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이 불린 날들, 121년 전 음성이 담긴 아리랑 원통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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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이 불린 날들, 121년 전 음성이 담긴 아리랑 원통음반
  • 이은진 기자
  • 승인 2017.11.0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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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흥겨운 난장과 121년 전의 애환의 소리

(시사매거진235호_이은진 기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북악산 전경을 선명하게 펼쳐놓은 광화문 광장은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와 함께 우리의 노래 ‘아리랑’의 흥겨 운 가락이 넘실댔다. 수많은 아티스트와 시민들이 참여하여 아리랑의 가치를 되새기고 즐겼던 ‘서울아리랑페스티벌2017’ 그 화려한 축제 한편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는 단출한 음반들 안에는 100여 년 전 우리 민족이 부른 ‘아리랑’의 가락이 담겨있어 묵직한 감동을 자아낸다. 

[아리랑이 흘러온 역사]
단조로운 선율과 여음 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과 ‘그리움’, 조국을 잃은 민족의 광복을 염원한 ‘결의’가 녹아있는 우리의 민요 ‘아리랑’. 오랜 시간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어루만지며 구전되어온 아리랑은 21세기에 이르러 보다 역동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대중적인 음악 장르로 편곡된 아리랑은 국제무대에 이름을 올린 한국스포츠를 응원하며 온 국민을 결집시켰고, 연극, 뮤지컬, 공예 등 다양한 예술장르로 파생되며 더욱 다채롭게 발전했다. 형태는 변화했지만 늘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불렸던 아리랑은 시공간을 관통하는 공통의 정서를 품고 있다. 이러한 문화사적 가치를 가진 ‘아리랑’은 인류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한국의 비공식적 국가로 인식될 만큼 한민족을 대표하는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1867년, 아리랑의 형성
경복궁 중수공사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고 정든 고향 을 떠난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 고역했다. 이때 그들의 입에 맴돌던 민요들이 공유되고 여러 곳으로 퍼지면서 ‘아리랑’ 이 형성되었다는 연구가 있다. 아리랑이 각 지방마다 선율이 다르지만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는 이유 또한 경복궁 중수공사 때 불리며, 그 선율이 확산되었다고 유추한다.

1896년, 최초의 아리랑 음반 ‘유학생 아리랑’
1896년 미국 인류학자 앨리스 플래처가 세계 민족음악을 채집하던 중, 미국 워싱턴에서 조선인 유학생 3명에게 민요를 부르게 해 에디슨 원통음반에 녹음한 ‘유학생 아리랑’이 최초의 아리랑 음반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두 번째 아리랑 음반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병사로 참전한 고려인이 독일군 포로로 수용소에 잡혀갔을 때 녹음한 ‘고려인 아리랑’으로 독일베를린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896년, 최초의 서양식 아리랑 악보
1896년 미국인 헐버트(Hommer B. Hulbert(1863-1949)에 의해 아리랑이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보되었다. 헐버트는 1896년 영문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에 ‘Korean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게재할 때 아리랑을 악보로 기록하여 외국인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노래로 ‘아리랑’을 알렸다.

1910-1930년대, 광복군 군가 ‘아리랑’
1910~1930년대 일제강점기, 만주 등지에서 독립군이 군가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전해진다. 당시 독립군 전사의 결의를 다지는 내용으로 ‘독립군 아리랑’을 공식 군가로 채택했다. 1941년에는 중경 임시정부에서는 가장 익숙한 민요 ‘아리랑’ 특히 밀양아리랑 선율을 보다 진취적으로 편곡해 군가로 불렀다.

1926년, 일제강점기 저항의 불씨 ‘아리랑’
1926년 10월 상영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우리나라 제 1호 저항영화이다. 영화의 주제가인 ‘신 아리랑’에는 일제탄압에 의해 사회 전반적으로 고통을 겪었던 우리 민족의 한이 고스란히 담겼다.

