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중심 정치문화 바뀌는 계기될까 미지수
한명숙 총리 내정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국회는 4월 19일 본회의를 열고 한명숙 총리 내정자 임명동의안에 대한 무기명 찬반 투표를 실시해 찬성 182표, 반대 77표, 기권 3표, 무효 2표로 가결처리했다. 반대표가 77표나 나온 것이 눈에 띈다. 당론을 정하지 않고 개개인의 선택에 맡긴 한나라당에서 상당한 반대표가 나온 것으로 보이고 한미 FTA 협상 등 현안에 대한 한 총리의 입장에 비판적이었던 민주노동당 의원 서너명도 반대표를 던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명숙 총리는 임명동의안이 통과되자 "국민들의 애정과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야당과 여당, 모든 국민들이 타고 있는 대한민국호가 균형잡힌 어울림의 항해를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명숙 총리는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오후에는 취임식을 가진 뒤 정식 업무에 들어갔다.
정치분야는 다른 사회영역에 비해 여성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수식어에서 볼 수 있듯이 한명숙 총리가 국회에서 임명동의를 받은 것은 여성의 정치참여가 상당히 진전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최초의 여성총리 한명숙'은 앞으로 정치권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강금실 전 법무장관에 이어 한명숙 총리까지, 바야흐로 여의도 정치권에 강한 여풍(女風)이 불고 있는 것이다.
한 총리의 임명을 통해 남성중심적인 기존 정치판의 낡은 문화가 깨지고, 정치 문화에 새 바람이 불어 올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특히 학연, 지연, 파벌 관행과 이해찬 전 총리 골프 파동에서 볼 수 있듯이 접대 관행 등 전반적으로 부패와 이어지기 쉬운 정치권 전반의 문화들이 상당 부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성 운동의 대모(大母)
올해 63세로 평안남도 평양출생인 한명숙 총리는 민주화 운동과 여성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여성계의 거목이다.
결혼한지 6개월만에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남편 박성준 교수와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 받은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 총리 본인도 유신 말기인 1979년에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모진 고문과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여기서 일화 하나. 정기적으로 면회를 오던 부인이 한 달이상 면회도 오지않고 편지도 없자 박 교수는 한명숙 총리가 교통사고 등으로 죽은 줄 알고 무척 상심했다. 하지만 며칠 뒤 한 총리의 동생이 찾아와 "언니가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잡혀갔다"는 말을 전하자 상당히 기뻐했다고 한다.
한명숙 총리는 1987년에는 전국 20여개 여성단체를 한데 묶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1993년에는 직접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정치권에는 국민의 정부시절인 99년에 민주당 비례대표로 첫 발을 들여놨고 국민의 정부 후반에는 여성부 장관을, 참여정부 초반에는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2004년 치러진 총선에서는 경기도 일산에서 한나라당 홍사덕 전 의원을 누르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여야 정치권은 최초의 여성 총리인 한명숙 총리에 대해 일제히 축하를 보냈다. 하지만 강조점은 각 당별로 조금씩 달랐다.
열린우리당은 참여정부 후반기를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국민화합형 국정운영을 위해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한나라당은 야당을 존중하는 상생과 통합의 정신으로 국정을 이끌어 달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은 공정한 선거관리를, 민주노동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을 주문했다.
세계 12번째 여성 총리 배출
여성계는 여성총리 시대의 개막을 일제히 환영했다. 여성계는 한 총리 체제가 단지 정치영역의 변화로 끝나지 않고 여성에 대한 사회의식 변화, 여성의 지위 향상, 남녀 평등정책 개발, 공직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 여성 진출 확대 등의 ‘파급효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 총리도 지난 4월 18일 인사청문회 마무리 발언에서 이런 기대를 의식한 듯 “(총리가 되면) 우리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박씨를 물고 오는 강남제비’의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한 총리가 떠안아야 할 과제 또한 적지 않다. 한 총리의 최우선 과제는 책임총리제의 조기 착근이다. 이는 임기 후반기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양극화 해소 등 중장기 과제에 전념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정부의 정책 전반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는 ‘정책통’이 아닌데다, 첫 여성총리인 한 총리의 국정운영 능력에는 남다른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야당과의 잦은 마찰에도 불구, 내각을 확실하게 통할하며 업무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해찬 전 총리와 대비될 공산도 크다.
