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침해VS정당한 처벌 존폐여부 논란
정치권·종교계 폐지 목소리, 반대여론도 커
발 문: 국제 엠네스티는 올해를 ‘한국의 사형제 폐지를 위한 집중 캠페인의 해’로 선정했다. 국회에서는 사형제 폐지를 위한 법안 심의에 앞서 4월 4일 공청회를 열었다.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력도 사형제 폐지를 위해 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물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용산 초등생 허모(11)양 살해범에게 1심 재판에서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재판부가 최근의 사형제 폐지 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허양의 가족은 판결에 거세게 항의하며 피고인에 대한 사형 선고를 요구했다. 사형을 구형한 검찰도 즉시 항소하겠다며 판결에 불만을 나타냈다.
서울 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김윤권)는 13일 허양을 성추행하려다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모(53)씨에게 무기징역을, 사체 유기를 도운 아들(26)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 김씨는 나이 어린 피해자를 성추행한 뒤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그 범행의 결과가 너무나 중하고 참혹해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검사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면서도 “피고인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체포된 뒤에는 죄를 뉘우치고 있는 점을 고려해 피해자와 유족에게 참회할 시간을 갖도록 무기징역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장은 “사형은 인간의 생명 자체를 영원히 박탈하는 궁극의 형벌로, 문명국가의 이성적인 사법제도가 상정할 수 있는 극히 예외적인 형벌”이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재판부가 이번 판결을 앞두고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사형제 폐지론에 대해 깊이 고민했음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법정은 일순간 대혼란의 아우성으로 소란스러워졌다. 허양의 부모 등 유족들은 판결이 내려지자마자 방청석을 박차고 일어나 울부짖으며 재판부에 항의했다. 이미 허양의 부모는 김씨에게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해 달라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한 상태였다. 허양의 아버지(38)는 “우리 딸아이에겐 앞으로 수십년의 인생이 남아 있었다. 저 사람 때문에 10년밖에 못 살고 죽었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허씨는 “재판장의 자식이 이런 일을 당했더라도 무기징역밖에 안 내리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검찰도 곧바로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곽규택 담당검사는 “사형제 폐지론이 일고 있는 것은 알지만 사회적 공감대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다”며 “실정법상 사형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만큼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재판엔 강금실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예고 없이 찾아와 재판을 지켜봤다. 강 후보는 판결 뒤 “피고인이 동종 범죄로 집행유예 기간인데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마음이 아프다. 이는 우리 사회가 범죄를 방치하고 예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범인의 처벌뿐만 아니라 예방과 치료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판결은 사형제 폐지와 폐지 반대 운동을 벌이는 쪽에도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김명식 팀장은 “피고인의 범행은 전국민의 분노를 샀지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또다른 인간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것일 뿐”이라며 “사형제 폐지로 나아가는 대세에 부합하는 판결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대한변호사협회 하창우 공보이사는 “재판장이 사형제 폐지에 대한 소신을 갖고 있어 이런 판결이 나온 것 같다”며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성폭행과 살인 등 잔혹한 범죄에 사형을 선고해 경각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재발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이 판결은 사형제 존폐 여부에 대한 불씨를 재점화 시켰다.
존폐 기로의 사형제
4월 4일 국회에서 열린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공청회에서도 사형제 존폐를 놓고 해묵은 논란이 되풀이됐다. 공청회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면된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이 2004년 12월 절대적 종신형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한 뒤 국회에서 처음 열린 것이다.
최근 어린이 성폭행·살인 사건으로 사형제 폐지 반대 목소리가 높고, 법무부가 사형제 원점 재검토 입장을 밝히는 등 공론화된 상태라 이목이 모아졌다. 사형제 폐지를 위한 범종교연합과 국제엠네스티 회원 등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4월 임시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하라고 촉구한 뒤 공청회에 참석했다. 진술인으로 참석한 이헌규 대구지검 부장검사, 유해용 사법연수원 교수, 민경식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이사 등은 국회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들과 법리 논쟁을 벌였다. 그동안 숱하게 논의돼 온 사형제의 범죄 억제 효과 정도, 사형제를 규정한 현행 형법의 위헌 여부, 살인범과 피해자 인권문제 등이 주 내용이었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최근 한 언론의 '사형수 리포트' 기사를 언급하면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는 “오늘 논의가 법률적 접근에만 머물렀다”며 “범죄학자, 사형 언도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람, 살인 피해자의 가족 등으로부터 좀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반면 폐지에 신중해야한다는 입장인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은 “사형을 허용하는 개별 법률이 80개가 넘는다”며 “개별사안에 대해서도 실증적으로 점검한 뒤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4년 26세의 나이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유 의원은 지난 2004년 12월 여야 의원 175명의 서명을 받아 ‘사형제폐지특별법안’을 발의했었다. 하지만 법안이 제출된 지 불과 나흘 후에 연쇄살인범 유영철 씨에게 사형이 선고돼 사형제 문제가 논란이 됐었고, 최근에는 잔혹한 아동성폭력이 연달아 발생해 사형제 존치를 주장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게 높아진 상황이다.