1991년,  남북단일팀 단가 ‘아리랑’
남북이 국제경기에 함께 출전하여 입장과 시상식에서 그리고 응원가로써 ‘아리랑’을 함께 불러, ‘아리랑’은 대동과 상생의 정신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은 ‘아리랑’을 단가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북한이 제안한 ‘20년대 아리랑’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이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가 축구로 하나가 되었던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아리랑은 보다 역동적인 리듬과 에너지로 응원 열기를 더했다. 특히 윤도현밴드의 록 버전 아리랑, 김덕수 사물놀이의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한국팀의 4강 기적을 만드는 데에 큰 힘을 보탰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
 2012년 12월 5일, ‘아리랑’이 인류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아리랑’이 특정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공동체에서 세대를 거쳐 재창조되며 다양한 형태로 전승된다는 점에 주목하며 아리랑의 문화적 가치에 찬사를 보냈다.

[서울아리랑 페스티벌2017]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2013년부터 시작된 ‘아리랑페스티벌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도심 한복판에 ‘아리랑’을 주제로 문화적 가치를 되새기는 행사를 연다. 올해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덕에 선명하게 펼쳐진 북악산을 배경으로 ‘아리랑’의 곡조를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광화문광장에는 국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 관현악단, 명창 안숙선, 소리꾼 장사익, 뮤지컬배우 카이, 국악인 최수정, 120명의 합창단 등이 연주하는 ‘아리랑 대취타’와 ‘아리랑 환상곡’이 울려 퍼졌고, 프로와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아리랑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아리랑경연대회’와 아리랑을 시각예술로 형상화하는 ‘조형물공모전’이 마련되었다.
아리랑의 문화사적 가치 공유와 확산을 위해 힘쓴 인물에게 상을 주는 ‘서울아리랑상’에는 일제강점기에 극단 ‘토월회’를 조직하여 연극 ‘아리랑 고개’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기여한 故박승희 선생에게 돌아갔으며,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에는 경복궁 정문 앞에서 취타대의 웅장한 나발소리와 함께 북청사자놀이, 태극무예, 길쌈놀이, 풍물패 등 다양한 팀이 흥겨운 판놀이를 펼친 ‘아리랑 난장’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원통음반에 담은 121년 전의 ‘아리랑’]
흥겨운 아리랑 가락으로 광화문광장이 넘실댈 때, 이와 대비 되는 차분한 매력으로 일관한 전시가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북측광장의 작은 컨테이너박스에 예스러운 유성기와 음반 전시품들을 아기자기하게 놓은 특별전시 ‘아리랑, 에디슨 원통 음반에 담다’ 전(展)은 ‘아리랑’의 옛 음성이 주는 감동을 묵묵하게 전했다.
원통음반은 백열전구를 만든 토머스 에디슨의 발명품 중 하나로, 원기둥 모양의 나무 표면에 촘촘한 굴곡을 만들어 음을 담아내는 원리인데, LP(Long Play)나 SP(Standard Play)보다도 이전인 1888년 등장한 초창기 녹음·재생 장치이다. 황성일보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원통음반을 즐겨 들었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원통음반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만큼 사람들에게도 낯선 물체였다. 1998년, 미국의 프로바인 교수가 한국 국악학회 세미나에서 미의회도서관이 아리랑 원통음반을 소장하고 있다고 발표했고, 음악을 전공하고 음반에 관심이 많았던 정창관 고음반전문연구가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원통음반 기술을 직접 배워 2006년, 그 옛날의 원통음반을 고스란히 복제하여 2017년에 이르러 전시를 열게 되었다. 이 전시품 중에는 특히 우리 민족이 타지에서도 고향을 그리며 불렀던 아리랑의 한 서린 가락이 담겨 있다.