따라서 한 총리는 빠른 시일내에 정책 현안을 파악하고, 공직사회에 대한 리더십을 확보해 ‘안정감’을 심어줘야 한다. 가뜩이나 현재 총리실에는 검·경 수사권 조정을 필두로 일자리 만들기 당정특위, 방송통신 융합 단일기구 설치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참여정부의 각종 정책과제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서는 정치권의 협조가 불가피한 만큼, 한나라당 등 야당과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청문회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당적 이탈’ 문제를 쟁점으로 삼았던 만큼, 임박한 5·31 지방선거 관리를 얼마나 잡음 없이 치러내느냐가 대야관계의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한 총리가 임명안 가결 직후 소감을 밝히면서 다시 한번 ‘공정한 선거관리’를 강조한 것도 야당을 의식해서다.
또한 지방선거 후 대선 국면이 본격화되면 레임덕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정부가 정치논리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점도 한 총리의 주요 과제다. 청와대는 한 총리 체제가 안정궤도에 진입하기까지, 매주 월요일 대통령·총리 오찬회동을 이어가는 등 당분간 ‘총리 힘 실어주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방선거도 女風?
한편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풀뿌리 민주주의에 여성 정치가 든든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여성 정치인들은 지난 1995년 초대 통합지방선거 때부터 꾸준하게 지방정치의 문턱을 넘기 위해 도전해 왔지만,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의 높은 벽을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까지 광역자치단체장의 경우 단 한명의 여성도 배출하지 못했고, 230개 기초 자치단체장 가운데 여성 비율이 1%를 넘어선 적이 없다는 통계가 이를 웅변한다.
17대 총선에서 여성 당선자의 비율이 처음으로 두자리 수를 돌파하면서 ‘여풍(女風)’이 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성 정치인에게는 지방선거가 총선보다도 좁은 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는 그 어느 때 보다 여성정치가 싹트는데 적합한 조건을 갖췄다는 인식이 확산된 상태다.
헌정사상 첫 여성총리가 탄생하면서 여성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제고된 가운데 여야 각 정당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 정치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방침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이번 지방선거에서 어느 정당보다도 적극적인 ‘여성마케팅’을 펼칠 계획이다. 한명숙 총리내정자와 서울시장 후보로 유력한 강금실 전 법무장관을 내세워 여성표를 적극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당은 지방선거 전체 후보 가운데 여성의 비율을 1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기초의원의 경우 340명, 광역의원의 경우 100명, 기초단체장은 20명, 광역단체장은 1명의 후보를 배출하겠다는 것이다.
4월 9일 현재 우리당 공천 신청현황에 따르면 기초의원 공천신청자 가운데 여성은 71명, 광역의원은 21명, 기초단체장 13명, 광역단체장 1명으로 목표치를 다소 밑돌고 있다.
그러나 우리당은 전략공천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여성후보들을 전면에 내세울 계획이다. 우리당 여성후보들은 전략공천자 가운데 여성을 30% 일괄 배정해 달라고 요구한 상황이다.
우리당 서울시당의 경우 서울시 광역의원 공천을 신청한 여성후보 7명 중 3명(42.8%)을 전략공천자로 선정했다.
우리당 서울시당은 또 기초의원 공천을 신청한 여성후보 24명 중에서는 25.0%인 5명을 단수공천했고, 구청장 공천을 신청한 여성후보 8명 가운데 양천구의 유선목(54) 현 서울시의원을 전략공천자로 결정했다.
한나라당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우리당의 여성마케팅에 맞불을 놓는다는 계획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최연희전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 파문 여파로 여성표 이탈 방지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한나라당 여성 공천 확대
한나라당은 ▲권역별 기초단체장 최소 1명 이상 여성 공천 ▲지방의회 공천자 중 30% 여성 할당 등의 지침을 각 시.도당에 하달했다.
당장 지난달 말 송파구청장 후보로 김영순(57) 전 정무2차관실 차관이 공천 후보자로 ‘발탁’된 것을 비롯, 현재까지 인천 중구청장, 부산구청장 등 3개 지역 기초단체장 후보에 전략공천 방식으로 여성이 낙점됐다.
