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하늘의 시간적, 계절적 기운의 흐름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나타내 왔다. 여기서 비롯된 ‘갑을병정(甲乙丙丁)’은 보통사람들을 평등하게 지칭할 때 사용된다. 갑남을녀(甲男乙女), 갑론을박(甲論乙駁)에서 갑과 을도 모두 동등한 대상을 열거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우열과 서열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차례대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4계절에 더 나음과 못남이 없는 것과 같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갑(甲)과 을(乙)은 본래 뜻과 딴판이다. 최근 들어 평등의 개념이 아닌 관용적으로 지위의 고저를 나타내는 ‘갑과 을’의 병든 관계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연이어 불거진 사건, 사고들로 2013년 상반기 한국 사회는 추한 이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신호탄은 미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 터졌다. 지난 4월1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한 포스코 에너지의 임원 A씨가 기내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여 승무원을 폭행한 것. 이후 신고를 받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게 사실상 입국을 거부당해 A씨는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기내식으로 제공된 밥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며 라면을 끓여줄 것을 요구했고, 제공된 라면에 불만을 표시해 승무원이 라면을 여러 차례 다시 끓여 제공했으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잡지로 승무원의 머리를 때린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며 사건이 일단락됐으나 며칠 후 이 소식이 SNS 상에서 빠르게 확산돼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질적인 ‘갑을문화’의 폐단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고 포스코 측은 공식 블로그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비난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포스코는 해당 임원을 보직해임 했고 그는 다음날 사표를 제출했다. 이후 포스코는 실추된 기업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윤리실천 다짐대회’를 열고 비슷한 일의 재발방지에 나섰다. 하지만 뒤이어 중소제과업체 회장이 호텔 직원을 폭행했다는 보도가 전해지며 누리꾼들을 경악케 했다. 전통 경주 빵과 천안 호두과자를 생산해 판매하는 한 제과업체 회장이 호텔 현관 서비스 지배인을 폭행한 것인데, 호텔 측은 회장의 직원 폭행을 쉬쉬하다 언론에 보도가 나가자 뒤늦게 조사에 착수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남양유업 사태’로 드러난 대기업 ‘밀어내기’ 다반사
지난 달 분유업계 1위 남양유업 영업사원과 대리점 점주가 나눈 전화통화 녹취록이 유투브를 통해 공개됐다. 녹취록에는 30대 본사 영업사원이 물건을 받을 수 없다는 50대 대리점주에게 “물건 못 들어간다는 소리 하지 말고 당신이 책임지라”며 반말과 욕설을 퍼붓고 물품을 강제로 떠넘긴 내용이 담겨져 있다. 주문 물량보다 많은 물건을 출고하고, 200~500만 원에 달하는 명절 떡값을 받아온 그간의 횡포가 수면위로 드러나자 이튿날 남양유업은 홈페이지에 대표 이사 이름으로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당 직원의 사표를 즉각 수리하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으나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른바 ‘라면 상무’와 ‘빵 회장’의 횡포에 이미 충격을 입은 많은 이들이 남양유업 불매 운동에 나선 것. 이에 회사의 주가가 폭락하고 불매운동이 확산되자 남양유업은 5월10일 기자회견을 열고 ‘밀어내기가 유통업계의 오랜 관행이었음’을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으며 개선책 마련을 약속했다. 남양유업은 이미 지난 2006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밀어내기 관행에 대한 시정 명령을 받았지만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강압적으로 넘기는 등 비윤리적 경영을 이어왔다. 올해 1월에는 녹취록을 공개한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협회’를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던 남양유업측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발생하고 사회적 여론이 나빠지고 나서야 사과하고 대책마련에 나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본사와 대리점 간의 갑을관계에서 비롯된 밀어내기가 사실로 밝혀짐에 따라 공정위는 업계1위 업체를 대상으로 불공정행위 관련 조사에 나섰다. 공정위가 1위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에 착수한 것은 이들 기업이 시장지배적 사업자로서 시장의 모범이 되기보다는 불공정 행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특히 공정위는 올해 들어 제빵업계 1위인 파리크라상에 대해 가맹점주에게 인테리어 공사비를 떠넘긴 혐의로 5억여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전통주 시장 점유율 1위인 국순당에 매출 감소 책임을 도매점에 떠넘긴 혐의를 적발해 과징금을 부과했다.