조선인 유학생의 음성을 담은 미국의 인류학자 ‘엘리스 플레처(1838-1923)’(왼쪽)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잡혀온 포로들이 부른 ‘고려인 아리랑(1916)’ (오른쪽)

가장 주목받는 ‘유학생 아리랑(1896년)’은 한민족 최초의 음원으로 발굴된 것으로 1896년 인류학자 엘리스 플레처(Alice C. Fletcher)가 조선인 유학생 3명의 노래 11곡을 6개의 원통음반에 담은 것이다. 당시의 조선인 유학생은 안정식, 이희철 그리고 Son. Rong으로 표기된 인물로 알려졌으며, 음반의 명칭은 ‘Love Song-Ararang’으로 표기되어있다. 이중 아리랑 은 3곡이 포함되어 있는데, 당시 원통음반의 재생 시간은 2분에 불과해 아리랑은 20초, 50초 단위의 짧은 길이의 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로 알려진 아리랑 음반은 ‘고려인 아리랑(1916년)’이다. 1860년대 한민족은 한반도 북쪽의 대기근으로 인해 연해주로 대거 이주해 조선인촌을 형성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과의 전투에 다수의 조선인이 참전했고, 그중 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독일의 학자들로 구성된 표음문자위원회는 다양한 언어와 음악을 사용하는 종족의 음성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로, 포로로 잡혀온 다양한 민족들의 음성을 원통음반에 녹음했다. 그중 조선인 포로들이 부른 민요에 아리랑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해외에 있는 소장품을 복제하여 전시하기까지에도 많은 시행착오가 따랐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원통음반을 전시하여 음반 역사와 문화재 발굴에 관심을 갖게하였고, 원본의 나무 재질 특성 상 재생할수록 열화되는 점을 개선해 플라스틱 재질의 복제품을 유성기와 함께 전시함으로써 아리랑의 옛 음성을 그 자리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오랜 시간 구전되어온 아리랑의 실제 음성을 들음으로써 100여 년 전 아리랑의 발음과 곡조, 정서 등을 가늠할 수 있어 의미가 있다. 아리랑 원통음반전은 화려한 무대 사이 작은 컨테이너 속에 단출하게 전시되었지만, 아리랑을 널리 알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아리랑의 깊은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하며 그만의 가치로 묵묵하게 자리를 빛냈다.
  

정창관 (고음반전문연구가, 전시품 제공자)

[인터뷰]
아리랑 원통음반 전시를 기 획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인류의 첫 홈 엔터테인먼트인 원통음반을 눈으로 보며, 녹음과 재생의 역사의 시작을 소개한다는 점에 주목했 습니다. 이밖에도 ‘혹시 우리나라에도 원통음반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전시 를 통해 원통음반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19세기 말 이 땅에서 녹음되고 즐겼던 원통음반이 우리 땅에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리기도 합니다. 누군가 ‘우리 집 옷장에도 이렇게 생긴 원통이 있더라’라고 생각하여 세상에 나온다면,그것은 분명 100년이 넘은 음악이고 음반일 테니 문화재가 될 것입니다.

전시품의 원본이 해외에 있기 때문에 전시 기획에 시행착오가 있었을 테죠.
원통음반은 복제품이지만, 국내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을 진행한 것이라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고 시행착오를 많이 거쳤습니다. 서양음악의 원통음반은 700개 정도가 있는데, 우리 민족의 음악이 남아있는 원통음반은 아직까지는 이곳에 전시된 게 전부입니다. 전시를 위해 원본을 소장한 미국과 독일에 여러번 원본을 요청했으나 독일에서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독일베를린민족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인 포로들의 아리랑은 우리 음악만 담긴 단독의 음반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당시 잡혀간 각 민족의 음악이 함께 녹음된 것이기 때문에, 복제품을 만들어주는데에서 그쳤습니다. 원본을 개인이 찾아오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시를 통해 시민들이 얻어가길 바라는 점.
지금까지는 잊고 있었지만 에디슨 원통음반의 역사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SP음반, LP음반, CD음반 그리고 MP3로 발전되어 온 음반 역사의 시작점이 에디슨 원통음반이며, 그 원리를 알리고, 소리를 듣는 것에 의미가 있는데요. 비록 전시는 복제품이지만 해외에 남아있는 우리의 음악이 담긴 원통음반을 언제가 이 땅에 가져와야 한다는 의견이 모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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