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업사냥꾼 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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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기업사냥꾼 활개
  • 글/ 김정숙 기자
  • 승인 2006.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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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글로벌시대 우리기업 안전 한가
칼 아이칸 KT&G 공격 시작으로 본격적 진출
칼 아이칸이란 세계적 기업사냥꾼이 한국에 상륙해 KT&G를 공격했다. 갈 곳 없는 미국 자본이 다시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아이칸의 KT&G 경영권 도전은 외국 자본의 한국 공습의 전초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국경 없는 글로벌시대에 자본의 국적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국부유출의 위협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지는 신중히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최근 국내 경제계 최대 화두는 단연 ‘기업사냥꾼(raiders)’이다. 영화 속에서나 나오던, 때문에 국내에서는 생소한 단어인 기업사냥꾼이 연일 매스미디어를 장식하고 있다. 기업사냥꾼은 적대적인 M&A(기업인수·합병)를 통해 경영권을 뺏은 후 대규모 인원감축이나 자산매각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여 이를 되팔아 차익을 남기는 사람이나 집단을 말한다. ‘사냥꾼’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부정적 의미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1980년대 기업사냥꾼이 득세해 사회적인 문제도 됐지만, 이후 여러 가지 경영권 방어대책이 나오면서 기업사냥꾼의 수는 크게 줄었다. 그리고 기업사냥꾼들도 적대적인 M&A보다는 우호적인 M&A를 통해 사회적 파장을 줄이려고 한다. 그러나 끈끈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칼 아이칸이란 세계적인 기업사냥꾼이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 2월 3일 금요일 짤막한 금융감독원 공시가 국내 경제계를 발칵 뒤집었다. 공시내용은 ‘상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아이칸측 소속 펀드 외 3개 펀드가 ‘경영참여’ 목적으로 KT&G 지분 6.59%를 확보했다는 것. 더욱 놀라운 것은 아이칸이 KT&G를 공략하기 위해 워렌 리히텐슈타인이라는 또 다른 거물 기업사냥꾼과 연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월스트리트에서는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기업사냥꾼은 주로 미국계 자본인데, 미국에서는 1990년 들어 기업과 경영자를 공포에 떨게 했던 기업사냥꾼이 하나 둘 자취를 감췄다. 미국 정부가 여론을 등에 업고 이들을 규제했기 때문. 기업들도 이를 잘 활용해 나름대로 방어책을 마련해 나갔다. 그러면서 기업사냥꾼의 먹잇감이 줄게 됐다. 결국 갈 곳 잃은 미국의 자본은 기업사냥꾼에서 헤지펀드 등으로 탈바꿈했다. 미국에서 더 이상 마땅한 공격대상을 찾지 못한 이들이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 등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간 외환위기도 이러한 헤지펀드 등의 공격 때문이라는 주장이 정설이다. 따라서 아이칸·리히텐슈타인의 지분 매입은 미국계 자본의 동남아시아 2차 공격인 셈이다. 리히텐슈타인의 경우 일본시장에서 2003년 요시로화학을 공격한 이후 계속해서 일본의 다른 기업 지분을 취득하고 있어, 그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을 신호탄으로 월스트리트를 주름잡는 기업사냥꾼들이 한국에 본격 상륙할 것이라는 성급한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KT&G 뿐만 아니라 국내 다른 기업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국민기업은 못건드려
아이칸·리히텐슈타인 후속타자로는 M&A 중개회사인 KKR(콜버그크라비스로버츠)가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거물급 기업사냥꾼인 KKR는 1999년 헨리 크라비스 회장이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을 만나 “한국에 투자할 계획이 있다”고 밝힐 정도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보험업법 상 요건을 갖추지 못해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KKR는 2005년 5월에 서울보증보험 등 삼성자동차채권단이 매각하려는 삼성생명 지분의 인수를 추진한 바 있다. 계속해서 한국 시장을 탐색해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버린·론스타 등에 이어 칼라일 등 사모펀드(PEF)도 미국 시장을 벗어나 일본, 독일, 홍콩에 상륙했다. 