세계적 망신거리 된 고위공직자의 성추행 사건
감투를 쓰거나 완장을 찬 고위 공직자의 비도덕적인 이른바 ‘갑질(갑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을에게 횡포를 행사하는 것)’도 도마 위에 올랐다. 윤창중 전 청와대 수석 대변인이 박근혜 정부의 첫 방미 일정 중에 주한 미국 대사관 소속의 인턴 여대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피해 여성은 미국 워싱턴 DC 경찰에 ‘백악관 인근의 한 호텔 내에서 용의자가 허락 없이 엉덩이를 만졌다(grab)’라고 진술했고, 이 사실은 미주 최대 여성 커뮤니티인 ‘미시USA’라는 사이트를 통해 퍼져나갔다. 결국 윤 전 대변인은 귀국 후 청와대 공직기강팀의 조사에서 이를 시인했다. 정부 고위 공직자가 인턴 여대생을 성추행한 이 사건은 갑의 횡포의 정점을 찍은 ‘grab 사건’으로 불리며 다양한 패러디물을 양산했다.
또한 세계 최고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위키피디아에 등재되며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됐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윤창중 전 대변인이 한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공무원이라 소개하며 2013년 박근혜 정부의 대변인으로 임명됐다가 주미 문화원 소속 인턴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질됐다고 올렸다. 더불어 이번 사건이 박근혜 대통령의 첫 번째 방문인 미국 방문의 성과를 반감시켰다고 기술했다.
밑도 끝도 없는 “바꿔줘”, 손님은 왕이다?
얼마 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정 여사’라는 캐릭터가 인기를 끌었다. 사용한 게임기를 가져와 중독됐다며 바꿔달라고 하는가 하면, 1년 전에 사간 분필을 가져와 바꿔달라고 한다. 손에 분필가루가 묻기 때문이란다.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갑의 횡포가 이슈화되면서 ‘손님은 왕이다’라는 인식 속에 인권침해와 비인격적 대우, 성추행 등을 참아가며 일해야 했던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감정노동’이란 말투나 표정, 몸짓 등 드러나는 감정표현을 직무의 한 부분으로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을 말하는 데, 이러한 감정노동은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백화점, 마트 등의 유통업, 콜센터를 운영하는 금융업과 공공부문 등 거의 모든 서비스 업종이 포함된다.
백화점의 아동용품 매장에서 일하는 B씨는 손님의 전화를 받기가 겁이 난다. 최근 30대 부부가 아이 2명을 데리고 매장을 방문했다. 부부는 100만 원 어치의 아이 옷을 사고 돌아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아이 엄마가 전화를 걸어와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으며 “100만 원 어치를 사는데 말리지 않고 뭐했느냐”며 “못 배운 매장 점원 따위가” 등의 인식 공격적 발언을 쏟아 냈다. B씨는 정신이 멍해지더니 이내 눈물만 쏟아냈다고 한다. 서비스의 매뉴얼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도 노동자는 ‘죄송하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서비스업에 종사한다면 그 정도는 참아야지’라는 잘못된 사회 인식 속에서 감정노동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현실은 감정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이어지기 쉽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한 ‘감정노동을 많이 하는 30개 직업’에 따르면 감정노동의 지수를 5점 만점으로 개산했을 때 4.7점을 차지한 항공기 객실 승무원이 감정노동을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홍보도우미, 통신서비스 판매원, 콜센터 상담원, 간호사, 사회복지사, 유치원 교사 등이 뒤를 이었다. 또한 지난 2010년 민간서비스 사업장 71곳에서 일하는 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서비스직 노동자 중 경증 우울증을 제외한 심리 상담이 필요한 수준의 우울증 환자 비율이26.6%로 징계해직자 28.5%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되는 세상, 나 먼저 돌아봐야
‘라면 상무’, ‘빵 회장’, ‘grab’ 등 기득권층의 횡포가 드러나자 연이어 고발이 이어졌다. 갑의 횡포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분했지만 일반인들도 감정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직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호텔이나 마트, 백화점 등의 소비시장에서는 구매자로서 ‘갑’이 된다. 이 때 고객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라 인식되는 것들을 누리기 위해 ‘을’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드러난 왜곡된 갑을관계의 재정립은 경제민주화의 시작이자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갑의 횡포는 기업들의 윤리 경영에 대한 갈증을 더욱 크게 만든 한편 억압받고 있던 을들이 입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조심스런 기대를 갖게 한다.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들은 성적을 ‘갑을병정’식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이제 우열을 가리는 갑을이 아닌 공존과 상생의 갑과 을로 발전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