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계 4대 천왕 태진아, 초심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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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계 4대 천왕 태진아, 초심을 지키자!
  • 안수지 부장
  • 승인 2017.07.1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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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는 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한국 최고의 트로트 가수를 꼽으라면 현철, 송대관, 설운도와 더불어 제3대, 제4대 대한가수협회장을 역임한 ‘가수 태진아’를 4대 천왕으로 들 수 있다. 이들이 세워놓은 한국 가요사의 이정표는 뚜렷하고 명징하다. 1990년대 가요계는 록과 발라드가 주류를 이루었고, 다소 고풍스럽게 여겨지는 트로트는 겨우 명맥만 유지한 상태였다. 이때 ‘옥경이’란 노래를 부르며 등장한 ‘가수 태진아’는 정통이 아닌 세미 트로트로 ‘한국인의 정서를 잘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 최고의 트로트 가수로 등극한다. 더불어 트로트 음악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가수 태진아, 한국인의 정서 반영한 ‘옥경이 전성시대’
 
가수 태진아의 노래는 총 28곡이나 된다. 150만 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한 ‘옥경이’를 비롯해 이루 작사, 태진아 작곡의 부자 공동작업의 ‘동반자’는 무려 19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이후에도 계속해 발표되는 노래들은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태진아의 트로트계 평정’이라는 신화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고, 또한 트로트계의 대부로 등극하며 현재는 연예기획사 <진아엔터테인먼트> 대표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성공은 처음부터 당연히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그리고 성공을 이루어가는 과정에도 슬픔, 고통, 애환은 있다.
 
1980년 미국으로 이민 간 ‘태진아(조방헌·64)’는 그곳에서 가수 남진의 소개를 받아 지금의 아내인 이옥형(애칭 옥경이)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서른 중반의 나이로 가정을 꾸리게 된 그는 인생을 진지하게 반추하던 중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다시 한 번 도전하기 위해 1989년 한국으로 돌아와 가요계 활동을 준비한다.
 
이때 우연찮게 임종수 작곡, 조운파 작사의 ‘고향여자’란 노래를 받게 된다. ‘왠지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며, 곡명을 가장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옥경이’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미 이전에 발표한 몇 곡의 노래가 있었지만 새로 받은 이 곡에 진정성을 실어 아내의 이름을 부르듯 정겹게 “옥경아~”를 길게 소리내어 불렀다.
 
이후 그의 예명 ‘태진아’가 알려지면서 가요계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주변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늘어가면서 ‘더욱 열심히, 좋은 노래를 불러 대중과 함께 호흡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리고 1990년 ‘거울도 안 보는 여자’는 KBS 가요 TOP10에서 5주 연속 1위에 올라 트로트 부문에서 골든컵을 수상하는 영광을 부여했고, 후속곡인 ‘미안미안해’는 19991년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선희의 가방’, ‘노란 손수건’, ‘사모곡’의 연이은 히트는 침체돼 있던 트로트 계를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중장년 음악 프로그램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가수 태진아. 그는 연이은 히트곡을 내세우며 침체돼 있던 트로트 계를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가수 태진아, ‘추억의 푸른 언덕’ 떠올리며 후진양성에 몰두
 
1953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충북 보은에서 성장한 가수 태진아는 어릴 적부터 예능에 대해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4세가 되어 서울로 상경한 후 영화 <태권도 최후의 일격> <쌍태양>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만 19세 무렵인 1972년 서승일 작곡가 사무실에서 노래연습을 하던 중 ‘극장무대에 서보라’는 권유를 받아 ‘내 마음 급행열차’를 받아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유명했던 3명의 기라성 같은 연예계 선배 ‘태현실, 남진, 나훈아’의 이름을 따서 본명 대신 예명 ‘태진아’로 인지도를 넓히게 된다. 1973년 드디어 ‘추억의 푸른 언덕’이란 노래로 TV 공영방송인 ‘MBC신인 가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마음은 ‘창공을 나는 듯 기뻤고 온통 세상을 다 가진 듯 부풀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운영하던 ‘한밭기획’을 인수해 ‘진아기획’으로 개칭했다. 개인 기획사 프로듀서로 활동하게 된 태진아는 자신의 가수 초년시절을 잊지 않고 ‘초심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는 가수 마인드로써 ‘최선을 다하는 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그중 현재의 <진아엔터테인먼트> 1호 가수가 된 성진우. 이어 고 김자옥 탤런트, 견미리 탤런트 등이 영입되었다. ‘좋은 후배가수를 양성해서 더 좋은 노래를 대중에게 들려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현재도 가수 에일리, 제시, 신보라, 이루, 워너원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리고 2010년경에는 가수 송대관 후임으로 제3대와 제4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평소 대중에게 라이벌로 알려진 송대관과는 특별한 친분이 있고, 그 외 현철과 설운도 등은 한국 트로트계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 사안을 타진하고 논의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있다. ‘지금 방송계 현실이, 젊은이를 위한 방송 프로그램이 많다. 앞으로 꼭 그들만의 방송이 아닌 중장년 음악 프로그램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들려준다.
 
   
▲ 태진아는 국내에서도 보다 쉽고 편하게 대중과 교류하기 위해 디저트 카페 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연예인과 대중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것이 좋고, 차 한 잔과 음악이 있는 문화공간에서 휴식하며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카페를 오픈했다.
 
가수 태진아의 향후 계획은
 
과거 태진아가 데뷔하던 당시의 연예계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발돋움 단계라서 여러 모로 부족하고 열악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국가적 위상과 더불어 연예계 현실도 180도 달라졌다. 국내외, 국제적으로 연예인들이 활동하기에 매우 좋은 여건이 조성돼 있다.
 
가수 태진아는 “가수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역시 해외 공연을 갔을 때다. 슬프고 힘든 사람들을 노래로 위로해주고, 즐겁게 마음을 풀어주는 활동을 통해 재외동포들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고 술회한다.
 
현재 그는 국내에서도 보다 쉽고 편하게 대중과 교류하기 위해 디저트 카페 <K.2.1.2>를 운영하고 있다. 무대에서 바라보는 연예인은 대중과 거리감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카페를 찾은 대중은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가수 태진아를 만날 수 있고, 사진 촬영의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카페를 개설할 당시 그의 생각도 ‘연예인과 대중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것이 좋고, 차 한 잔과 음악이 있는 문화공간에서 휴식하며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착안되었다.
 
“일반인이 카페를 방문하고 난 후 매우 큰 친근감을 표한다. 카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얘기 나누고, 사진 찍어주고, CD에 사인해주는 일 등이다. 특별하지 않은 팬서비스가 그들의 일상엔 매우 특별한 시간으로 간직되는 것을 지켜보며 나 역시 매우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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