최근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전세계에 ‘주주행동주의’가 확산되면서 기업사냥꾼들이 지구촌 전역을 휘젓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주행동주의는 주주들이 배당금이나 시세차익에만 주력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이사회를 장악하는 등 경영에 개입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전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고수익 기회를 찾는 자금 규모는 1조2600억 달러로 2년 전에 비해 2배 늘었고, 전세계 PEF 규모는 2460억 달러로 같은 기간 150% 증가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엄청난 자금들이 전세계로 먹잇감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서울Z파트너스 관계자는 “한국 기업이 저평가돼 있어 투자가치가 있는 기업들이 꽤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사냥꾼이 주로 노리는 먹잇감은 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은 기업, 주식가치에 비해 자산가치가 높은 기업 등이다. PCA투신운용 관계자는 “기업사냥꾼은 자산가치가 높은 기업을 좋아하며 대주주 지분이 높아 경영권이 확고한 기업은 공격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KT&G다. 현재 기업사냥꾼의 공격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곳은 KT, 포스코, 삼성물산, 국민은행, NHN 등 최대주주 지분비율이 낮은 우량기업들이다. 서울Z파트너스 관계자는 “민감한 문제라서 이들 기업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시가총액 상위 기업 중에 공격 대상이 될 기업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PCA투신운용 관계자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기업사냥꾼의 목표가 될 만한 국내 기업은 많다”면서 “다만 지금 상황에는 쉽게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분석했다. 유 상무는 특히 “포스코 등 국민기업은 여론 때문에 기업사냥꾼이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USA투데이, “전쟁 계속될 것”
미국의 일간지 USA투데이 인터넷판은 4월 17일(현지시각) 칼 아이칸의 KT&G 공격으로 한국의 외국인투자자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으며, 양자간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USA투데이는 “KT&G가 한국에선 예외적으로 지난 3년간 이익을 주주에게 돌려주고 구조조정을 통해 지배구조 우수기업으로 거듭나는 등 주주 위주의 경영으로 유명하다”며 “(그런데도) 칼 아이칸과 스틸파트너스 연합이 공격을 해 한국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전했다.
‘전설적인 기업사냥꾼’ 아이칸의 행위가 윤증현 금감위원장 등 정부관계자로 하여금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시도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하고, 국수적인 언론들이 ‘국부유출’을 강조하며 외국자본에 대해 공격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CEO들과 애국적인 국민들에게 아이칸은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USA투데이는 보도했다.
이어 리히텐슈타인 스틸파트너스 대표가 KT&G 이사회에 입성하고 아이칸 연합이 요구했던 바이더웨이 지분 매각 등이 이루어지면서 아이칸이 1라운드에서는 부분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KT&G가 끝내 인삼공사 상장은 거부하는 등 만만치 않다며 “전쟁은 계속 될 것”으로 예상했다. KT&G를 공격중인 스틸파트너스의 워런 리히텐슈타인 사장은 이미 적대적 인수·합병(M&A) 대상이 될 만한 국내 10여개 기업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KT, CJ, 효성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틸파트너스는 서울 사무소 설립까지 서두르며 추가 사냥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 상태다.
역사상 최고의 기업사냥꾼으로 불리는 헨리 크래비스의 사모투자회사(PEF)인 콜버그 크라비스 로버츠(KKR)도 한국을 사정권에 두었다. 동북아지역을 겨냥해 최근 홍콩과 도쿄에 지점을 연 KKR은 지난해 이미 삼성생명에 입질을 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증권연구원 관계자는 “아이칸 외에도 한국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 외국계 기업사냥꾼과 PEF가 무수히 많다”고 말했다.
한국이 국제 기업사냥계의 사정권에 들어간 것은 지난 2003년. 소버린자산운용(현 소버린글로벌)이 SK(주)의 지분 14.99%를 확보하고 경영권 공격을 개시하면서부터다. 이듬해 노르웨이계 해운사인 골라LNG가 대한해운의 지분율을 21.09%까지 끌어올리며 압박을 가했고, 올해는 아이칸과 스틸파트너스가 KT&G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처럼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외국계 자본의 공격이 잇따르고 있는 것은 우량한 재무구조와 낮은 주가 때문이다. 대우증권에 따르면 국내 187개 주요 기업의 부채비율은 지난 2004년 88.4%로 3년전인 2001년(117.2%)에 비해 28.8%포인트나 낮아졌다. 부채가 줄면서 자기자본은 그만큼 늘어났지만 주가는 여전히 저평가된 상태다. 한국 코스피 상장사들의 올해말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4배로, 미국(2.8배)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대우증권은 예상했다. 수익을 목적으로 달려드는 기업사냥꾼들의 입맛에 딱 맞는 조건이다.