반면 국제엠네스티가 우리나라를 2006년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집중캠페인 국가로 지정한 것에 힘입어 사형제 폐지론 역시 논리와 타당성을 갖추고 활발히 홍보돼 왔다. 유 의원은 “이 문제는 각 당 당론으로 갈 것이 아니고 개별 의원들 자유투표로 처리될 문제인 만큼 최선을 다해 의원들을 설득하겠다”면서도 “리당 내에도 이 법안에 서명 안 한 분들이 꽤 많고 그 분들 나름의 반대 소신이 뚜렷하다”고 우려감을 내비쳤다. 유 의원은 “여러 이유로 이제야 국회 공청회 절차를 밟게 됐으니 좀 더 두고 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4월 임시국회에서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계 원로 공동성명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교계 원로들은 기자회견에서 “법과 제도의 미명 하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사형을 제도적 살인으로 규정한다”며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의 입법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독교사형폐지운동 연합회 문장식 목사가 대독한 이 성명에서 원로들은 “정부는 사형폐지조약에 하루라도 빨리 가입해 인권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한다”면서 “4월 임시국회에서는 반드시 사형제폐지안이 통과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국회에 촉구 한다”고 밝혔다.
불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장 현종 스님은 “현직 국회의원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절대다수 의견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국회와 법무부에 권고했을 뿐더러 법무부 장관도 종신형으로 사형제를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며 “국회는 법안 통과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종 스님은 “살인죄 외에도 국가보안법, 군형법 등 89개조에 달하는 법률이 사형을 형벌로 규정하고 있다”면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8년간 사형이 집행된 예가 없을 만큼 집행이 엄격해졌고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이제는 입법에 의한 제도적 폐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김희진 사무국장은 “현재 사형 폐지국이 122개국이고 존치국이 74개국인데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존치국”이라며 “한국의 사형제 폐지는 아시아 지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고 한국이 진정한 인권국가로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청회, 찬반 양론 팽팽
기자회견에 이어 열린 법사위의 사형제 폐지 공청회에선 찬반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김형태 변호사는 “문명국은 모두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고 이론적으로도 국가는 인간의 생명 박탈권을 갖지 못한다”며 “범죄자는 종신형 등 대체입법을 통해 처벌하고 피해자 가족에게는 사회적 부조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대 허일태 교수도 “한국의 사형제는 재정이나 인력 등의 문제로 중범죄자를 평생 감옥에 가둬둘 수 없는 사정에서 기인했다”면서 “이제 이들을 사형을 시키지 않아도 무기수로 격리수용할 여력이 있다”고 가세했다.
반면 이헌규 대구지검 형사3부 부장검사는 “사형제 존폐 문제는 각 나라의 문화수준과 사회현실에 따라 국민의 총의를 모아 결정할 문제”라며 “법무부는 사형제를 존치시키면서 사형규정 조문의 단계적 축소 방향으로 개선방안을 잡고 있다”고 밝혔다. 민경식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이사는 “사형제는 종교적 이유나 인생관이 아닌 사회방위의 문제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존치돼야 한다”며 “대상 범죄의 축소, 독립된 위원회에서의 집행 여부 결정 등을 보완책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겸 동국대 교수도 “사형제는 결코 야만적이 아니라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를 지키기 위한 필요악이자 최후 수단으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공청회는 천주교 주교단과 신자 11만6,000여 명이 사형제 폐지를 국회에 청원해 열리게 됐다.
122개 나라가 사형제 폐지·중지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현재 122개 국가가 사형제를 폐지하거나 중지했다.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과 네덜란드 등 유럽 선진국들이 이미 19세기에 물꼬를 텄고, 지금은 모잠비크·세네갈 등 아프리가 국가와 부탄·동티모르 등 아시아 국가 등 모두 97개국에서 사형제를 법적으로 폐지했다. 또 토고·지부티·스리랑카 등 25개 나라가 사실상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사형제를 유지하는 나라는 미국·일본·중국·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쿠바·이라크·북한 등 74개 나라만 남았다.
