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동안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보통의 건강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죽음의 한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을 뿐,
그것에 대해 깊이 있는 사고를 해본 적이 없다.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자는 남은 가족에게 아픔을 주며 경제적인 타격을 주게된다.
망자가 남긴 유서나 유언은 그 어떤 철학적 교훈보다 유족들에게 강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부정(否定)이며 삶을 뒤집은 것이므로, 죽음에 대한 뜻을 묻는 것은 삶의 뜻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또한 죽음은 모든 순간에 올 수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뜻을 반성, 본래의 자신과 그 사는 목적을 주체적으로 다시 질문하여 삶과 죽음을 전체적·통일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올해들어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유서쓰기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각계층의 명사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운동은 물론 임종을 앞둔 유언장은 아니다. 그러나 유서나 유언을 금기시 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이다.
모든 인간은 하루하루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고 있다. 비명횡사의 위험이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간판이 떨어지거나 가스가 폭발하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급사(急死)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인들은 만일에 대한 대비가 어느 정도 되어있는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근거없는 낙관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조차 ‘나는 괜찮겠지’라든지 ‘별일이 있겠나’ 하는 생각을 너무도 쉽게 한다.
최근 서울 홍제동 화재 사건 당시 순직한 6명의 소방관들의 경우도 그렇다. 사선을 넘나드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생명보험에 든 사람은 불과 두 사람에 불과했다. 나머지 4명 가운데 두 사람은 각각 연금 보험과 암 보험에 들고 있었지만 남은 가족들을 재정적으로 완벽하게 책임지는 보험이라곤 할 수 없다.
신문에 등장하는 흉악범이나 불우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지나온 길을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어’하는 대목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졸지에 생계가 막막해져 어머니가 생업 전선에 나서는 바람에 돌 볼 사람이 없어서 비뚤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생계를 떠맡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녀들의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유서는 남은 유족들에게 강한 버팀목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유언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들었을 것이며, 또한 유서에 대한 필요성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쁘고 또 죽음에 대해 두렵기도 하며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므로 차일피일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유서를 써놓고 싶어도 재산이 없으니 유서를 어디 쓰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대다수다. 그러나 유서는 재산이 많은 사람만 남기는 문서가 아니라, 없더라도 내가 아끼던 물건이나 가보, 또는 남기고 싶은 말을 문서화해서 다음 세대에 남겨주는 문서다.
유서의 필요성은 사후에 자신의 모든 소유물에 대한 처리 방법을 본인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기술된 법적 서류로서 재산에 대한 증여세를 축소시키거나 가족의 기본금 보장과 증여, 기증 등의 분배를 자신의 생각대로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무(無) 유언자는 가족에게 아픔을 주며, 자신에게는 어리석은 일로서 소정의 법적 절차를 거쳐 상속을 받을 때까지 가족들은 경제적인 타격을 많이 받게 된다. 망자가 남긴 유서나 유언은 그 어떤 철학적 교훈보다 유족들에게 강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현실은 이렇지만 아직도 유서쓰기 운동의 취지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도 선뜻 유서 쓰기를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강권에 못이겨 유서를 썼던 한 저명 인사는 “정초에 유서를 쓰고 나니 지금까지도 기분이 찜찜해서 유서를 쓴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어느 유명 개그맨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아직까지도 이런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은 호스피스들이다. 호스피스들이 얘기하는 ‘잘 죽는 죽음’이란 “잘 살아야 잘 죽는 것이다”라고 한다.
평화스럽게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일을 마무리하고,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은 유족들에게 맡기고 숨을 거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가. 죽음을 끝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 자기가 맡은 임무를 잘 알고 때가 되어 물러나는 것이 한세상을 잘 살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한다.
죽을 때 가장 힘들게 죽는 세 종류의 인간형이 있다고 한다. 첫째 유형으로는 남을 괴롭히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생전에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많이 했다거나 남을 해코지하고 재산을 빼앗은 사람이다. 둘째 유형은 남을 충분히 도울 수 있었는데 돕지 않은 사람들, 수전노처럼 살아온 사람들 역시 힘겹게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으로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일만 했던 일 중독자들도 죽을 때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때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임종을 앞둔 한국인들 중 60% 가량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체념한다고 한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반면 90% 이상의 미국인들은 죽음을 또 다른 연장이라 여기며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세계 문화권의 사생관
세계 문화권의 사생관
한국인에게 있어서 저승은 이승의 연결이다. 육신은 땅에 묻히더라도 혼은 가족과 한집에 더불어 살면서 조석(朝夕) 상식으로 밥도 더불어 먹고 집안의 대사가 있거나 나들이 할 때면 반드시 그 앞에 고하므로서 영혼과 공존 공생한다. 곧 사생은 유명을 달리할 뿐이고, 죽어서 복을 받고자 덕을 쌓는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가까운 일본인은 충성·희생을 중시하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엇보다 죽음을 미덕으로 여겼다. 가장 일본적인 자살법으로 일컬어지는 할복도 그래서 나왔다. 적군의 우두머리를 생포하더라도 형벌을 가하기보다는 할복으로 자살토록하여 명예를 지키게 해주었던 것이다.
