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의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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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의 평전
  • 이선영 기자
  • 승인 2017.12.1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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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이선영 기자) 박헌영은 한국 근 · 현대사의 힘이자 짐이다. 지속적인 역사의 단절은 근본적인 국가변화를 요구하지만, 밀려드는 폭력의 세례는 집단의 공포와 함께 총체적 주눅의 세월을 낳는다. 혁명 없는 시대에 홀로 혁명을 계몽하고 당(黨)이라도 만들어 세상의 변혁을 꾀하려 한 호기(豪氣)는 뭇사람들의 단순한 용기를 넘어서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내 공고해지는 정치적 진영(陣營)논리는 ‘적’과 ‘동지’를 가르면서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만’ 하는 살벌한 쟁투의 길마저 기꺼이 튼다. 맞서려는 자와 굽히는 자들의 다툼이 식민의 세월보다 슬픈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구한말에 태어나 왕조의 몰락을 목격하고 들끓는 정념으로 3 · 1을 겪은 그가 천신만고의 강점기 투쟁 이후 다다른 해방공간은 역사의 단절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도록 채근한다. 이미 적들의 나라가 되어버린 이남(以南)을 등지고 월북을 단행한 그에게 정치권력 대신 한국전쟁이 다급했던 대목도 혹독한 삶의 단면이다. 어느 한 구비에서조차 안주하지 못한 그의 극적 극단성이야말로 그 자체가 탐구 대상이며 모두의 반면교사다.

본디 ‘사람’에 주목하기보다 손쉽게 ‘사상’에 매몰되고 ‘이론’과 ‘정책’부터 먼저 찾는 이 땅의 정치연구는 아직도 특정 인물의 행적이나 동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평전’은 ‘자서전’이나 ‘회고록’보다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위인전’이나 ‘픽션’의 한계마저 극복할 인문적 준거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형식적 가치 의 하나다. 하지만 박헌영을 평전 형식에 담는 작업은 좀체 용이하지 않다. 정치공간별로, 진영별로 입지를 달리하는 ‘그’를 학문의 잣대로 ‘균형 있게’ 다룬다는 건 버겁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 평전이 적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들여다보면 동북아의 비극이 보이고 좀 더 다가서면 오늘의 정치 갈등마저 또렷이 묻어나는 ‘거울 효과’는 평전 작업을 이끈 동력이다. 이 책은 ‘혁명가의 연대기'라는 종축(縱軸)을 중요시하되, 그가 맺은 개인적 · 정치적 ‘관계’의 횡축(橫軸)에 상대적으로 치중한다. 기왕의 연구자들은 박헌영의 ‘어디’에 주목하는가. 태생적 한계와 이어지는 정치적 고통은 그가 만나는 여인들과의 관계를 어디까지 잇고 또 끊는가. 젊은 시절의 문학적 감수성은 그의 혁명 활동과 글쓰기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 죽음에 이르도록 그와 함께 한 인물들의 면면은 정녕 혁명가의 유별난 결기와 강고한 외피를 지탱하는 인간적 자원이었을까. 폭력지상주의로 그를 호도하려는 공격의 알맹이는 무엇이며, 정치적 신비주의의 틀에 갇힌 허구의 공박(攻駁)을 미끼삼아 그를 두 번 죽이려는 미움의 정체는 도무지 뭘까. 서울을 등지며 ‘북’을 택한 까닭이 북에서도 견디지 못할 운명의 배양소라면, ‘전쟁’과 ‘죽음’은 예정된 수순이었던 걸까. 늘 ‘곧다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징표인가, 장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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