미국은 사형제에 관한 한 국제적 기준 국가가 못 된다. 지난해 3월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결정이 나기 전까지 미성년자를 사형에 처하는 지구상의 단 5개 국가(콩고민주공화국·이란·나이지리아·사우디아라비아 포함) 중 하나였고, 실제 집행 건수는 가장 많았다.
미국 안에서도 12개 주는 사형제를 폐지했다. 주목할 점은 1980~90년대 군사독재를 벗어나 민주화를 이룬 나라들(아르헨티나·남아프리카공화국 등)과 사회주의 몰락으로 서구식 규범을 받아들인 동구권 국가들(헝가리·폴란드·우크라이나 등)도 대거 사형제 폐지 대열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치열한 민주화 과정을 겪고도 사형제 폐지를 못한 우리나라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법원은 지난 95년 “인권 존중에 기반 한 사회가 되려면 생명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며 “살인범을 범죄 억제를 위한 본보기로 사형에 처하는 것은 인간을 대상화시키는 행위”라고 위헌 판결을 내렸다. 지난 97년 법무부가 23명을 무더기로 처형하면서 “정부의 엄정한 법집행 의지를 표명해 범법자들에게 법의 엄정함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과 대조되는 태도다.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들도 국민 여론이 폐지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흥미롭다. 프랑스는 지난 8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한 뒤 사형제 폐지 법안을 냈는데, 당시 여론은 66%가 사형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회는 “올바른 입법을 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라며 법을 통과시켰다. 처음엔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했으나, 현재는 18년이 지나면 가석방도 허용하고 있다. 인권 문제는 다수로부터 소수의 권리를 보호해주기 위한 차원이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다수결 원칙의 입법부보다 사법부가 앞서가는 경우도 눈에 띈다. 앞서 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미국의 위헌 판결이 그 예다. 특히 헌법으로 사형이 금지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잔인한 살인행위 등에 대해선 반드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한 형법 조항마저 인간 존엄성에 위배된다며 지난 77년 위헌이 선언됐다.
정치권·종교계 폐지 목소리, 반대여론도 커
발 문: 국제 엠네스티는 올해를 ‘한국의 사형제 폐지를 위한 집중 캠페인의 해’로 선정했다. 국회에서는 사형제 폐지를 위한 법안 심의에 앞서 4월 4일 공청회를 열었다.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력도 사형제 폐지를 위해 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물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용산 초등생 허모(11)양 살해범에게 1심 재판에서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재판부가 최근의 사형제 폐지 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허양의 가족은 판결에 거세게 항의하며 피고인에 대한 사형 선고를 요구했다. 사형을 구형한 검찰도 즉시 항소하겠다며 판결에 불만을 나타냈다.
서울 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김윤권)는 13일 허양을 성추행하려다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모(53)씨에게 무기징역을, 사체 유기를 도운 아들(26)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 김씨는 나이 어린 피해자를 성추행한 뒤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그 범행의 결과가 너무나 중하고 참혹해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검사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면서도 “피고인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체포된 뒤에는 죄를 뉘우치고 있는 점을 고려해 피해자와 유족에게 참회할 시간을 갖도록 무기징역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장은 “사형은 인간의 생명 자체를 영원히 박탈하는 궁극의 형벌로, 문명국가의 이성적인 사법제도가 상정할 수 있는 극히 예외적인 형벌”이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재판부가 이번 판결을 앞두고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사형제 폐지론에 대해 깊이 고민했음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법정은 일순간 대혼란의 아우성으로 소란스러워졌다. 허양의 부모 등 유족들은 판결이 내려지자마자 방청석을 박차고 일어나 울부짖으며 재판부에 항의했다. 이미 허양의 부모는 김씨에게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해 달라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한 상태였다. 허양의 아버지(38)는 “우리 딸아이에겐 앞으로 수십년의 인생이 남아 있었다. 저 사람 때문에 10년밖에 못 살고 죽었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허씨는 “재판장의 자식이 이런 일을 당했더라도 무기징역밖에 안 내리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검찰도 곧바로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곽규택 담당검사는 “사형제 폐지론이 일고 있는 것은 알지만 사회적 공감대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다”며 “실정법상 사형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만큼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재판엔 강금실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예고 없이 찾아와 재판을 지켜봤다. 강 후보는 판결 뒤 “피고인이 동종 범죄로 집행유예 기간인데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마음이 아프다. 이는 우리 사회가 범죄를 방치하고 예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범인의 처벌뿐만 아니라 예방과 치료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판결은 사형제 폐지와 폐지 반대 운동을 벌이는 쪽에도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김명식 팀장은 “피고인의 범행은 전국민의 분노를 샀지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또다른 인간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것일 뿐”이라며 “사형제 폐지로 나아가는 대세에 부합하는 판결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대한변호사협회 하창우 공보이사는 “재판장이 사형제 폐지에 대한 소신을 갖고 있어 이런 판결이 나온 것 같다”며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성폭행과 살인 등 잔혹한 범죄에 사형을 선고해 경각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재발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이 판결은 사형제 존폐 여부에 대한 불씨를 재점화 시켰다.