우리투자증권 관계자는 "외환위기 전까지 한국 기업들이 부채과잉 상태에 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자본과잉 상태에 있다"며 "남아도는 자기자본에 대한 고배당, 자사주 소각 등의 요구가 기업사냥의 좋은 명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취약한 기업지배구조도 사냥감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배구조가 약한 기업을 타깃으로 삼는 주주행동주의 헤지펀드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 한 M&A 전문업체 대표는 “아이칸의 KT&G 공격은 한국 시장의 분위기와 법규를 파악하기 위한 모의고사에 불과하다”며 “소버린이 초등학생이고, 아이칸이 대학생이라면 앞으로는 KKR과 같은 대학원생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사냥도 OEM시대
한편, 기업사냥에도 일종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시대가 왔다. 적대적 인수합병(M&A) 전문가들이 늘면서 기업사냥꾼들을 위한 ‘종합서비스’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헤지펀드시장이 급성장하면서 M&A를 통해 차익을 노리는 위험차익거래(리스크 아비트리지) 전문가도 크게 증가했다. 리히텐슈타인 사장 역시 발랜트래파트너스라는 헤지펀드의 리스크 아비트리지 애널리스트 출신이다.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확대로 기업지배구조펀드(CGF)들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CGF를 자처하는 소버린자산운용(현 소버린글로벌)의 사례에서 보듯 공격적 CGF와 기업사냥꾼의 행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OEM 방식의 기업사냥 서비스는 기업사냥꾼들에게 전세계 동시다발적 공격이 가능하도록 했다. 아이칸은 KT&G뿐 아니라 미국 바이오업체 임클론과 핀란드 암석분쇄기 제조업체 멧소 등을 공격하고 있다. 스틸파트너스는 미국 요식업체 폭스&하운드 레스토랑그룹, 세탁 전문업체 안젤리카, 굴착업체 레인크리스티센 등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다.
기업사냥에는 최소한 ▲정보수집과 전략수립을 돕는 재무자문사 ▲법무와 법률자문을 맡는 법무대리인 ▲홍보대행사 3개 지원부대가 필요하다.
소버린의 경우 SK(주)를 공격할 때 재무자문사로 라자드, 법무대리인으로 법무법인 명인, 홍보대행사로 액세스커뮤니케이션 등을 고용했다. 소버린은 대형 투자은행(IB) D사와 컨설팅업체, 국내 대형 로펌의 자문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라자드는 현재 아이칸의 재무자문역을 맡고 있다.
스틸파트너스는 이번에 법무대리인으로 법무법인 대륙과 에버그린, 홍보대행사로 미국 시트릭을 고용했다. 재무분야는 대형 IB인 M사와 몇몇 국내 증권사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틸파트너스는 의결권 확보까지 전문업체 이니스프리에 맡겼다. 뉴욕에는 이니스프리 외에 조지슨 셰어홀더 커뮤니케이션스 등 수많은 위임장 확보 전문업체가 있다.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기업사냥꾼들이 한국 기업을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있는 셈이다. 이들은 유능한 대리인이나 자문역만 구하면 된다. 때문에 기업사냥꾼 업계에서 한국 전문가나 한국인들의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2004년 KT&G 경영진을 압박했던 영국 헤지펀드 더칠드런스인베스트먼트(TCI)펀드는 KT&G 공격을 위해 한국인을 고용했다. 당시 TCI펀드는 국내 증권사 런던법인에서 일하던 송모씨를 한국으로 파견하는 한편 통역을 위해 현지 한국인을 채용했다.
외국계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는 한 펀드매니저는 올 초 스틸파트너스측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굿모닝신한증권 관계자는 "최근 국제금융계에서 한국기업 스페셜리스트(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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