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매거진239=김길수 발행인) 지난 2월 15일 명절 연휴 첫날 씁쓸한 뉴스 하나를 접했다. 서울의 대형병원에 근무하던 신입 간호사가 건물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대체 왜 명절날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먼저 앞섰다.
당시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터진 후 투신한 간호사의 남자친구는 간호학과 간호사 대나무숲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결혼까지 약속했다던 그는 여자 친구의 죽음이 그저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태움(괴롭힘)’문화에 대해 언급했다.
태움문화는 간호사 조직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질적인 괴롭힘 문화다. 재가 될 때까지 달달 볶는다고 해 ‘태움’이라고 한다. 이 태움을 잘 버티는 사람들은 ‘젖은 장작’, 잘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마른 장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론 일을 배우는 사회 초년생들은 상사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일 외적인 지나친 인격모독이나 폭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부분에서 태움은 문제가 되어 왔다. 사람의 인격은 모두 존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격적인 모독과 괴롭힘의 문화는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병원 내에서 고질적으로 자행되어 왔던 어두운 이면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했다. 왜 이런 문화가 생겨났을까.
간호사의 태움문화는 고질적인 인력 부족이 원인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신입 간호사를 제대로 된 교육기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하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지적이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란 얘기다. 선진국의 경우 중환자실 간호사 1명당 1명의 환자를 돌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간호사 1명 당 2~3배에 달하는 환자를 돌본다. 이건 중환자실의 얘기일 뿐 일반 병실 내에서의 비중은 더욱 크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도 이런 문제가 지적됐다. “간호사가 돌보는 환자 수가 너무 많고, 병원의 하루 일과도 제대로 치러내기 힘든 와중에 초과근무를 견뎌내면서 다른 간호사를 가르치는 일은 한 사람의 인격을 말살시키고도 남을 만큼 고되다”고 게시되어 있다.
필자는 이번 뉴스를 접하고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일선의 한 간호사는 태움이란 단어가 최소한 50년 전부터 현장에서 쓰였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다는 이 간호사의 말에 더욱 놀라웠다. 50여 년 간 불합리한 문화로 인해 그 간 얼마나 많은 간호사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아왔을까. 그리고 이런 비합리적인 문화가 고질적으로 행해져왔음에도 우리 사회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제야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필자 역시 언론인으로서 반성하게 됐다.
요즘 동계올림픽으로 열기가 뜨겁다. 그런데 사회의 한 이면에서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파문을 비롯해 간호사들 사이에 벌어져 왔던 태움문화 사건까지, 2월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을 보고 언론인으로서 우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언론인, 그리고 바른 주장을 펼 줄 아는 언론인. 그래서 시사매거진을 발행하면서 정론직필(正論直筆)을 내걸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본지는 그간 정론직필을 얼마만큼 해왔는지 반추하며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