존폐 기로의 사형제
4월 4일 국회에서 열린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공청회에서도 사형제 존폐를 놓고 해묵은 논란이 되풀이됐다. 공청회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면된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이 2004년 12월 절대적 종신형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한 뒤 국회에서 처음 열린 것이다.
최근 어린이 성폭행·살인 사건으로 사형제 폐지 반대 목소리가 높고, 법무부가 사형제 원점 재검토 입장을 밝히는 등 공론화된 상태라 이목이 모아졌다. 사형제 폐지를 위한 범종교연합과 국제엠네스티 회원 등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4월 임시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하라고 촉구한 뒤 공청회에 참석했다. 진술인으로 참석한 이헌규 대구지검 부장검사, 유해용 사법연수원 교수, 민경식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이사 등은 국회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들과 법리 논쟁을 벌였다. 그동안 숱하게 논의돼 온 사형제의 범죄 억제 효과 정도, 사형제를 규정한 현행 형법의 위헌 여부, 살인범과 피해자 인권문제 등이 주 내용이었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최근 한 언론의 '사형수 리포트' 기사를 언급하면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는 “오늘 논의가 법률적 접근에만 머물렀다”며 “범죄학자, 사형 언도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람, 살인 피해자의 가족 등으로부터 좀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반면 폐지에 신중해야한다는 입장인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은 “사형을 허용하는 개별 법률이 80개가 넘는다”며 “개별사안에 대해서도 실증적으로 점검한 뒤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4년 26세의 나이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유 의원은 지난 2004년 12월 여야 의원 175명의 서명을 받아 ‘사형제폐지특별법안’을 발의했었다. 하지만 법안이 제출된 지 불과 나흘 후에 연쇄살인범 유영철 씨에게 사형이 선고돼 사형제 문제가 논란이 됐었고, 최근에는 잔혹한 아동성폭력이 연달아 발생해 사형제 존치를 주장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게 높아진 상황이다.
반면 국제엠네스티가 우리나라를 2006년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집중캠페인 국가로 지정한 것에 힘입어 사형제 폐지론 역시 논리와 타당성을 갖추고 활발히 홍보돼 왔다. 유 의원은 “이 문제는 각 당 당론으로 갈 것이 아니고 개별 의원들 자유투표로 처리될 문제인 만큼 최선을 다해 의원들을 설득하겠다”면서도 “리당 내에도 이 법안에 서명 안 한 분들이 꽤 많고 그 분들 나름의 반대 소신이 뚜렷하다”고 우려감을 내비쳤다. 유 의원은 “여러 이유로 이제야 국회 공청회 절차를 밟게 됐으니 좀 더 두고 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4월 임시국회에서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계 원로 공동성명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교계 원로들은 기자회견에서 “법과 제도의 미명 하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사형을 제도적 살인으로 규정한다”며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의 입법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독교사형폐지운동 연합회 문장식 목사가 대독한 이 성명에서 원로들은 “정부는 사형폐지조약에 하루라도 빨리 가입해 인권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한다”면서 “4월 임시국회에서는 반드시 사형제폐지안이 통과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국회에 촉구 한다”고 밝혔다.
