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욕구를 판단하는 능력과 미래에 대한 사업비전이 여성 CEO의 성공요인
'여성의 시대'라는 말은 이미 새삼스런 말이 돼버렸다. 사법시험을 비롯한 매년 국가고시에서 여성이 수석을 차지하는 것 이제 놀랄만한 뉴스도 아니다. 경제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여성 최고경영자들이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두각을 나타내며 국내 산업의 중심에 우뚝 섰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여풍이 거세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용주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처음으로 20%를 넘어섰다.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지배하는 기업 시장에서 살아남아 정상에 우뚝 선 여성 최고경영자(CEO)들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MBC와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가 최근 한국을 비롯해 세계 22개국 여성 CEO 1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가치혁신을 통한 블루오션 창출'(52.4%)과 '감성을 살린 경영방식'(20.3%)이 최고의 성공 요인으로 꼽혔다.
발상의 전환으로 이룬 블루오션 개척
새로운 가치혁신을 위한 고객창출, 즉 블루오션 개척과 함께 여성성을 강조한 감성경영이 그것이다. 두 가지 모두 기존 남성 CEO들이 별반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여성 C대들을 바로 이점을 파고들어 소비자들을 감동시켰다.
프랑스 쁘랭탕 백화점 대표인 로랑스 다농. 그녀는 백화점을 단순히 물건을 사는 거대 유통망이 아닌, 소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과감히 발상을 전환한다. 또 고객을 위한 각종 맞춤형 구매서비스를 선보이며 위기에 빠졌던 쁘랭탕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백화점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성공했다.
다국적 광고회사인 오길비&매더 월드와이스사 CEO셸리 라자루스는 여성 CEO의 대표 격이다. 미국 경제 전문잡지 ‘포천’이 선정한 미국의 여성기업인에 뽑힌 그녀는 사람의 모든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힘을 보여주었다.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그녀는 고객과의 쌍방향 교감을 중시하면서 강한 브랜드로 단골고객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10년 만에 중국 최대 에어컨제조업체 거리전대 대표에 오른 둥밍주. 그녀는 중국 기업계에 뿌리 깊은 '검은거래'를 청산하는 과감한 혁신과 더불어 사원아파트 건립, 직원들의 고충 상담 등 사원복지 향상에 힘써 직원들로부터 '누나'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싱가포르 최대 운수업체인 SMRT의 소픽화 대표가 CEO가 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직된 회사 문화와 서열의 파괴, 말단사원부터 중역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회의를 여는 일이었다. 이렇게 직원들에게 확실한 소속감을 부여한 결과, 업무효율성이 크게 높아졌고 회사 주가 또한 70%이상 상승했다.
조직문화 부드럽게 바꾸는 ‘감성경영’
최근 국내에서도 여성 경영인들의 ‘감성(感性) 경영’이 주목받고 있다. 여성 경영인들은 특유의 모성애를 발휘, 자칫 형식적이고 딱딱해지기 쉬운 조직문화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 광고회사 ㈜이노션의 대주주인 정성이(43) 고문은 최근 직원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것도 잠깐 다녀가는 형식적인 참석이 아니었다. 정 고문은 결혼식에 이어 피로연까지 참석, 식사를 하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노션 관계자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광고회사에서 정 고문은 평소 직원들과 위아래 따지지 않고 만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이노션이 매일 오후 4시에 직원들에게 과일·샌드위치·김밥 등 간식을 나눠주는 것도 정 고문과 직원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결정됐다. 정 고문은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맏딸로, 작년 5월 이노션이 설립된 후 고문을 맡고 있다.
현정은(51) 현대그룹 회장은 작년 말 대학입시를 치르는 임직원 자녀들에게 목도리와 함께 이메일을 보내 격려를 하기도 했다. 선물을 받은 임직원들은 “회사에서 가장 바쁜 현 회장이 직원 자녀들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보고 여성 CEO의 포용력을 강하게 느끼게 됐다”고 전했다. 현 회장은 지난해 여름에는 복날을 앞두고 임직원들에게 삼계탕을 선물하기도 했다.
성(性)의 문제가 아닌 능력중심 사회
중소기업청과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합동 조사결과 여성기업인이자 CEO의 86%는 여성이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이 ‘남성과 비슷하거나 유리하다’고 느끼고 있는 반면, ‘불리하다’고 인식하는 여성경영인은 1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98년 이후 ‘불리하다’는 생각은 계속하여 하락한 반면, 비슷하다는 의견은 상승 추세에 있어 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활발한 경영활동으로 인하여 여성사장이나 기업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차별은 많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성이 기업경영활동에 있어 유리한 점으로 드는 것은 92.7%가 ‘세심하고 꼼꼼한 특성을 살려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는데 용이하다’고 하였고, 불리한 점은 ‘가사 및 자녀양육의 병행’(29.0%), ‘사회적 편견’(28.8%), ‘남성중심의 접대문화’(21.7%) 등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여성 CEO가 경영하는 회사의 부채비율은 2002년도 64.3%에서 49.8%로 감소하였고, 자기자본비율도 2002년도 42.1%에서 2004년도에는 62.3%로 증가하여, 여성기업의 안정성 면에서 여타의 중소기업과 비교했을 때 매우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은 창업을 위한 사업 타당성검토, 상권분석 등의 단계부터 사업을 개시하기까지 최소 6개월 정도를 소요하는 것이 69.2%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사업 준비에 있어서 남자들보다 매우 신중한 결정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직접 창업이 82.3%에 달하여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여성기업인의 증가와 여성사장의 지속적인 등장은 우리 사회가 점차 ‘남성이냐 여성이냐’ 라는 성의 문제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경제적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일자리 창출 시급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 비정규직이 60~7 0%에 달하고 육아와 부양 의무까지 짊어진 ‘싱글맘’들이 급증하는 그늘이 숨어 있다. 전문가들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이 가장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 일과 가족이 양립할 수 있고, 노동시장에서 남녀 불평등 관행을 없애는 적극적 인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주문했다.
송명희 한국여성노동연구소 상임이사는 “여성들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선 우선 노동시장이 유연화 되어야 한다”며 “주5일 근무제로 파생된 주말 일자리를 고학력 중년 여성들에게 맡기는 식으로 여성들의 진입과 이탈이 자유로운 일자리를 늘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 경제활동인구가 50%를 넘었지만 노동시장에 선 여전히 성 차별이 존재한다”며 “싱글맘 여성들은 일을 안 하면 생계를 이어가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양육비를 지원하고 대상 또한 기초생활보호 수급대상자뿐 아니라 차상위 계층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독일 등 선진국은 ‘한 부모 가정’을 여러 가족 유형 중 하나로 보고 정부 차원의 다양한 지원책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한 부모 가정’에 매월 약 12만원의 아동육성수당을 제공하며 의료비도 무료이다.
싱글 맘의 비율이 ‘한 부모 가정’의 80%를 넘은 독일은 직업 알선과 아동 위탁 서비스를 정부가 직접 챙기고 있다.
황정미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위원은 “여성 경제활동과 육아ㆍ출산 문제를 조화시키기 위해선 양육 서비스를 우선 고려한 뒤 일자리 창출에 나서야 한다”며 “대부분 빈곤층에 속하는 여성 가장들에게 값싼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려면 공공부문에서 먼저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명금 한국여성경제인협회 회장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 는 여성인력 활용에 달려있다”며 “여성 인력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여성이 노동 시 장에 진입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을 함께 제거해야 여성인력 활용과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