유독 배를 가른 이유도 따로 있었다. 봉건시대로부터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배에 깃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할복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으로 인식되었다.
중국 문화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내세나 피안보다는 현실 세계를 지향하는 문화가 꽃피워졌다. 일반적으로는 “죽음은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국에서는 인간의 역사적 삶에 대한 의의에 이르면 역사의 전적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짐으로써 후세 인간들에 대한 영향력을 통해 몸은 죽었지만 영원한 생명은 얻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서양 사람들의 사생관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죽음을 극복하며 육체 외에 또 다른 신령한 몸으로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육체와 영혼의 부활을 믿고 화장을 안하고 있다. 이슬람인들은 죽음을 매우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으로 여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인들은 현세의 구차하고 비굴한 삶보다는 용기 있게 싸우다 죽는 내세의 삶을 더욱 중시한다. 현세의 선행이 최후의 심판을 통해 천국에 듦으로서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내세관이다.
어떤 사생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며, 산 사람은 죽은 사람과의 지난 인연을 생각하고 정중히 장례를 치르게 된다는 그 형식은 옛날과 같더라도 그 뜻은 달라지고 있다.
영혼의 활동을 제한한다는 뜻에서 시체를 돌로 눌러두는 풍습이 무덤 즉 묘의 기원이지만 현재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은 죽은 사람에 대한 추억과 경모를 표시하는 뜻이 되고 있다.
현대인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공포보다 현실의 삶을 넉넉하고 즐겁게 충족시키는 편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변화가 없지만 죽음의 의미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
죽음의 진정한 교육적 의미
죽음은 모든 생명이 맞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은 또한 삶의 끝이고 삶의 관계를 단절하는 별리(別離)였다. 그래서 장례는 통곡과 슬픔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의례를 통해서 죽음은 산 자의 삶을 되살펴 다듬게 해주었다. 주검도 함부로 하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망자를 만날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하였다. 제례가 그러하듯 인간의 공동체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아울러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을 생활화하기조차 했다.
죽음은 멸절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담론은 삶의 거울을 넘어서 사후 세계를 진술하는데 이르렀다. 무릇 죽음은 ‘또 다른 관문’이었고, 지금 여기의 삶을 완성하는 계기였으며, 그 삶을 판단하는 증거였다. 죽음은 생명의 처음이고, 삶의 종국이면서 삶의 완성이며 몸의 소멸이면서 새로운 존재의 옷 입는 것이다. 죽음은 자연인데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고 신비이다. 죽음은 온갖 부정적인 함축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이해는 현대화가 되면서 아득한 것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생리적 설명이 힘을 얻으면서 죽음의 신비로움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생리현상, 물리현상이라는 인식 과정을 거치면서 죽음은 그 존엄성을 잃고 주검은 쓰레기가 되었다. 장례는 위생적인 행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죽음은 필연적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 죽음이 ‘헐값’이 되면서 죽음을 기피하는 ‘부자연스러운’ 태도가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고 있다. 오래 살려는 처절한 몸부림, 죽음을 장식하고 미화하는데 엄청난 투자를 하는 일이 그렇다. 적어도 죽음이 신비라는 사실, 그것은 물화된 현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감지하도록 감성을 자극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아울러 가정에서의 죽음 경험이 죽음에 대한 진정한 교육적 의미, 곧 역설적이지만 삶에 대한 진지한 교육적 의미를 지니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검이 병원으로 실려가고, 망자가 ‘치워진 물건’으로 기억되는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각급 학교에서도 죽음은 논의할 수 있는 현실적인 주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성(性)이 금기로 덮여 있어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을 거울삼아 죽음에 대한 충분한 관심이 교육과정 속에 담겨 그 신비의 의미를 새삼 터득하게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죽음을 주제로 한 사회문화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죽음에 대한 각성은 건강한 사회의 지표이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회’는 그러한 운동의 전형이다.
종교 속의 삶과 죽음
인간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 삶과 종교는 죽음이라는 연결고리로 인해 이어져 있다. 종교와 죽음이라는 단어엔 어떤 두려움까지 내포되어있다. 인간이 종교를 추종하는 까닭에는 이렇게 죽은 후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동물은 누구나 죽음에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죽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단지, 동물은 현실적인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면, 인간은 현세보다는 내세의 삶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을 뿐이다. 그 관심이 지나쳐 공포로 까지 변형되고 그 공포를 승화시켜 만들어낸 것이 종교이다.
삶은 죽음, 죽음은 삶이다.
죽음이 값싸지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대는 녹색평화에 참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동시에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는 연계되지 않는 한 아무런 결실도 얻을 수 없다는 인식에 직면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현대는 바야흐로 ‘삶의 문제를 위한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끊임없이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보통의 건강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죽음의 한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을 뿐, 그것에 대해 깊이 있는 사고를 해본 적이 없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은 교만하지 않으며, 태어날 때 그대로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냉엄히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림자가 있을 때 빛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악이 있어야 선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삶이 아름답고 고귀해지는 것이다. 삶이 이렇듯 상대적이라면 죽음 또한 상대적인 것이다. 이 상대성을 깨닫고 삶과 죽음을 초월한 생을 사는 사람은 생사를 차별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사의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자아를 망각하고 추태를 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