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의 국내정치·대선개입 의혹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진원지는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과 한겨레신문의 폭로였다. 진 의원은 5월15일과 19일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건을 잇달아 공개했다. 이번에 드러난 문건은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댓글 의혹에 비할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5월15일 한겨레신문의 단독 보도로 공개된 문건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이란 제목의 이 문건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 이후 세금급식 확대, 시립대 등록금 대폭 인하 등 좌편향·독선적 시정 운영을 통해 민심을 오도, 국정 안정을 저해함은 물론 야세(野勢) 확산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어 면밀한 제어방안 강구긴요”라고 작성배경을 밝혔다.
이 문건은 이어 우면산 산사태 원인 재조사, 마을공동체 사업, 두꺼비 하우징(주택 개·보수 사업), 지하철 해고 노동자 복직 등 박 시장이 펼치는 정책 대부분을 좌편향 정책으로 규정했다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문건엔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관련 예산 집행실태 철저 점검’, ‘여당 소속 시의원(28명)들에 예산안에 대한 철저한 심의를 독려’ 등 박 시장의 영향력을 ‘제압’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지침도 명시돼 있었다. 심지어 학부모 단체, 경총·전경련, 저명교수·논객, 언론 사설·칼럼, 자유청년연합·어버이연합 등 범보수 진영 산하 민간단체를 총동원해 비난여론을 조성한다는 계획까지 포함됐다.
이 문건을 폭로한 한겨레신문은 해당 문건이 국정원이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신문은 국정원 전·현직 직원의 언급을 인용해 문건작성일이 문제의 문건이 박 시장이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지 한달 여 뒤인 2011년 11월24일 작성됐고, 작성자가 국내정보를 담당하는 국정원 2차장 산하 국내 정보수집·분석 부서임을 뜻하는 국정원 고유표시가 적혀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국정원이 해당문건을 작성했다는 근거는 또 있다. 문건을 공개한 민주통합당 진선미 의원은 5월15일 기자회견을 통해 “원세훈 전 원장이 당시 국익전략실(일명 B실장)이라고 불리는 신 모 실장에게 특별 지시해 정치에 개입했다”면서 “(국정원 작성 추정) 문건은 원 전 원장이 조직차원에서 정치개입을 지시한 증거라는 제보를 받았는데 확인 결과 신 모 실장은 당시 국정원 간부였다”고 주장했다.
진 의원실은 이날 공식 트위터를 통해 “만약 이 문건이 국정원의 문건이고, 이에 따라 국정원에 의해 박원순 시장에 대한 사정과 공작활동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두 말할 나위없는 국정원법 위반 행위이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고 한 뒤 “첫째, 이 문건이 실제로 국정원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둘째, 제보의 내용과 같이 원세훈 원장의 특별지시가 있었는지 현재 진행 중인 국정원의 불법적 정치개입 사건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규명되는 것이 마땅하다”라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국정원과 박 시장의 끈질긴 악연
문건이 폭로되자 박 시장은 즉각 반발했다. 박 시장은 5월15일 이창학 서울시 대변인 명의로 발표된 ‘국정원 추정 문건보도에 대한 서울시 입장’을 통해 “진상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가 벌어진 것이고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야만적인 국기문란 행위”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보도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과거 권위주의 시대 정치사찰, 공작정치가 부활한 것이다. 국정원이 이 문서를 작성했는지, 작성 책임자는 누구인지, 문건의 계획들이 실제 실행에 옮겨졌는지에 대해 낱낱이 검증되고 규명돼야 할 것”이라면서 사정당국에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국정원과 박 시장의 악연은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다. 국정원은 지난 2009년 6월에도 박 시장과 법정공방을 벌인 바 있다.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였던 박 시장은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정원이 시민단체와 관계를 맺는 기업 임원들까지 전부 조사해 개별적으로 연락하는 통에 많은 단체들이 재정적으로 힘겹다”고 언급했고 국정원은 이에 반발해 박 시장에게 2억 원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2010년 9월15일 “국가는 업무 정당성과 청렴성과 관련해 국민의 비판과 감시, 견제를 받아야 하므로 비판 내용이 현저히 악의적이거나 허위일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며 입증 책임은 국가에게 있다”면서 박 시장의 손을 들어줬다.
국정원이 박 시장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법조계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로부터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었다. 실제 미국과 영국 등은 국가를 명예훼손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국가는 권력을 통해 스스로 명예를 회복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국정원과의 법정공방으로 곤욕을 치렀던 박 시장이 또 다시 국정원과 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박 시장은 이번 사태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문건을 국정원이 작성했다면 1,000만 서울시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치공작이나 사찰은 우리 헌법의 품격을 모독하는 행위다. 그리고 피와 땀, 희생과 헌신으로 마련한 민주주의의 성취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1,000만 시민의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당선된 시장을 종북·좌파로 매도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고 강조했다.