불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장 현종 스님은 “현직 국회의원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절대다수 의견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국회와 법무부에 권고했을 뿐더러 법무부 장관도 종신형으로 사형제를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며 “국회는 법안 통과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종 스님은 “살인죄 외에도 국가보안법, 군형법 등 89개조에 달하는 법률이 사형을 형벌로 규정하고 있다”면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8년간 사형이 집행된 예가 없을 만큼 집행이 엄격해졌고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이제는 입법에 의한 제도적 폐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김희진 사무국장은 “현재 사형 폐지국이 122개국이고 존치국이 74개국인데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존치국”이라며 “한국의 사형제 폐지는 아시아 지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고 한국이 진정한 인권국가로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청회, 찬반 양론 팽팽
기자회견에 이어 열린 법사위의 사형제 폐지 공청회에선 찬반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김형태 변호사는 “문명국은 모두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고 이론적으로도 국가는 인간의 생명 박탈권을 갖지 못한다”며 “범죄자는 종신형 등 대체입법을 통해 처벌하고 피해자 가족에게는 사회적 부조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대 허일태 교수도 “한국의 사형제는 재정이나 인력 등의 문제로 중범죄자를 평생 감옥에 가둬둘 수 없는 사정에서 기인했다”면서 “이제 이들을 사형을 시키지 않아도 무기수로 격리수용할 여력이 있다”고 가세했다.
반면 이헌규 대구지검 형사3부 부장검사는 “사형제 존폐 문제는 각 나라의 문화수준과 사회현실에 따라 국민의 총의를 모아 결정할 문제”라며 “법무부는 사형제를 존치시키면서 사형규정 조문의 단계적 축소 방향으로 개선방안을 잡고 있다”고 밝혔다. 민경식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이사는 “사형제는 종교적 이유나 인생관이 아닌 사회방위의 문제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존치돼야 한다”며 “대상 범죄의 축소, 독립된 위원회에서의 집행 여부 결정 등을 보완책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겸 동국대 교수도 “사형제는 결코 야만적이 아니라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를 지키기 위한 필요악이자 최후 수단으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공청회는 천주교 주교단과 신자 11만6,000여 명이 사형제 폐지를 국회에 청원해 열리게 됐다.
122개 나라가 사형제 폐지·중지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현재 122개 국가가 사형제를 폐지하거나 중지했다.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과 네덜란드 등 유럽 선진국들이 이미 19세기에 물꼬를 텄고, 지금은 모잠비크·세네갈 등 아프리가 국가와 부탄·동티모르 등 아시아 국가 등 모두 97개국에서 사형제를 법적으로 폐지했다. 또 토고·지부티·스리랑카 등 25개 나라가 사실상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사형제를 유지하는 나라는 미국·일본·중국·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쿠바·이라크·북한 등 74개 나라만 남았다.
미국은 사형제에 관한 한 국제적 기준 국가가 못 된다. 지난해 3월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결정이 나기 전까지 미성년자를 사형에 처하는 지구상의 단 5개 국가(콩고민주공화국·이란·나이지리아·사우디아라비아 포함) 중 하나였고, 실제 집행 건수는 가장 많았다.
미국 안에서도 12개 주는 사형제를 폐지했다. 주목할 점은 1980~90년대 군사독재를 벗어나 민주화를 이룬 나라들(아르헨티나·남아프리카공화국 등)과 사회주의 몰락으로 서구식 규범을 받아들인 동구권 국가들(헝가리·폴란드·우크라이나 등)도 대거 사형제 폐지 대열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치열한 민주화 과정을 겪고도 사형제 폐지를 못한 우리나라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법원은 지난 95년 “인권 존중에 기반 한 사회가 되려면 생명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며 “살인범을 범죄 억제를 위한 본보기로 사형에 처하는 것은 인간을 대상화시키는 행위”라고 위헌 판결을 내렸다. 지난 97년 법무부가 23명을 무더기로 처형하면서 “정부의 엄정한 법집행 의지를 표명해 범법자들에게 법의 엄정함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과 대조되는 태도다.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들도 국민 여론이 폐지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흥미롭다. 프랑스는 지난 8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한 뒤 사형제 폐지 법안을 냈는데, 당시 여론은 66%가 사형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회는 “올바른 입법을 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라며 법을 통과시켰다. 처음엔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했으나, 현재는 18년이 지나면 가석방도 허용하고 있다. 인권 문제는 다수로부터 소수의 권리를 보호해주기 위한 차원이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다수결 원칙의 입법부보다 사법부가 앞서가는 경우도 눈에 띈다. 앞서 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미국의 위헌 판결이 그 예다. 특히 헌법으로 사형이 금지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잔인한 살인행위 등에 대해선 반드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한 형법 조항마저 인간 존엄성에 위배된다며 지난 77년 위헌이 선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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