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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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전태일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7.11.0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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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외마디 남기고 분신
[출처_뉴시스]

(시사매거진 235호_신혜영 기자)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앞,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이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리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 같은 전태일의 희생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알게 해 준 중요한 계기가 됐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의 한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1954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였으나, 같은 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를 중퇴하고 이때부터 동생과 함께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기술을 바탕으로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보조로 취업해 하루 14시간씩 힘겨운 노동을 하고 일당으로 당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받았다. 이듬해 직장을 옮겨 미싱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 무렵 함께 일하던 여공이 직업병으로 인해 폐렴 3기 진단을 받고 강제 해고되는 등 사업주의 노동착취와 비인간적인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전태일은 그 뒤 여공들의 어려운 일을 도와주었는데 단지 여공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1968년 우연히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인 노동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 법의 내용을 이해한 뒤, 이때부터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드디어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고 회원들과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설문을 통해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나고 평화시장에서도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1970년 9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개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켜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그 뒤 노동실태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를 수합하고,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노동조건 개선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평화시장 근로개선 운동에 나선다. 10월 8일 2명의 동료와 함께 평화시장(주) 관리사무실을 찾아가 사업주 대표들과 임금·노동시간·노동환경의 개선,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해줄 것 등을 협의했다. 이즈음 정부의 태도도 바뀌어 회유를 통해 일을 무마하려는 쪽으로 돌아섰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약속을 했으나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분신사건 당일인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火刑式)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를 준비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평화시장 주변에는 시위 소식을 들은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경찰들은 평화시장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주위를 향해 소리 높여 그들의 요구를 외쳤으나 플래카드를 경찰에게 빼앗기고, 시위 역시 경찰의 방해로 무위로 끝나갈 즈음,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했다.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70년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만 전국에서 2,5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두가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에 자극을 받아 출현했다. 그 결과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오늘날에도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오늘날에도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출처_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캡처)

[1917년 11월 7일]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 혁명’ 발발

300여 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가 멸망한 3월 혁명이 일어난 후 1917년 4월 3일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한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이트공화국이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으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혁명임시정부인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레닌은 밖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전국이었던 독일에 대해 휴전을 선포하고 안으로는 대대적인 사회주의 개혁정책을 폈다. 11월 7일 새벽,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시가를 재빨리 장악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여 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그날 밤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노동자와 농님의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레닌이 의장, 트로츠키가 외무위원, 루이코프가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20세기 공산권과 자본주의권의 대립이라는 세계의 큰 틀을 만들어 냈다.
제국주의 세계 질서 속에서 식민지의 민족해방 운동을 부추기기도 했던 이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1978년 11월 18일] 짐 존스의 인민사원 집단 자살

남미 가이아나 정글에 자리 잡은 짐스타운! 1978년 11월 18일 사이비 교주인 미국인 짐 존스와 그를 추종하는 미국의 광신도 914명의 시체가 발견됐다. 가이아나 짐스타운에 세워진 이른바 인민사원에서 발생한 이 최악의 집단자살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당시 어린이 276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청산가리를 탄 음료를 마셨고 저항한 일부는 총살된 것으로 조사 됐다. 교주 존스(46세)와 그의 애인 마리아 카차리스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교주 짐 존스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가이아나로 떠났던 레오 라이언 미 하원의원과 NBC방송 기자 등 5명도 피살된 채로 발견됐다. 이튿날 가이아나 군대가 현장을 조사하고 생존자를 찾았다. 11월 20일까지 아이들 5명과 어른 30명이 정글에서 나왔다. 생존자 중에는 총을 쏜 래리 레이턴도 끼어 있었다.
현장에서 탈출한 교주의 고문변호사에 따르면 존스가 “종단투쟁의 일환으로 집단자살하는 아름다움”을 역설했다고 한다.
미국의 국민들이 사이비 교주를 추종해서 외국으로 건너가고 아무런 저항 없이 집단자살의식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미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목사 출신의 짐 존스는 한때 샌프란시스코 주택국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정치수완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빈민박해와 계급차별 타파를 주장하며 교인을 모았다. 캘리포니아 레드우드계곡, 샌프란시스코로 사원을 옮기며 신도 수를 늘리고 특히 백인 중심의 미국 교회를 비판, 흑인 신자를 끌어들였다. 신자들의 헌금으로 존스 목사는 로스앤젤레스에도 교회를 세우고 경호원과 일단의 열성스런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라 안을 비행기로 날아다녔다. 신자들을 위해서 엄청난 수의 버스도 구입했다.
|그러나 이탈한 신도들의 비리 폭로가 이어지자 1,200명 신도와 함께 가이아나로 떠난다. 포트카이투마 인근 정글에 정착한 그는 3,000만 평 규모의 ‘존스타운’을 건립했다. 존스는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칼 마르크스와 히틀러, 스탈린 등에 심취했고 “세상이 핵전쟁으로 멸망할 것”이라며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처했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인종화합의 거룩한 이상향을 표방했지만 존스타운의 이면에는 노동착취, 재산약탈과 성폭력, 이탈 위협이 존재했다. 사원을 하렘으로 이용한 그는 여성신도들로 하여금 30여 명의 아이를 낳게 만들었다. 한 때 짐 존스를 추종했던 사람들은 교주 짐 존스는 성도착 환자로 자신을 신으로 믿길 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도 어떻게 집단 자살이 결정되고 왜 수많은 신도들이 이 참극에 순수하게 동참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01년 11월 27일] 노벨상 제정