당 안팎에선 추후 공천 작업이 진행되면서 몇몇 곳에서 여성 기초단체장 후보가 추가로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도 적지 않다.
특히 경기지사 후보 경선에서는 김영선 전재희 의원 등 2명의 여성 의원이 김문수 의원을 추격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한나라당 서울시당은 지난 4월 6일 현재 광역의원 공천자 88명 가운데 여성후보 6명을 포함시켰고, 기초의원 공천자 317명 가운데 여성후보 33명을 할당하는 등 과거에 비해 여성의 전진배치가 두드러진 상황이다.
중앙당 공심위 관계자는 "아직까진 여성 신청자 비율이 저조하고 선발기준에 못미치는 경우도 있어 현실적으로 여성공천 지침을 따르는데 어려움이 있다"면서도 "여성 비율이 낮은 광역.기초의회 비례 대표는 가급적 여성으로 채우는 등 여성의 정계 진출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도 김민아 전 전북도의회 의원을 전주시장 후보로 확정하는 등 지방선거 후보의 35%를 여성에게 할당할 방침이고, 민주당은 경선에 참여하는 여성후보에게 득표의 25%를 가산하는 등 여성정치 지망생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그러나 여성 정치인의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높아지면서 여성 유권자의 투표율 및 여성 후보자의 지지도도 함께 제고될 것"이라면서도 "이미 지난 총선 때 여성 후보에 대한 표결집 현상이 상당부분 결실을 봤기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에서 눈에 띄는 정도의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명숙 총리실 어떻게 바뀌나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인 한명숙 총리가 이끌게 될 총리실은 ‘정책통’과 ‘정무통’을 양 날개로 하는 실무형으로 진용이 짜여질 전망이다.
이해찬 전 총리가 ‘냉철하고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보여온 데 반해 한 총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통해 그동안 추진돼 오던 현안들을 차질없이 진행시키는데 초점을 맞춰 총리실 체제를 갖출 것으로 예상된다.
한 총리는 먼저 참여정부 초기부터 줄곧 청와대에서 정책을 담당해 참여정부의 철학과 정책방향을 꿰뚫고 있는 김영주 국무조정실장에 정책 현안에 관한한 많은 힘을 실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한 총리가 챙겨야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나 저출산.고령화 대책, 검.경 수사권 조정, 국민연금 제도 개혁 등 중요한 정책 현안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김 실장은 정책통 답게 든든한 한 쪽 날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 총리는 또한 당정관계나 국회 업무 등 정무에 능하고 대 언론관계가 원활한 인물로 총리비서실장을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총리는 김 실장과 함께 다른 한쪽 날개 역할을 해야 하는데다 이 전 총리가 ‘골프 파문’에 퇴진한 점을 고려해 위기 대응능력도 뛰어난 비서실장을 인선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양 날개를 중심으로 한 총리는 이 전 총리 사임 이후 후임 총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의를 표한 임재오 정무수석을 비롯한 비서진 8명에 대한 사표를 선별수리하는 방식으로 비서진도 교체하게 된다.
총리실 내부에서는 사표를 낸 비서진이 ‘이 전 총리의 사람들’이라기보다 당 차원에서 총리실에 보내진 경우가 대부분인 만큼 업무의 연속성 등을 고려해 일단 소폭 교체한 뒤 단계적으로 보강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총리실은 한 총리가 여성이란 점을 고려해 수행 및 경호 진용도 여성 위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총리실 조직 곳곳에서 여성들의 활동폭도 좀 더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일하는 실세 총리’로 불린 이 전 총리가 취임하기 전인 2003년말 각부처 파견인력을 합쳐 395명에서 현재 620여명으로 확대된 총리실 규모는 각종 기획단 등의 활동시한 종료시 단계적으로 축소과정을 밟게 될 전망이다.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한 총리는 새롭게 일을 벌이기보다 기존 정책이나 시스템을 잘 이끌어 가는데 중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며 "총리실이 크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여성 컬러에 맞는 변화들은 곳곳에서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