국정원, 이번엔 반값등록금 주장을 종북으로 규정
진 의원은 ‘박시장 제압 문건’의 파장이 채 가시기도 전인 5월19일 또 하나의 국정원 작성 추정문건을 공개했다. 진 의원이 공개한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 공세 차단’이라는 제목의 문건은 “야당·좌파 진영에서는 당정이 협의해 등록금 부담완화 대책을 마련키로 했음에도 ‘등록금 인상=정부 책임’ 구도 부각에 혈안”이라면서 정부책임론을 ‘비열한 행태’라고 규정했다. 이 문건은 이어 “대학 등록금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부터 2008년간 물가상승률 대비 4~5배까지 인상했던 것을 정부가 인상폭을 물가상승률내로 안정시킨 상황”이라고 전제한 뒤 “국가장학사업 총 규모가 918억 원에서 5,218억 원으로 6배 이상 증액되었음에도 ‘저소득층 장학사업 축소’라며 거짓 선동”이라고 적었다.
문제의 문건은 박 시장 관련 문건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명시해 놓았다. 해당 문건은 “(정동영 당시 의원과 민노당 권영길 의원 등) 각계 종북좌파 인사들은 겉으로는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면서도 자녀들은 해외에 고액 등록금을 들여 유학보내는 등 이율배반적 처신”을 한다면서 “야권의 등록금 공세 허구성과 좌파인사들의 이중처신 행태를 홍보자료로 작성, 심리전에 활용함과 동시에 직원 교육 자료로도 게재”하겠다고 밝혀놓았다. 이 문건엔 작성일시와 작성자, 그리고 작성자의 내선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2-1’으로 표시된 작성부서는 박 시장 관련 문건을 작성한 곳으로 지목된 국익전략실이었다. 무엇보다 ‘2011.06.1.’로 기재된 문건 작성 시점은 국정원의 국내 정치개입 의혹을 증폭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문건 작성 시점은 반값등록금이 정치권의 최대 쟁점으로 대두됐던 시점이었다. 직접 이해당사자인 대학생들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학생들은 반값등록금 쟁취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흘 넘게 벌였다. 한편 고려대, 이화여대 등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는 6월10일 동맹휴업을 결의했다. 이 시점은 또 박근혜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집권여당의 유력 후보로 부상하면서 반값등록금에 대한 입장 표명요구가 빗발쳤던 시기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입장표명 요구는 자연스럽게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반값등록금이 이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문건 작성 이후 보수단체와 언론, 당시 집권당인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반대여론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대학교육의 당면과제를 연구하는 전문기관인 한국대학연구소는 “문건 작성 시점 이후 ‘등록금 인상은 노무현 정권 탓’이라는 주장이 대대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와중에 문건을 작성하는데 관여했던 국정원 간부가 청와대에 입성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똥이 현 정부로 튀는 양상이다.
다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반값등록금 문건을 작성한 국익전략실 산하 사회팀 팀장이 청와대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실에 근무 중인 것으로 확인된데 이어 중간 책임자급 간부 한 명도 국정원 감찰실에서 근무 중인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정치권의 한 소식통은 “현 정권 탄생에 기여한 보은 인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개입한 정황이 속속 드러남에 따라 검찰수사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박 시장 제압 문건’이나 ‘반값등록금 관련 문건’ 공히 정치관여를 금지한 국정원법 제9조를 위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국정원법 제9조 제1항은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 또는 가입을 지원하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그리고 2항과 3항은 각각 ‘그 직위를 이용하여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 또는 반대 의견을 유포하거나, 그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위하여 기부금 모집을 지원하거나 방해하는 행위 또는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공공 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공공기관의 자금을 이용하거나 이용하게 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국정원 국내정치 개입 의혹은 현 박근혜 정권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위험요인이다. 야당은 공세의 고삐를 바싹 죄는 모양새다. 신경민 민주당 최고위원은 5월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사건은 (정부가) 국정혼란을 유발하고자 국정원을 ‘정치흥신소’로 쓴 것”이라고 말했다. 배재정 대변인은 국정원 직원의 청와대 입성을 두고 “박근혜 정부가 국정원의 불법 정치공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와 여당인 새누리당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검찰 역시 “언론 보도만 갖고 수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국정원 댓글 사건에 수사력을 모으겠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정치공방과는 별개로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의혹은 자유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훼손한 심각한 사태다. 정보기관의 존재 의미는 국가의 안위다. 특히 한반도는 남북이 대치하는 데다 미-일-중-러 등 4대 강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민감한 지역이기 때문에 강력한 정보기관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과거 이 나라의 정보기관은 안보라는 명분하에 군사 독재체제의 보위부대를 자처하며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사찰과 불법체포, 고문을 자행했다.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국정원의 국내 정치개입 의혹은 과거의 악몽을 다시금 일깨웠다.
일단 검찰은 5월27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재소환해 국내정치 개입 의혹을 집중 추궁했다. 검찰 안팎에서는 원 전 원장이 사법처리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이제 공은 현 정부에게 넘어왔다. 결자해지의 자세로 철저한 진상규명에 임하지 않는다면 현 정부의 정통성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을 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라는 이상돈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 위원의 충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