‘노벨상(Nobel Prize)’은 인류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설립됐다.
1895년 11월 27일 노벨은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이란 내용을 담은 유언장을 남겼다. 이후 노벨은 자신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했고,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노벨재단을 설립했다. 이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노벨상은 세계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상들 중 하나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롬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만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새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써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노벨상은 독창성을 중시한다. 인류에 큰 기여를 한 연구 및 발명이 있을 경우 그 아이디어를 맨 처음 만든 사람에게 상을 준다.
수상식은 노벨 사망일인 12월 10일에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해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르다.

서울로부터 52㎞, 개성으로부터는 24㎞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북한 제1땅굴은 연대 병력을 한 시간 이내에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로 제1땅굴 발견으로 북한의 음흉한 남침 야욕이 만천하에 드러났다.[출처_뉴시스]

[1974년 11월 15일] 북한 제 1호 땅굴 발견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에서 북한이 파내려온 땅굴이 발견됐다. 처음으로 발견된 남침용 제1호 땅굴이다. 당시 7시50분경 군사분계선 남측을 순찰하던 육군 25사단 수색대원들이 지표의 공기구멍에서 증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온천이 나오나 보다”며 농담을 하고 지나려는 것을, 선임하사였던 구정섭 중사가 이상이 있음을 직감하고 굴토 작업을 시작했다. 땅굴은 폭 91㎝, 높이 1.2m 규모로 남방한계선 1,200m까지 뚫려 있었다. 지표에서 250~450㎝ 깊이로 잔디가 죽지 않을 정도로 파고 철근이 세 가닥 들어간 조립식 콘크리트를 사다리꼴로 엮어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땅굴 속에는 먹다 남은 밥과 국이 있었고 터널 곳곳에서 다량의 폭발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폭발물에 의해 국군장교 1명과 미군장교 1명이 순직하고 6명이 부상하는 참변을 겪었다.
이 땅굴은 서울로부터 52㎞, 개성으로부터는 2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당시 굴토 작업이 시작되자 북한 초소 쪽에서 약 3분간 300여 발의 기관총 사격을 가해왔으며 우리 군이 응사하면서 간헐적으로 1시간 15분 동안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 땅굴이 연대 병력을 한 시간 이내에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라고 발표하고 정부에서는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북한 측에 땅굴현장의 공동조사를 제의했으나 북한측은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에서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는 비방과 함께 이를 거부했다.
이는 역사적인 7.4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발견된 것으로 북한의 음흉한 남침 야욕이 만천하에 폭로됐으며 국방부는 북한의 땅굴이 다른 곳에도 더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고 땅굴수색작업을 실시, 이후 모두 4곳이 더 발견됐다.

1989년 11월 9일, 약 10여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동서냉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제 서로를 갈라롷은 장벽은 없지만 그 흔적이 도로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출처_뉴시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화해의 장벽으로

1989년 11월 9일, 동서냉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동독의 동베를린 지역 책임자 귄터 샤보브스키는 “동독시민은 외국으로 여행해도 좋고 여권은 즉시 발급될 것”이라며 베를린 장벽을 비롯해 동독의 모든 국경을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국경이 개방되자 수백 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과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베를린의 브란텐부르크문은 연일 역사의 현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동서냉전 완화에 크게 기여했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도 브란텐부르크문을 방문했다. 베를린 장벽 개방과 함께 동독의 개혁은 더욱 가속화됐다.
독일에 냉전의 상징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건 1945년 5월 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 ‘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 됐다.
그 후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독일분단 44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28년 만에 분단의 현장 베를린 장벽은 개혁과 개방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11개월 뒤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역사적인 통일을 달성,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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