겠다는 약속을 받는데 성공했다. 난항 끝에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이 대통령의 외교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한미동맹, 70년대 접어들어 절체절명 위기 맞아
한미동맹은 1953년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기점으로 확대일로를 걸었다. 사실 한국은 안보공약의 최대 수혜국 가운데 하나였다. 셀릭 해리슨 국제정책센터 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1997년까지 미국의 對韓 경제·군사적 원조액은 190억 7,000만 달러였고 이 가운데 11억 5,000만 달러는 무상원조였다. 한국보다 더 많은 원조를 받은 나라는 이스라엘(561억 달러), 이집트(367억 달러), 남베트남(218억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위기상황도 없지 않았다. 특히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면서 한미동맹은 중대 위기에 봉착했다.
미국은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방위공약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 패배에 따른 후유증 때문이었다. 미국은 1970년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 독트린은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태도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닉슨 독트린에 따르면 소련이 핵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 위기상황이 벌어져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71년 미국이 7사단 병력을 한국에서 철수시킨 점도 불안을 가중시켰다.
이런 와중에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다. 미국의 안보공약 실행의지가 날로 약화되는 와중에 한국군 단독으로 낙후된 무기 체계만으로 안보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1976년부터 3년 연속 국방관련 예산을 증액하는 한편 군사력 증강을 위해 중화학 공업 육성계획을 본격 추진했다. 1975년부터 1980년 사이 한국의 제조업 투자액 가운데 75%가 중화학 공업에 쓰여졌다. 자주국방 정책은 핵무기 개발 계획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박 대통령은 1972년부터 핵기술을 전수 받을 국가로 프랑스를 선택하고 긴밀하게 협력해 나갔다. 워싱턴포스트지에서 한국 특파원을 지낸 돈 오버도퍼 한미관계연구소장은 그의 저서 <두개의 한국>에서 “프랑스와의 긴밀한 협력 결과 1974년 매년 20kg 상당의 핵분열성 플루토늄을 제조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의 설계도가 완성됐다”고 적었다. 오버도퍼 소장은 “이 시설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것과 맞먹는 위력을 지닌 핵폭탄 2기를 제조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미국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1974년 인도가 비동맹 개발도상국가로서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했다. 인도의 핵실험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핵무기 확산 방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정보기관을 동원해 핵관련 자재의 이동경로를 면밀하게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핵무기 생산에 필요한 자재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은 박 대통령에게 즉각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파기함과 동시에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국가적 신의에 관한 문제”라는 이유를 내세워 맞섰다. 이러자 미국은 對韓 안보공약을 취소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1976년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은 “한국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미국은 안보 및 경제 협력관계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프랑스로부터 도입하려던 재처리 시설을 포기했고 캐나다와 체결한 2기의 중수로형 원자로 도입계약도 1기만 도입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로서 한미동맹이 전면 재검토될 수 있었던 위험천만한 상황은 일단락됐다.
한미동맹은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기조를 굳건히 유지하며 60주년을 맞았다. 한미양국 정상은 60주년을 계기로 한미동맹이 ‘신뢰동맹’, ‘가치동맹’임을 재확인한 한편 양국관계를 21세기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한 수준 끌어올렸다. 미진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선언에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유인할 구체적인 방안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한미동맹 60주년선언’의 화룡점정은 한미 양국이 협력해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 내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